아트 살롱

페르메이르 - 정물로 남은 평범한 일상

라라와복래 2015. 8. 22. 12:34

페르메이르

정물로 남은 평범한 일상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106552342    2010.05.10

네이버 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 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처음 만나는 그림>(아트북스, 2009)과 <아트 북스,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 <그림 속 소녀의 웃음이 내 마음에>(을유문화사, 2017)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전업 미술가가 아니면서도 ‘그림을 읽어주는 남자’ 선동기 님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자신만의 상상을 더하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다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처음 만나는 그림>이 세상에 나온 지 10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를 중심으로 소개를 하다보니 ‘블루 오션’을 만들었다고 제 책을 평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라고 유명한 화가들을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고백하자면 많은 블로거들이 소개를 했고 또 그보다 더 잘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걷는 것이지요. 아주 가끔은 저도 제 나름대로 잘 알려진 화가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몇 이웃들께서 어깨를 토닥거리시는 바람에 힘을 내서 늘 써보고 싶었던 네덜란드의 얀 페르메이르(Johannes, Jan or Johan Vermeer, 1632-1675)를 늘 해 왔던 식으로 정리할까 합니다.

부엌의 하녀 The Kitchen Maid, 45.5x41cm, c.1658

그림을 보면 정적이 돕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림 양쪽 대각선이 만나는 지점 근처 여인의 오른쪽 허리 부근에 우유가 흘러내리는 정면을 배치해서 관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단지에서 떨어지는 흰 우유의 선을 따라가다 보면 극도로 긴장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 진지함 때문에 페르메이르의 작품 속에는 당시 풍속화에 남아 있던 유머는 사라지고 정물만 남았다는 지적도 타당해 보입니다.

흰 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 있는 여인의 윤곽선이 선명합니다. 여인은 건강하고 당당한 모습입니다. 페르메이르가 아래에서 약간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을 택했기 때문이죠. 얼마나 섬세한 묘사를 했는지 왼편 유리창의 한 조각이 깨진 것까지 보입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그에 의한 그림자가 절묘하게 작품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습니다. 페르메이르의 모든 예술적 기술이 다 들어가 있는 느낌입니다.

주전자로부터 무엇인가를 따르는 행동은17세기에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는 행위의 상징이었는데, 그렇다면 여인은 무엇을 절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림을 볼 때마다 우유가 흘러나오는 소리와 여인의 나지막한 숨소리를 듣곤 합니다. 페르메이르가 세상을 떠나고 20년 뒤에 열린 경매에서 이 작품은 175길더에 판매되었는데 당시에도 비싼 가격이었다고 하는군요.

페르메이르를 소개한 대부분의 글은 그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다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실제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봐도 정보의 양이 도토리 키 재기 정도입니다. 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평생을 델프트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곳을 다녔다면 현지의 기록이 남겠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다닌 곳이라고는 암스테르담과 델프트 근처 헤이그 정도입니다. 제작한 작품의 숫자가 많지 않은데 그 작품마저도 델프트에서 그를 후원하던 사람이 대부분 구입하는 바람에 그림이 다른 곳에 소개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지요.

군인과 웃고 있는 소녀 Soldier and Laughing Girl, 49.2x44.4cm, 1658

살짝 열린 창으로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빛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등을 보이고 있는 군인의 말에 소녀의 얼굴이 환합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배경을 보니 벽에 지도가 걸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상상을 할 수 있겠군요. 앞에 앉은 남자가 연인인 경우입니다. 허리에 팔을 척 걸쳐 놓은 것을 보니 외국에 나가 적들을 상대로 ‘맹활약’한 이야기를 적당한 ‘뻥’과 함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녀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겠지요.

물론 우리나라 여인들은 군대 이야기라면 모두 고개를 돌리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군대에서 축구를 한 이야기만 아니면 들어주어야 합니다. 또 소녀의 연인과 같이 근무하는 군인이 연인의 소식을 전해주는 경우입니다. 몸 건강히 잘 있다는 연인의 소식에 한없이 밝아지는 소녀의 모습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소식을 듣는 것은 봄의 여린 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거든요.

페르메이르의 아버지는 직물업자였는데 중류 계급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암스테르담에서 견습생 생활을 하기 위해 살던 곳은 화가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미술에 대한 관심도 많았겠지요. 아마 이런 이유 때문도 있겠지만 취미 삼아 그림을 거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작은 여관을 인수해서 운영했는데 여관 운영 때문에 막대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그에게 남긴 것은 빚뿐이었습니다.

델프트 전경 View of Delft, 95.5x115.7cm, c.1660

예전에 델프트 도자기 공방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공방 옆으로 작은 하천이 흘렀는데 그림 속 그 강인지는 기억을 뒤집어봐도 알 수가 없군요. 이 그림 속에서도 빛이 주인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검은 구름은 땅에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멀리 구름에서 벗어난 높은 탑이 있는 곳은 햇빛에 반짝이고 있습니다. 페르메이르는 햇빛이 드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탑에 노란색을 두껍게 발랐다고 하죠.

페르메이르의 작품에는 시적인 정서가 가득합니다. 그림 속 델프트의 풍경도 실제 건물은 몇 개뿐이라고 합니다. 그가 꿈꾸고 사랑하는 델프트를 화폭에서 재편집한 것이죠. 덕분에 델프트라는 도시가 주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그림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싶은, 한없이 느긋하고 평화롭고 고요한 도시, 혹시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페르메이르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도 여전히 안개 속에 있습니다. 장소는 고향인 델프트라고 추정을 하지만 독학으로 배웠을 것이라는 설도 있고 키렐 파브리티우스의 작품 몇 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의 제자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초기의 페르메이르 작품에는 역사화가 있는데,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몇몇 위트레흐트 화가들의 작품과도 비슷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는가를 아는 것이 즐거운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화가는 작품으로 모든 걸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닐까요?

편지를 읽고 있는 푸른 옷의 여인 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 46.5x39cm, 1662/63

편지를 읽고 있는 여인의 입이 살짝 벌어졌습니다. 감정은 이미 가슴을 지나 입으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화가들 작품에서 편지를 읽는 모습은 대개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설명이 아니어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여인의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벽에 걸린 지도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편지를 보낸 사람은 혹시 저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테이블 주변에 있는 푸른 색 빈 의자도 연인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의자도 지도도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데 여인만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 효과로 여인은 벽과 분리되어 입체감 있게 묘사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200년 전 경매 안내서에도 빛과 그림자의 매력적인 효과가 언급될 정도였습니다. 여인이 서 있는 위치는 그림의 가운데입니다. 지도의 끝에 붙은 나무 봉이 위치한 곳, 그곳에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궁금합니다. 이왕이면 좋은 내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인이 임신한 것 같기 때문이죠. X-ray 검사 결과 원래 여인이 입고 있던 옷은 그림 속의 옷보다 더 넓고 끝이 털로 장식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폭을 좁히고 털 장식을 삭제한 페르메이르의 뜻을 알 길이 없군요.

1653년, 스물한 살의 페르메이르는 가톨릭 신자였던 카타리나와 결혼을 합니다. 장모는 페르메이르보다는 부유했는데 결혼 전에 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훗날 그의 작품 중에 가톨릭 전례 중 성찬전례에 대해 묘사한 작품이 있는 것을 보면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페르메이르는 장모가 살고 있는 넓은 집으로 들어가는데 2층에 화실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처갓집 신세를 지다니... 능력이 있었군요.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 Woman Holding a Balance, 40.3x35.6cm, c.1664

진주 목걸이가 보입니다. 여인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천칭저울이죠. 때문에 이 작품은 진주 목걸이를 저울질하는 그림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현미경으로 천칭을 본 결과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우의적(알레고리)인 내용을 묘사한 것이 됩니다. 여인의 뒤 배경에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앞에 놓인 진주 목걸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의 상징이 됩니다.

지금 여인이 들고 있는 저울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습니다. 여인은 최후의 심판 때 평가 받을 정신세계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되겠지요. 알레고리가 담겨 있는 그림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나저나 아직도 저울에 올려 있는 것을 내리기는 고사하고 여전히 무언가를 더 올려놓고 싶은 마음이 불뚝거리는데 걱정입니다.

아내와의 사이에 페르메이르는 모두 열네 명의 아이를 두었습니다. 그중에서 네 명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는데 쌍둥이가 없다고 가정을 하고 계산해보니 결혼 후 평균 1년 반에 아이를 한 명씩 낳은 셈입니다. 페르메이르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내가 참 힘들었겠습니다. 결혼하던 그해 성 루카 길드의 조합원이 됩니다. 성 루카는 최초로 성모 마리아의 이콘(Icon, 聖畵像)을 그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루카 복음서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루카는 예술가들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유럽 전역에 있는 예술가들은 곳곳에 루카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길드를 많이 조직했었죠.

물주전자를 든 여인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45.7x40.6cm, c.1664/65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죽 늘어놓고 보니까 몇 가지 눈에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인물이 있는 배경에 지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네덜란드를 호시탐탐 노리던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는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요. 이 작품에서도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변함이 없습니다. 맑은 아름다움과 섬세함도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물로 씻어낸 것 같은 깨끗함이 있습니다.

그림과는 다른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요? 작품과 관련해서 페르메이르만큼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메흐른이라는 네덜란드의 화상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나치 독일에 넘겼다는 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나치에게 넘긴 작품은 자신이 직접 그린 작품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두 달 만에 완벽하게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위조해냈습니다. 그는 나치에게 작품을 넘긴 것은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위조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 받아 결국 감옥에 갔습니다. 메흐른 역시 하늘이 내려준 화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간혹 메흐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창조와 모방의 경계는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절벽이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절벽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개인의 의지 문제이지요.

10년 뒤 페르메이르는 성 루카 길드의 대표로 선출되고 이어서 1671년에도 다시 길드의 대표로 선출되는데, 동료들 사이에서는 확실한 장인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당시 길드 장부에 남아 있는 기록에는 길드의 회비는 잘 내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회비를 잘 내지 않아도 대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군요.

붉은 모자를 쓴 소녀 The Girl with the Red Hat, 22.8x18cm, c.1665/67

그런데 말이죠… 고개를 돌린 소녀가 바로 말을 이어갑니다. 화면 가득 다가오는 소녀의 눈빛과 입술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살짝 벌어진 입을 보면 금세라도 저에게 이야기를 걸어 올 것 같고 제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할 것 같은 모습입니다. 붉은 모자와 푸른색 옷 색깔의 대비가 선명한데 빛은 소녀가 쓴 모자와 옷 그리고 앉아 있는 의자의 끝에 내려앉아 소녀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얼마가 흘러도 소녀의 모습은 지금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도 크기가 작은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합니다. 생각해보면 작품의 크기가 커 화면 가득 얼굴이 자리를 잡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요. 저같이 얼굴이 큰 사람들은 사진 찍는 것도 싫거든요.

페르메이르는 아주 천천히 작업을 한 화가로 되어 있습니다. 1년에 3편 정도의 작품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생활이 되었을까 싶습니다. 제자가 없었으니 가르쳐서 버는 돈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조심스럽게 밝은 색과 빛을 묘사했는데, 때로는 비싼 물감으로 작업을 한 그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습니다. 1672년, 프랑스는 영국과 손을 잡고 네덜란드의 영토를 강탈하기 위해 침입합니다. 모든 극장과 학교 상점이 문을 닫았고 네덜란드는 심각한 경제공황에 빠졌습니다. 페르메이르도 그 난국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44.5x39cm, c.1665/66

커다란 맑은 눈이 다가왔습니다. 배경이 검은색으로 처리되면서 소녀의 얼굴로 모든 시선이 모였습니다.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치아가 보입니다. 무언가 호소하는 것 같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이유는 낯익은 얼굴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낯익음은 낯섦에서 온 것입니다. 눈썹이 잘 보이지 않는군요. 그래서 이 소녀의 또 다른 이름이 ‘북구의 모나리자’인가요?

그러나 소녀의 표정을 보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소녀가 슬퍼 보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마음이 우울한 것은 아니신지요? 호기심 가득한 얼굴처럼 보이시나요? 마음이 조금 들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역시 ‘모나리자’인가요? ‘터번을 두른 소녀’라는 또 다른 제목이 있는 이 그림은 소녀의 진주 귀걸이 때문에 또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지요. 무엇이 되었든 간에 페르메이르가 보여준 소녀의 얼굴 앞에서 쉽게 발걸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천진함과 맑음, 그리고 정반대의 슬픔이 스며 있기 때문입니다.

1675년, 마흔셋의 페르메이르는 적극적으로 하던 그림 거래일도 원활하지 않게 되자 장모를 보증인으로 해서 암스테르담에서 돈을 빌립니다. 그해 12월, 갑작스러운 발작이 시작된 지 하루 반 만에 페르메이르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아내는 재정적인 압박에 의한 스트레스가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했는데, 화가와 화상의 입장에서 전쟁으로 인한 미술시장의 붕괴는 페르메이르에게 치명적이었겠지요.

지리학자 The Geographer, 52x45.5cm, c.1668/69

지도를 펴 놓고 컴퍼스로 이리저리 계산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세상의 참 진리는 지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부시게 빛나는 창밖의 세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대각선으로 화면을 나누고 지리학자를 창밖의 세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현미경을 발견한 레벤후크 같은 과학자들과도 친분이 있었던 페르메이르의 작품에는 과학자들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혹시 빛이 닿으면서 새롭게 나타나는 사물들에 대한 묘사에 천착했던 그의 노력은 과학자들의 그것에 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원래 이 작품은 지리학자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고 손에 들고 있는 캠퍼스 역시 아래 방향으로 그려졌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페르메이르가 작품을 완성할 때 지리학자의 고개를 세우고 캠퍼스의 방향도 얼굴과 평행이 되게 고쳤다는 것이 x-ray 검사로 밝혀졌지요. 상상 속에서 원래 작품과 비교해보면 이렇게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훨씬 생동감 있어 보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이성의 모습이지만, 들고 있는 것은 감성의 모습이니까요.

페르메이르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신도 세상을 떠나면서 식구들에게 빚을 남겨 놓았습니다. 11명의 아이를 길러야 했던 그의 아내는 고등법원에 부채 면제 신청을 했습니다. 그의 화실에 남아 있던 것은 의자 두 개, 이젤 두 개, 캔버스 10개, 책상과 테이블 그리고 작은 목제 찬장이 전부였습니다. 남아 있는 19점의 작품은 아내와 장모에게 유증되었는데 빚 청산을 위해 그중 두 점을 팔았다고 합니다.

러브 레터 The Love Letter, 44x38.5cm, c.1669/70

방금 도착한 편지를 하녀가 건네주었습니다. 류트를 켜다가 편지를 받은 여인의 눈이 커질 대로 커졌습니다. 편지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이 온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녀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지 빙그레 웃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기분, 받는 사람만큼 기쁜 일이죠. 여인의 뒤로 벽에 걸린 그림 두 점이 보입니다. 그림 속의 그림은 작가의 의도를 보여줄 때가 많다고 합니다.

17세기 도상학(圖像學)에서 바다는 사랑을, 배는 연인을 상징한다고 하지요. 사랑이라는 바다를 연인이라는 배가 떠서 간다는 뜻일까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지만 그것보다 더 보기 좋은 일도 없습니다. 바다 그림 위에 있는 그림은 한 남자가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남자는 지금 여행 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열린 커튼 사이로 슬쩍 들여다본 여인의 규방, 안타까움과 기다림이 가득합니다.

페르메이르는 세상을 떠나고 1866년 프랑스의 비평가 토레 뷔르거(Thore-Burger)에 의해 발굴 때까지 잊혀진 화가였습니다. 66점의 작품이 페르메이르의 것으로 소개되었으나 최근에는 35점 정도가 페르메이르의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확정된 숫자는 아니라고 합니다. 숫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의 작품은 지금 모든 사람의 혼을 빼놓고 있는데요.

하녀와 함께 편지를 쓰는 여인 Lady writing a letter with her maid, 72.2x 59.7cm, c.1670/72

바닥에 구겨진 편지가 있는 것을 보니 바로 답장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을 신화로 만들었다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세계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합니다. 맑은 실내와 정물 같은 여인은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일상이지만 느낌은 아주 색다릅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보다가 혹시 우리는 너무 우리의 일상을 대강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마님은 편지 쓰기에 정신이 없는데 하녀는 창밖의 햇빛에 마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녀가 왜소하지 않고 당당해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으로 기가 막힌 자리를 잡아준 것이죠. ‘모세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군요. 나일 강가에서 이집트 공주에게 발견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이라면 적의 마음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여인의 편지를 받을 그 남자의 반응이 궁금해집니다.

이 작품은 두 번이나 도둑맞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74년 영국 의회 의원이 소장하던 이 작품이 아일랜드 급진 무장단체 IRA에 의해 강탈당했습니다. 1주일 뒤 약간의 상처만 입고 무사히 돌아왔죠. 그러니 1986년 다시 더블린의 지하조직이 이 작품을 훔쳐 갑니다. 비밀협상과 국제간 공조수사를 통해 7년 만에 회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페르메이르의 작품에 대한 진가를 나름대로 알 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Vermeer는 그동안 ‘베르메르’로  알려져 왔으며, 필자인 선동기님도 ‘베르메르’로 표기하였는데, 네덜란드어 Vermeer는 ‘페르메이르’가 올바른 발음이고 외래어 표기법에 맞습니다. _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