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헨리 퍼셀 세미오페라 ‘요정 여왕’(Henry Purcell, The Fairy Queen)

라라와복래 2014. 11. 30. 07:17

Henry Purcell, The Fairy Queen

헨리 퍼셀 ‘요정 여왕’

Henry Purcell

1659-1695

Titania: Yvonne Kenny

Oberon: Thomas Randle

Puck: Simon Rice

King Theseus: Richard Van Allan

Chorus and Orchestra of the English National Opera

Conductor: Nicholas Kok

English National Opera

1995


English National Opera 1995 - Henry Purcell, The Fairy Queen

영국 바로크 오페라의 대표 작곡가 헨리 퍼셀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런던에서 소년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여덟 살엔 이미 성악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변성기가 지난 뒤엔 왕실 악기 관리자의 조수로 일했고, 성당의 오르간 조율 감독을 거쳐 스무 살에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던 퍼셀은 오페라 연구에 몰두하던 중 1689년 ‘영국 최초의 본격 오페라’로 음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디도와 아이네아스(Dido and Aeneas)>를 작곡했습니다. 짧은 작품이지만 이 안에는 춤과 합창 등 다양한 양식과 함께 삶의 환희에서 죽음의 절망에 이르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어, 오늘날에도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명작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후 퍼셀은 36년의 짧은 생애 동안 <아서 왕>, <요정 여왕> 등 37편의 오페라와 극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 가운데 <디도와 아이네아스>와 함께 퍼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요정 여왕>은 2014년 올해 탄생 450주년을 맞이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1595/96)을 토대로 한 ‘세미오페라(semi-opera)’ 작품입니다. ▶헨리 퍼셀

원래 영국 오페라의 기초가 된 것은 마스크(masque) 형식이라는 장르입니다. 이것은 신화나 우화를 소재로 해 대사, 음악, 춤, 연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 형식으로, 프랑스에서 생겨나 16-17세기에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퍼셀은 전통적인 ‘마스크’에 기초해 1690년경에 '세미오페라'라는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네 개 이상의 에피소드, 노래, 춤, 기악 연주를 포함한 세미오페라에서 말로 나누는 대화는 자연스럽게 음악의 장면으로 연결됩니다. 연극배우들이 맡는 주인공들은 대사만 하고, 신들, 정령들, 요정들, 목동들은 노래하고 춤추는 역할입니다. ‘관객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것’이 이 장르의 목표라고 하며, 한마디로 ‘지루하면 죽는다’가 모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스크 형식을 토대로 한 세미오페라 - ‘지루하면 죽는다’

셰익스피어는 극 속에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켜 극의 스토리 전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곤 했습니다. 36-37편으로 알려져 있는 셰익스피어의 극들 중 상당수는 이런 초자연적 존재를 담고 있습니다. <햄릿>에 나오는 혼령이나 <맥베스>의 마녀, <한여름 밤의 꿈>이나 <템페스트>에 나오는 요정이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영국 민속과 그리스 신화의 요소들을 합성한 <한여름 밤의 꿈>은 요정(fairy)들을 주요 등장인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요정의 왕 오베론(Oberon), 요정 여왕 티타니아(Titania), 오베론의 시종 퍽(Puck)을 비롯해 콩꽃 요정, 거미집 요정, 나방 요정, 겨자씨 요정 등이 등장합니다. 2막은 거의 요정의 세계를 그리고 있고, 3막에서도 시작과 끝을 요정들이 장식하며, 인간들은 오히려 요정이 장난치는 대상이 될 뿐입니다. 4막 역시 요정 장면으로 시작하고, 5막에서 인간들의 에피소드가 마무리된 뒤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도 역시 요정들의 세계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요정들은 인간을 닮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사랑하고 질투하면서 인간의 삶에 자꾸 끼어들며, 언제나 춤과 노래를 즐기는 존재들로 그려지는 것도 특징입니다.

제목에 나오는 ‘한여름 밤’이란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전날 밤을 가리킵니다. 축제와 패싸움으로 광란의 밤을 보내는 ‘성 요한 축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이교 문화가 혼합된 현상의 하나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요정들은 아테네의 티시어스(테세우스) 공작과 아마존 여왕 히폴리타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당시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여왕 히폴리타를 등장시켰다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득한 옛날 그리스 아테네를 배경으로, 숲에 사는 요정들(오베론, 티타니아, 퍽 등), 엇갈려 사랑에 빠진 남녀 두 커플(허미아-라이샌더, 헬레나-디미트리어스), 티시어스 공작과 히폴리타 여왕 및 공작의 결혼 축하 연극을 준비하는 직공들(당나귀로 변하는 보텀과 그 친구들), 이 세 차원의 이야기를 서로 얽히게 만들어 놓고 매듭을 풀어 나갑니다.


에드윈 래시어가 그린 ‘당나귀(보텀)와 사랑에 빠진 요정 여왕 티타니아’의 모습

연극 속에 노래와 춤을 혼합한 종합예술 작품

아테네의 티시어스 공작은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타와 결혼하기로 약속합니다. 공작은 히폴리타에게 빠져 있지만 여왕은 결혼하기까지는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들 앞에 공작의 신하 한 사람이 딸 허미아를 데리고 나타납니다. 디미트리어스라는 훌륭한 신랑감을 추천했는데도 딸이 아버지가 반대하는 남자 라이샌더와 결혼하려 한다면서, 공작에게 문제의 해결을 청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한편 요정의 왕 오베론은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가 인도에서 데려온 어린 시종을 탐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티타니아가 시종을 넘겨주지 않자 심술이 난 오베론은 요정 퍽(Puck)을 시켜 잠든 티타니아의 눈에 마법의 꽃 즙을 뿌립니다.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허미아와 라이샌더는 숲으로 야반도주합니다. 그러자 디미트리어스는 허미아를 쫓아 숲으로 가고, 원래 디미트리어스의 연인이었다가 그의 사랑을 잃은 헬레나는 디미트리어스를 뒤따라갑니다. 그런데 요정 퍽이 실수로 디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릴 마법의 꽃 즙을 잠든 라이샌더의 눈에 뿌리고 라이샌더가 잠에서 깨자마자 헬레나를 보게 되는 바람에, 연인 관계는 갑자기 달라집니다. 함께 허미아를 두고 싸우던 두 남자는 이제 헬레나의 마음을 얻으려고 싸우는 겁니다.

티시어스 공작과 히폴리타의 결혼식에서 공연할 연극을 연습하기 위해 보텀을 비롯한 직공들은 숲에서 만납니다. 그곳에서 보텀은 퍽의 장난에 의해 당나귀로 변하고, 오베론의 장난으로 꽃 즙을 눈에 뿌린 티타니아는 당나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그와 꿈결 같은 밤을 보내게 됩니다.

결국 오베론과 퍽에 의해 혼란스런 상황은 정리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연인들은 원래의 짝과 하나가 되고 모두는 화해하게 됩니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보텀은 친구들을 만나 함께 공작의 결혼식 피로연 축하공연을 갖고, 요정들도 모두 공작의 성으로 와서 자기들끼리 멋진 무도회를 즐깁니다.  ▲존 시몬스, <허미아와 라이샌더>, 1870

원작 그대로 5막으로 이루어진 퍼셀의 <요정 여왕>에는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속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합니다. 허미아, 라이샌더, 디미트리어스, 티시어스 공작, 허미아 아버지, 오베론, 티타니아, 퍽, 아마존 아이, 직공들 등 셰익스피어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노래를 부르지 않는 대사 배역입니다. 이 극의 장면 사이사이에는 노래와 춤이 등장하는데, 여기 참여하는 인물들은 성악가이거나 무용수들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배역들은 시인(베이스), 산책하는 사람들(소프라노, 베이스), 새들의 왕(테너), 요정 1, 2, 밤, 신비, 목가적인 사랑, 사랑의 탄식(소프라노), 침묵(알토), 목동(바리톤), 잠(베이스), 아폴론(테너), 봄(소프라노), 여름(알토), 가을(테너), 겨울(베이스) 등입니다.

퍼셀 특유의 전아(典雅)하고 서정적인 또는 유쾌하고 쾌활한 멜로디가 귀를 즐겁게 해줍니다. 특히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를 비롯해 여러 가수들의 노래로 유명한 명곡 <오, 울게 내버려 두세요(O, let me weep)> 같은 절절한 슬픔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천 가지 방법(A thousand ways we’ll find to entertain the hours)> 같은 활달하고 코믹한 노래도 들어 있습니다.

런던에서 1692년에 <요정 여왕>을 초연한 뒤 3년 만에 퍼셀은 세상을 떠났고 그때 악보가 소실되었습니다. 1703년에 20기니를 상금으로 걸고 악보를 찾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19세기 말에 거의 완전한 악보가 왕실 음악아카데미에서 발견되었고, 1903년에 퍼셀 협회가 창립되면서 그때부터 이 작품은 다시 고음악 페스티벌에서 공연되기 시작했습니다.

지휘자 윌리엄 크리스티는 루시 크로우, 캐롤린 샘슨 등의 뛰어난 가수들 및 계몽시대 오케스트라, 글라인드본 합창단을 이끌고 이 작품을 2009년 글라인드본 무대에 올렸습니다. 당시 연주 수준도 탁월했지만, 조너선 켄트가 연출을 맡았는데 색채와 형태가 눈부시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장면 전환이 변화무쌍하고, 유머 감각까지 가득한 프로덕션이었습니다.

“O, let me weep” (오, 울게 내버려 두세요)

Philippe Jaroussky, countertenor

Ensemble Artaserse

Théâtre des Champs Elysées, Paris

2010.12.11

추천음반

1. 로저 노링턴 지휘, 런던 클래시컬 플레이어즈, 런던 쉬츠 합창단, 2002년 Vergin Classics(EMI), CD

2. 윌리엄 크리스티 지휘, 레자르 플로리상, 2014년 하르모니아 문디, CD

3. 윌리엄 크리스티 지휘, 조너선 켄트 연출, 계몽시대 오케스트라, 글라인드본 합창단, 2009년 Opus Arte, DVD

이용숙 (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문화예술>음악>극음악/오페라 201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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