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이상 엔더스 인터뷰
“한국-독일 양쪽 기질 가진 내겐 윤이상 선생은 거울과 같은 존재”
*이 기사는 지난 3월 27일 경향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따라서 내용에 시점 차이가 있습니다.
Isang Enders(cello), Andreas Hering(piano) - Schumann, Mit Myrten und Rosen
첼리스트 이상 엔더스(26)의 이름이 한국의 애호가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무렵이다. 1548년에 창단된 고색창연한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 첼로 수석으로 입단하면서였다. 스무 살의 최연소 수석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유독 그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까닭은 다른 데 있기도 하다.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독일인과 한국인의 특성을 모두 지닌 연주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 5년간 이 젊은 첼리스트가 보여준 행보는 파격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신선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직장’이라고 할 만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4년 만에 제 발로 걸어 나왔다. “더 좋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서”라는 것이 본인의 설명이다.
곧이어 내놓은 데뷔 음반은 또 한 번의 신선함을 안겨줬다. <미르테와 함께 장미꽃을(Mit Myrten und Rosen)>이라는 제목의 음반에는 슈만과 윤이상의 곡이 담겼다. 대중성보다는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에 확실히 무게 중심을 실은 음반이었다.
특히 그는 윤이상의 현대음악을 서슴지 않고 데뷔 음반에 수록한 이유를 “그분과 나는 한국과 독일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음악가”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윤이상은 그에게 일종의 거울인 셈이다. 그의 이름이 ‘이상’인 까닭이기도 하다.
이상 엔더스를 25일 오전 서울시향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동안 몇 차례 한국을 찾은 적은 있지만 서울시향과 협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달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엘리아후 인발의 지휘로 블로흐의 ‘셀로모’를 협연한다. 실제로 만난 그는 유쾌하면서도 겸손한 청년이었다. 답변에도 막힘이 없었다.
(c) 사진작가 강태욱
“독일인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이상’, 기억 편하고 내게 잘 어울려”
― 당신의 아버지는 오르가니스트이자 피아니스트, 한국계인 어머니는 작곡가라고 들었다. 어떻게 만났다고 하던가?
“(웃음) 우리 부모님은 캠퍼스 커플이다. 나는 지금 프랑크푸르트 음대 교수인데, 이 학교는 나의 모교인 동시에 내 부모님의 모교이기도 하다. 어느 날 기숙사에 자리가 나서 대기 중이던 한국 유학생이 한 명 들어왔다. 그분이 훗날의 내 엄마였다. 아버지는 이미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분은 같은 집에서 산다. 지금 프랑크푸르트 음대의 교수 중에는 그 시절에도 교수였던 분들이 있다. 내가 자신들이 가르친 제자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볼 때마다 ‘정말 엄청난 세월이야!’라고 말하곤 한다.”
― ‘이상’이라는 이름은 윤이상 선생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들었다. 누가 지어줬나?
“아버지가 지어줬다. 아주 좋은 이름 아닌가? 발음하기 편하고 쓰기도 좋다. 기억하기도 좋다. 내가 어떤 나라에 가더라도 이 이름은 잘 어울린다. 엄마는 성경에 등장하는 다비드(David)라는 이름을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겼다. 윤이상 선생은 훌륭한 음악가이고 반평생을 독일 시민으로 살았다. 내 아버지는 독일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나에게 이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주장을 거부하진 못했다. 그래서 내 풀 네임은 ‘이상 다비드 엔더스’다.”
―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제 발로 걸어 나왔을 때 부모의 반대는 없었나?
“내 결심은 확고했고 부모님은 나를 믿어줬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내게 안정적인 자리를 보장했다. 월급도 많았다. 하지만 돈은 중요하지 않다. 비를 막을 지붕, 누울 수 있는 침대, 그리고 날마다 먹을 보통의 음식이 있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지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할 시점이었다. 물론 솔리스트의 삶은 오케스트라 단원보다 터프할 수밖에 없다. 매일 연습에 몰두해야 하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주해야 한다. 혼자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 자신에게서 한국인의 기질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이런 게 있다. 한국인들은 진짜 친한 사람한테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가? 낯선 사람한테는 자신의 마음을 잘 보여주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다르다. 누구한테라도 자기 얘기를 다 털어놓는다. 연애 얘기도 감추지 않는다. 난 그런 면에서 한국적인 것 같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유럽인 여자 친구와 연애할 때도 그랬다. 그리고 한국 음식! 정말 맛있다. 특히 갈비찜과 떡. 난 떡이라면 무조건 좋다.”
― 아홉 살 때부터 첼로를 연주했는데, 독일에서 어떻게 교육받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부모님의 재정적 능력과 상관없이 음악을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 공교육 시스템은 개인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12살에 대학에 들어가 다양한 장학제도의 혜택을 받으면서 첼로를 공부했다.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는 것도 학교와 여러 재단, 주정부의 지원으로 이뤄진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음악가이기 때문에 나는 항상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11살 때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들어간 것도 중요한 경험이었다. 음악은 경쟁이 아니라 ‘같이 연주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으니까.”
-많은 스승과 지휘자들을 만났다고 들었다. 그중에는 세계적 명망가들이 수두룩한데 특히 기억나는 스승은?
“첼리스트 린 하렐이다. 나의 가장 중요한 멘토다. 그분은 유럽 곳곳과 미국을 연주 여행하면서 어린 나를 데리고 다녔다. 모든 비용을 다 대주셨다. 레슨비도 일절 안 받고 나를 가르쳤다. 자그마치 6년간이나! 그래서 나도 지금의 내 학생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 음악 이외의 시간에는 뭘 하는가?
“친구들과 SNS도 하고 책도 읽는다. 베를린 예술대학의 한국인 교수인 한병철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시스와 골드문트>는 가장 감명 받은 책 가운데 하나다. 물론 김연아의 피겨 경기를 챙겨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김연아가 내 연주회에 온다면 정말 좋겠다.” [경향신문 문학수 선임기자 2014.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