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Beethoven, 33 Variations on a Waltz by Diabelli Op.120)

라라와복래 2013. 9. 28. 20:25

Beethoven, 33 Variations on a Waltz by Diabelli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Piotr Anderszewski, piano

Auditorio Stelio Molo, Lugano, Swiss

2000.07.29~08.03

 

Piotr Anderszewski - Beethoven, Diabelli Variations Op.120

 

1819년 빈의 음악 출판업자 안톤 디아벨리는 자신이 작곡한 왈츠 주제를 50명의 작곡가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각자 변주곡 한 곡씩을 작곡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이를 모아 하나의 거대한 변주곡을 완성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아마도 사업적인 관점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홍보성 프로젝트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당대 유명한 작곡가들과 촉망받는 음악가들이 이 요청을 받았다. 베토벤을 포함해 훔멜, 모셀레스, 리스트(당시 11살), 체르니, 슈베르트, 루돌프 대공, 칼크브레너, 시몬 제터, 요한 페트 픽시스, 바츨라프 얀 크리텔 토마체크, 얀 바츨라프 보리체크 등이 디아벨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주어진 주제에 의거해 빈과 오스트리아의 가장 저명한 음악가와 비르투오소들이 작곡한 애국적인 예술가 연합 변주곡’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을 갖게 된 이 변주곡은 1824년 6월에 최종적으로 두 권의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베토벤이 작곡한 33개의 변주곡으로 작품집 1권을, 다른 작곡가들이 작곡한 변주곡으로 작품집 2권을 냈다. 그런데 베토벤의 위상과 창조력이 너무 강력했던 탓인지 변주곡 2권의 작품들은 그저 나쁘지 않은 음악적 시도 정도로 분류되었다. 사실 변주곡 2권의 작품들은 그 스타일이나 내용에서 변주곡으로서의 완결성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출판업자의 의도대로 그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베토벤 최절정의 창작력이 발휘된 걸작

베토벤은 처음에 ‘디아벨리의 주제’를 보고 구두 수선공의 땜질이라고 말할 정도로 경멸했지만 1820년 초에는 이 주제의 가능성을 조금씩 발견해 내기 시작했다. 대신 원래 청탁 받은 대로 한 곡의 변주곡만을 작곡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당시 베토벤의 나이는 53세. 이 <디아벨리 변주곡>은 Op.126인 6개의 바가텔을 제외하고는 그의 마지막 피아노 작품이자 창작 활동의 최절정을 찍는 시기의 산물이 되었는데, 그에게는 자신의 생을 대표하는 걸작을 남겨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이런 바람은 바로 이 작품의 장대한 구조와 엄청난 길이에서 엿볼 수 있다.

1819년 베토벤의 초고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그의 피아노 작품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이지적인 이 <디아벨리 변주곡>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베토벤은 1819년에 작곡에 착수한 뒤 몇 년 동안 공백기를 거쳐 1823년 초 결론 부분을 상당히 수정하고 보완한 후 확장시켰으며, 그해 4월경에는 변주곡 1, 2, 15, 23, 24, 25, 26, 28, 29, 31번 등 10개의 변주곡을 먼저 작곡한 23개의 변주곡에 첨가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작곡가 자신도 33개의 변주곡으로 구성될 것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규모와 난해함 때문인지 이 작품이 출판된 이후 사람들은 이 작품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몇 십 년이 지난 뒤 한스 폰 뷜로가 등장하여 이 작품을 멀리했던 당시 음악가들의 게으름을 따끔하게 지적하며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잇는 진정한 변주곡의 걸작으로 칭송한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베토벤의 깊은 정신성이 <디아벨리 변주곡>에 반영되어 있다.

한스 폰 뷜로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변주곡 형식을 넘어서는 베토벤의 초월적인 정신을 발견했다. 그는 이 곡을 그때까지 발전해 온 피아노 음악의 집약체이자 결정체라고 여기고 “베토벤 예술의 소우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음악 예술의 완전한 이미지가 여기서 펼쳐지고 있다. 음악적인 사상과 상상의 진화가 전개되어 온 이후 가장 신랄한 몽상에서부터 가장 압축된 명상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곳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폰 뷜로는 언급하면서 31번 변주곡에 대해 “바흐의 아다지오가 환생했다고 부를 수 있는 곡이고 32번 푸가는 헨델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진행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템포 디 미뉴에트로 진행되는 마지막 변주곡은 “다시 제시되는 우주의 음악의 조감도”라 일컫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 또한 이 작품을 “모든 피아노 작품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찬사했고,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화성의 측면에서 베토벤의 가장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Rudolf Serkin - Diabelli Variations Op.120

Rudolf Serkin, piano

Royal Festival Hall, London

1969.04.25

은유와 풍자, 유머로 가득한 텍스트

베토벤의 그 어떤 곡보다 이 <디아벨리 변주곡>은 은유와 유머와 풍자가 가득하다. 예를 들어 주제에서 10번이나 반복하는 오른손의 C장조 화음으로 구성된 큰 의미 없는 왈츠 리듬은 21번 변주곡에서는 과감하게 과장이 되기도 하고 13번 변주곡에서는 침묵처럼 조용해지기도 한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장식음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요소들도 9번과 10번 변주곡에서는 중요한 장식음으로 사용된다. <디아벨리 변주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 중 가장 지적이고 난해한 곡이다.

몇몇 변주곡들은 모차르트나 바흐와 같은 선배 작곡가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2번 변주곡에서 옥타브 중복으로 제시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가운데 레포렐로의 아리아인 ‘밤도 낮도 피곤하다’(Notte e giomo faticar)를 인용한 것이다. 이는 변주곡 전체의 흐름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인상적인 효과를 성공적으로 부각시키는데, 돈 조반니와 레포렐로의 관계를 베토벤과 주제의 관계에 빗댄 베토벤 식의 유머라고도 볼 수 있다. 23번 변주곡은 22번 변주곡의 해학을 승화시키는 듯 마치 연습곡처럼 화려한 기교를 묘사하고 있고, 24번 변주곡 푸게타는 바흐의 <클라비어위붕>Clavierübung) 3집에서의 오르간 작품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깔려 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세 개의 뚜렷한 부분으로 나뉘며 이는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이룬다. 앞부분의 변주곡들은 주제의 형태를 거의 유지하고 있으며 뒤로 갈수록 점점 자유로운 형태를 갖게 된다. 19, 20, 21번 변주곡에 이르면 각 작품의 절반이 정확하게 대비를 이루는 캐논 풍의 구조로 변하며 이 전체 변주곡의 중간 부분을 이룬다. 또한 구조의 유기적인 연관성은 1823년에 삽입된 1, 15, 25번 변주곡에서 나타나는 주제에 대한 유사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25번 변주곡에서 본래의 왈츠는 유머 넘치는 독일식 춤곡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이미지는 28번 변주곡에서는 속도감이 붙으며 불협화음이 매 상세마다 나타나는 형태를 띠게 된다.

28번 변주곡 이후에는 초기 변주들과는 대단히 다른 형태의 변형이 가해지는데, 오리지널 왈츠 주제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듯하다. 31번 변주곡은 세 개의 느린 단조의 변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가운데 장식이 많은 단조 변주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쇼팽의 섬세한 시정을 예견하는 듯하다. 뒤이은 E플랫장조의 활기 넘치는 푸가는 처음 부분은 헨델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으나 뒷부분은 세 개의 주제가 연합한 푸가로서 불협화음을 수반한 채 웅장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인상적인 마지막 33번 변주곡은 리듬의 변형을 통해 매우 유려한 모차르트 풍의 미뉴에트와 같이 섬세한 질감으로 표현하며 이는 마치 1822년 작곡한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의 ‘아리에타 악장’을 연상케 한다.

 

추천음반

1. 음반으로는 루돌프 제르킨의 현대적이면서도 집중력 높은 1969년 연주(BBC Legend)를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다.

2.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1986년 라이브 리코딩 또한 경이로운 구축력과 집중력이 돋보이는 명연(Philips)이다.

3. 알프레트 브렌델의 역사적인 연주(Philips)와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 연주(DG)로 함께 추천한다.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클래식>명곡 명연주 2012.04.04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6&contents_id=7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