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레오폴트 모차르트 ‘장난감 교향곡’(Leopold Mozart, Toy Symphony)

라라와복래 2015. 7. 21. 00:09

Leopold Mozart, Toy Symphony

레오폴트 모차르트 ‘장난감 교향곡’

Leopold Mozart

1719-1787

Ensemble Metamorphosis

Kolarac Hall, Beograd

2014.12.24

 

Ensemble Metamorphosis - Leopold Mozart, Toy Symphony

 

레오폴트 모차르트. 우리는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아버지로 그를 기억합니다. 그의 부인 아나 마리아는 일곱 자녀를 낳았는데 두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여섯째인 딸 마리아 아나(애칭 나네를, 1751-1829)와 막내 볼프강, 아버지는 이 아이들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아이는 다행히 잘 자라주었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특히 막내 볼프강은 3살 때 누나 흉내를 내며 피아노 3도 음정을 짚었고, 5살 때는 배우지도 않은 바이올린을 척척 연주했습니다. 1/8 음정 틀린 것을 지적할 정도로 음감이 뛰어났던 5살 꼬마는 이미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아이가 진정 제 자식이란 말입니까?” 볼프강의 놀라운 재능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레오폴트는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천재를 잘 키우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의무가 아니라 ‘신의 소명’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볼프강이 태어났을 때 레오폴트는 37살, 인생의 정점에서 빛나는 음악가였습니다. 그해 레오폴트가 출판한 <바이올린 교본>은 “18세기 후반에 독일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모두 그 책으로 공부했다”고 할 정도로 명저였습니다. 오늘날도 18세기 바이올린 연주법에 관심 있는 음악가들은 이 책을 참고한다고 합니다. 그는 잘츠부르크 궁전의 부악장으로, 이미 독일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다수 궁정 아첨꾼들보다 지적으로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고, 당시의 정치적 사건에 활발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서신들이 입증하듯이 세상의 모든 궁정에서 돌아가는 일을 놀랄 만치 정확하게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 박미애 옮김, 문학동네, pp.102~103)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교본>을 쓸 정도로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이러한 그가 음악가로서 자신의 삶을 한순간에 포기하고 자식의 교육에 인생 전부를 던진 것입니다. 1762년 이후 그는 바이올린 강습과 작곡을 모두 그만두고 두 자녀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납니다. 이러한 선택이 자식들을 위한 희생이었는지, 아니면 자식 덕에 돈과 명예를 거머쥐겠다는 탐욕이었는지 숱한 논란을 낳았습니다.

건반을 가린 채 피아노를 치고, 처음 듣는 주제로 즉흥연주를 척척 해내는 두 어린의의 놀라운 재능에 당시 유럽 귀족들은 경악했습니다. ‘잘츠부르크가 낳은 기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돈을 좀 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누구라도 이왕이면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신동’의 소문에 비해, 은근히 기대했던 금전적 이득은 별로 없었습니다. 나네를이 “아버지는 우리를 서커스단 아이들처럼 데리고 다녔다”고 불평한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평범한 어린이가 누려야 할 자유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여행은 아이들에겐 매우 고된 일정이었습니다. 런던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네덜란드에서 두 아이는 천연두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3년간의 여행은 볼프강에게 엄청난 교육이었습니다. 당시 빈, 파리, 런던의 궁정에는 유럽의 최고 음악가들이 다 모여 있었는데, 어린 볼프강은 이들과 한자리에서 연주하고 대화하며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웠습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던 궁정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최상의 음악교육을 받은 거지요. 레오폴트가 이 점을 간과했을 리 없습니다. 아들 덕분에 자기 명성도 덩달아 올라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욱 본질적인 것은 볼프강의 교육이었고, 이 지점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의 순수한 의도를 의심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연주여행을 하던 때의 모차르트 가족. 아버지 레오폴트, 볼프강, 나네를. 1763년경

“아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불화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종종 스스로 선택한, 그에게 이미 충만한 의무, 가혹한 훈련과 노동을 통해 아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와 아들에 대한 동정심 사이에서 흔들렸다.” (노베르트 엘리아스, 같은 책, p.104)

레오폴트는 자신이 아들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느 아버지와 아들처럼 두 사람도 숙명적인 갈등과 위기를 맞게 됩니다. 볼프강이 콜로레도 대주교의 봉건적 속박과 결별하던 1781년, 아버지는 구질서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봉건 질서에 대한 볼프강의 반항은 곧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콜로레도 대주교가 있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고 아들을 설득하고 위협했지만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단의 순간에 볼프강은 주저 없이 자유를 택했고, 자유 음악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레오폴트도 여느 아버지처럼 아들이 순탄한 삶을 살기 바랐을 뿐, 볼프강의 재능이 잘츠부르크라는 변두리에서 질식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볼프강은 결국 빈에서 자유 음악가로 성공했고, 1784년 말경에 아버지와 화해를 이룹니다. 이 시절 두 사람의 갈등과 배경, 그 과정은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글 ‘모차르트의 반란’ (같은 책, pp.157~184)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린 볼프강에게 아버지 레오폴트는 가장 가까운 스승이었습니다. 볼프강의 음악은 나이를 먹을수록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6살 때 온 가족이 함께 떠난 3년간의 유럽 여행, 그리고 아버지와 단 둘이 떠난 세 차례 이탈리아 여행 기간 내내 그의 음악은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어른이 되어 자유 음악가로 독립한 25살 이후에도 그의 음악은 계속 무르익어 갑니다. 천재는 새로운 것을 끝없이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지요. 레오폴트는 타고난 천재 볼프강이 무한히 배우도록 드넓은 세계로 이끌었고, 어른이 된 뒤에도 스스로 공부하며 성숙해 가는 진정한 천재가 될 수 있도록 바탕을 깔아준 것입니다.

볼프강은 음악가를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천재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훌륭한 재능도 혼자서 저절로 익어 가는 법은 없다는 걸, 빛이 있으면 그 빛을 밝혀 줄 어둠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결국 네가 있으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걸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일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모차르트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의 음악적 식견으로 어린 아들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 길에서 끝없이 등불을 밝혀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함께 떠올려야 합니다.

이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닌 ‘작곡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생각할 차례군요. 그는 아우구스부르크 제본사의 아들로, 어릴 적에 합창단에서 노래했고 음악극에 출연했습니다. 18살 때 잘츠부르크에 와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지만 출석 불량으로 퇴학당한 뒤 21살 때인 1740년, 직업 음악가로 데뷔합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도 기나긴 우회로를 거쳐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으로 돌아왔나 봅니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젊은 시절, 얼마나 많은 방황과 고뇌가 있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는 1743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악단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취업했고, 1747년 아나 마리아와 결혼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어머니 아나 마리아

오랜 세월 하이든의 작품으로 오해된 <장난감 교향곡>이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곡뿐 아니라 <농부의 결혼식>, <썰매타기>, <사냥 교향곡> 등 소박하고 즐거운 곡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그의 음악에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서민에 대한 상냥한 마음이 배어 있고 뻐꾸기 소리, 딱총 소리, 백파이프 소리 등 익살스런 악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소나타와 미사곡, 오라토리오도 쓸 수 있는 유능한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이 아들 볼프강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고, 반대로 레오폴트 작품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볼프강 것인 경우도 있습니다.

1787년 레오폴트가 세상을 떠날 무렵, 볼프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극적인 현악 5중주곡 g단조 K.516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 이상하게도 <음악의 농담>(K.522) 같은 즐거운 곡도 썼습니다. 친구 야크빈에게 쓴 편지를 보면 당시 볼프강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슬픔에 잠겨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설픈 시골 악사들이 연주하다가 달려가고 쫓아가며 결국 엉망으로 끝나버리는 유머러스한 곡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하필 이런 곡을 쓴 이유가 뭘까,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 슬퍼서 미친 듯 한번 웃어보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 레오폴트의 유쾌한 음악과 비슷한 분위기의 곡으로 아버지에게 경의(hommage)를 표하려 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싶어지는군요.

이채훈 MBC 시사교양 PD로 모차르트, 빈 필하모닉, 정경화 · 정명훈 · 장영주 · 장한나 등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다수 연출했다. MBC에서 해직된 뒤 요즘은 ‘진실의 힘 음악여행’, ‘와락 음악교실’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이채훈의 마술피리 - 마음에서 마음으로>(E-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