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lary Hahn -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Hilary Hahn, violin
Vasily Petrenko, conductor
Royal Liverpool Philharmonic Orchestra
Liverpool, Philharmonic Hall
2008.11
진지하면서도 개방적인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콩쿠르나 신작 공모는 으레 정부나 재단에서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2012년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1979~ )이 이런 선입관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독주회에서 앙코르로 연주할 만한 5분 이내의 2중주곡을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직접 공모한 것이지요.
당시 이 공모전에 참가한 작곡가 400여 명의 작품 가운데, 힐러리 한은 하와이에서 활동하는 제프 마이어스의 작품인 '카우아이 섬의 성난 새들(Angry Birds in Kauai)‘을 당선작으로 발표했습니다. 선정 직후 힐러리 한은 작곡가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고,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투브에 공개했지요. “자연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진 않았지만, 아침 일찍 하와이에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에서 착안했다.”라는 작곡가의 인터뷰도 이 영상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힐러리 한은 이전에도 폴란드의 작곡가 펜데레츠키 등에게 앙코르로 연주할 신작 26편을 위촉했습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절반인 열세 곡을 세계 초연했고, 나머지 작품도 차례로 연주한 뒤에 녹음에 나설 계획입니다. 마이어스의 당선작은 스물일곱 번째 앙코르곡이 되지요.
힐러리 한은 네 번째 생일 직전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서 열두 살 때는 볼티모어 심포니와 협연했고, 열여섯 살에는 음반사 소니뮤직과 전속 계약을 맺었던 영재입니다. 하지만 데뷔 음반으로 그녀는 자신의 솜씨를 뽐내기 쉬운 화려한 낭만주의 작품 대신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무반주곡을 골라서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조숙한 연주가였지요. 그녀는 “여덟 살 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흐를 연주했다. 내 연주가 정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주춧돌이다.”라고 밝혔습니다. ▶힐러리 한 선집(Hilary Hahn Collection), Sony Music
힐러리 한은 현대음악에도 폭넓은 관심을 보여서, 작곡가 제니퍼 하그던과 에드거 마이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했습니다. 하그던은 힐러리 한이 커티스 음대에 다닐 적에 현대음악을 가르쳤던 스승이었지요. 허그던은 제자를 위해 작곡한 이 협주곡으로 2010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힐러리 한은 ‘스승을 빛낸 제자’가 되었습니다. 힐러리 한은 최근 독일의 실험음악 피아니스트 하우슈카와 즉흥연주를 바탕으로 2중주 음반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반경을 지속적으로 넓히고 있지요.
힐러리 한은 5대륙 42개국 283개 도시에서 1,300여 회의 음악회를 연 클래식 음악계의 스타입니다. 동시에 비주류적이거나 실험적인 감수성도 적극적으로 껴안는 ‘속 깊은 연주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의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2012년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과 내한 당시에는 단원들과 직접 진행한 동영상 인터뷰를 유투브에 올렸지요.
이전 세기까지 클래식 연주자들은 세속과는 담을 쌓은 채 자신의 음악세계에만 정진하는 폐쇄적인 은둔자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반면 지금은 과도한 미디어 노출이나 대중 친화적 이미지가 성공의 필수 요소라고 암암리에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힐러리 한은 바흐와 현대음악까지, 내용물은 순도 높게 채우면서도 전달 방식은 지극히 현대적이라는 점에서 독특하고 개성적인 연주자입니다. 그녀의 영민한 행보를 보고 있으면, 어쩌면 21세기 클래식 연주자에게 필요한 미덕은 진지함과 개방성의 겸비라는 생각이 들지요.
글 김성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인 사이면 래틀과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