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9월. 핀란드에서는 철새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계절이었다. 헬싱키 근교 예르벤퍼의 자택 ‘아이놀라’에 앉아 있던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의 눈에 백학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새는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무리를 찾아 되돌아갔다. 노 작곡 대가는 “내 어린 시절의 새가 돌아왔다”고 기뻐했다.
며칠 뒤 시벨리우스는 아침에 일어나 어지럽다고 말했다. 침대에서 신문을 꼼꼼히 읽고, 아침 식탁에 앉았지만 기운을 잃고 쓰러졌다. 소식을 들은 딸들이 달려오자 ‘왔느냐’고 인사를 건넸다. 저녁 아홉 시, 시벨리우스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가족들은 출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작품은 없으며(사실은 몇 편의 미발표 소품이 있었다) 따라서 교향곡 8번 원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명에서 밝혔다. 신문 방송들이 속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8번은 없다.”
서양 음악사에서 존재를 모르던 작품(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미완성’ 등)이 발견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일은 있지만, 특정 작품이 ‘없다’는 이유로 뉴스가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 세계 음악계와 음악팬들의 기대를 모았던 작품은 이후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한동안 사라졌다.
“내 안의 집시… 더 깊이 있고 낭만적인 교향곡”
일찍이 시벨리우스는 “교향곡은 작품을 단지 구성(compose)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생의 각 단계에 대한 신앙고백과 같다”고 말했다. 그 말만큼이나 그의 교향곡 전 7곡은 시벨리우스 창작 목록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1, 2번 교향곡은 독일과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의 직접 영향권에 있으며 폭풍과 같은 열정으로 충만해 있고 전 세계에서 그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3번에서 6번에 이르는 교향곡은 한층 간결하고 응축된 형식을 보이지만 독창적인 음악어법이 각각의 완결된 세계를 드러낸다. 악장 구분 없이 쓰인 7번 교향곡(1924)에 이르러 그의 수법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선하고 웅대한 곡상과 독창적이고도 호소력 있는 전개, 유기적인 관현악법이 교향곡 8번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다.
한때 시벨리우스와 교향곡의 의미 및 그 미래에 관해 열띤 토론을 펼쳤던 구스타프 말러도 이미 1911년 세상을 떠났다. 오로지 시벨리우스만이 18세기 이후 이어져 온 교향곡의 웅대한 역사를 살아서 잇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62세 생일을 지나고 두 달 남짓 지난 1928년 2월, 시벨리우스는 베를린 여행 중 부인 아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교향곡 8번이 될 ‘새 작품’에 대해 언급했다. “이 작품은 멋진 것이 될 거요. 오래 걸리겠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이해 여름에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 “새 작품을 쓰고 있어. 미국에 보낼 거야. 오래 걸리겠지만 좋은 작품이 될 거야.”라고 썼다.
그가 시사한 대로 작업은 느렸다. 3년 뒤인 1931년 8월에는 지휘자 세르게 쿠셰비츠키(Serge Koussevitzky)에게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미국에 보낼 것’이라는 말은 쿠셰비츠키가 상임지휘자로 있는 보스턴 교향악단을 통해 초연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해 초 보스턴에 보낸 편지에는 “이번 시즌에는 불가능”이라고 썼다.◀노년의 시벨리우스와 부인 아이노
이후 작업의 진척은 주로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1932년을 이런저런 이유로 넘기고 1933년 1월이 되자 시벨리우스는 “미안하지만 이번 시즌(5월까지)에는 불가”라고 알렸다. 거의 완성된 작품을 놓고 계획을 크게 변경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월이 되면 “모든 것을 다시 쓰고 있다. ‘내 안의 집시’… 더 깊이 있고 낭만적인 것으로”라고 적었다.
9월에는 원고 일부를 악보 정리원에게 보냈다. 작곡가는 “전체 원고는 (보낸 원고의) 여덟 배 정도 길이가 될 거요”라고 알렸다. 그러나 이후 이 작품의 진척은 무한정 지연된다. 아마도 이 시점, 즉 1933년 말에서 1934년 사이에, 거의 완성된 새 교향곡의 운명에 알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전쟁의 비인간성이 나의 작업을 방해한다”
노 작곡가의 신작 교향곡 외에도 사람들이 신경 써야 할 일은 많았다. 1933년 독일 나치 정권 성립 이후 유럽 대륙의 긴장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2개월 만에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해 왔다. 1943년 초 이제 78세가 된 시벨리우스는 비서에게 말했다. “거대한 작품을 죽기 전에 마치고 싶다. 그런데 전쟁의 비인간성이 나의 작업을 방해한다. 전쟁을 생각할 때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다.”
6월에 노작곡가는 사위 유시 얄라스(Jussi Jalas)에게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쓴 각각의 교향곡마다 나는 특별한 기법을 발전시켰다. 그것(특별한 기법)은 피상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며, 내가 ‘온전히 살아온’ 그런 무엇이어야 한다. 새 작품에서도 이 문제로 힘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결말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시벨리우스가 80세 생일을 맞이할 해가 밝았다. 8월에 노대가는 얄라스에게 “나는 8번 교향곡을 ‘여러 차례 완성’했고 한 번은 태워버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가 완성된 교향곡을 태워버렸다면 그것은 가족들이 회상하는 이른바 ‘소각 파티’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작곡가의 손자는 1940년대(1945년으로 추정) 어느 날 할아버지 집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가 벽난로에 악보 원고를 집어넣어 태우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쇼크를 받은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아이노는 “그 뒤로 남편은 한층 조용하고 밝아졌다”고 회상했다. ‘소각 파티’를 통해 노 거장은 우리가 상세히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짐을 덜어냈던 것이다. 이 일은 당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전후의 새로운 세계에서 80대 작곡가의 신작 교향곡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질문이 나오면 노 거장은 응답했다. 1951년에는 “나는 교향곡을 쓰고 ‘있었’는데 머리에 든 그 곡을 오선지에 옮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89세가 된 1954년에는 “그것은 거대한 작품‘이었다’”라고 말했다. 모든 표현이 과거형이었다. 이제 그의 생애의 이정표는 되돌아오기 힘든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벨리우스와 아내 아이노가 1904년부터 죽을 때까지 살았던 헬싱키 외곽의 집 ‘아이놀라’
술 끊고 빚 갚더니 게을러졌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8번의 존재만큼이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생애 마지막 30년에 걸친 노대가의 침묵, 시벨리우스의 은거였다. 7번 교향곡을 내놓고 2년 뒤이자 61세가 된 1926년 이후 그는 신작 발표를 거의 중단했으며, 이따금 소품을 내놓은 것을 제외하면 30년이 넘도록 창작상의 긴 침묵에 들어간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심술궂게 들리는 분석이 있다. 그의 노후가 길기도 했지만, 삶의 대부분을 폭음과 낭비벽에 시달렸던 대가가 이해 술을 끊고 부채를 청산하면서 창작의 동력을 잃었으리라는 것이다.
1892년 결혼 직후부터 새신랑의 음주는 이 가정에 위기의 그림자를 던졌다. 시벨리우스는 저녁시간을 절친했던 지휘자 로베르트 카야누스, 화가 악셀 갈렌과 함께 술을 마시며 보냈다. 갈렌이 전시회에 친구들이 만취한 그림을 출품한 뒤 이들의 음주벽은 사회적 관심사가 됐다. 1907년 남편이 하루 저녁 식사에 오늘날 가치로 500유로 이상의 돈을 쓴 사실을 알게 된 부인 아이노는 충격을 받아 요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에는 시벨리우스가 과음으로 실신해 병원에 실려가 2주를 보냈다.
1923년, 시벨리우스는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기로 되어있었다. 리허설을 마친 그는 혼자 시내로 나가 레스토랑에서 굴과 샴페인을 시켰다. 공연시간이 가까워오는데 마에스트로가 나타나지 않자 공연 관계자들이 그를 찾아 나섰다. 지휘자는 레스토랑에 만취해 앉아 있었다. 겨우 시간에 맞춰 지휘대에 선 그는 몇 소절이 진행된 뒤 보면대를 지휘봉으로 딱딱 때렸다. 리허설 중인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객석에 있던 부인 아이노는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고 뒤에 회상했다.
다행히 시벨리우스는 정신을 수습했고 순조롭게 연주가 진행됐다. 마지막 곡인 2번 교향곡의 피날레가 끝나자 노도와 같은 갈채와 환호성이 몰려왔다. 어쨌거나 이후 아이노는 남편이 지휘하는 콘서트에 나타나지 않았다.
2년 뒤인 1925년, 핀란드의 국가적 영웅은 만 60세를 맞이했다. 만 8살이 된 핀란드 공화국 전체가 그의 60세를 축하했다. 전국에서 축하금 27만 5000마르크가 답지했다. 현재 가치로 6만 5000유로를 넘는다. 그의 연금은 연간 10만 마르크로 인상됐다. 오늘날 가치로 2만 4000유로 이상이다. 당시 음악저작권 최대 시장인 독일의 저작권협회에서도 적잖은 저작권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욱 바람직했던 것은, 예전의 ‘호화로운 저녁식사들’로 쌓인 빚도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크게 줄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61세가 된 1926년 말, 드디어 시벨리우스는 모든 부채를 청산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편과 파리 여행을 다녀온 아이노는 변화를 감지했다. 시벨리우스는 집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았다. 일기장에는 ‘S.A’라는 약자가 거의 매일 등장했다. ‘Sine Alcohol’, 즉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라는 뜻이었다. 가끔 ‘위스키’란 말이 나왔지만, 그는 폭음의 악습을 완전히 버리는 데 성공했다.
시벨리우스(맨 오른쪽)와 그의 친구 화가 악셀 갈렌이 음주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만년의 그는 사소한 비판도 힘들어했다
과연 술을 끊고 빚을 갚은 결과로 시벨리우스가 창작의 동력을 상실했을까? 물론 이 두 가지 요인은 노대가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무엇보다 외부의 요구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시간표에 의해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기와 서한을 비롯한 풍부한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다. 시벨리우스는 한층 창작에 신중해질 수 있었고 그 대부분의 역량을 마지막 교향곡에 쏟아 넣었다. 1933년 말에는 완성 단계에 이르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작품을 ‘밀쳐두거나’, ‘1차로 파기한 뒤 다시 쓰기 시작했고’, 1945년경에 남아 있던 악보를 벽난로에 넣어 불살라버렸다는 것이 오늘날 가장 신빙성 있는 추론이다.
그의 긴 창작상의 침묵이 마지막 교향곡에 모든 힘을 쏟아 넣었기 때문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성된 이 작품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드니 대학 역사학 교수이자 문화평론가인 마크 맥케나는 “시벨리우스는 만년에 자기 자신의 기념비이자 핀란드 공화국의 상징물, 박물관 관리자로 역할을 마쳤다”고 말했다. 혹여 자신이 세워둔 영광에 흠집이 갈 수 있는 행위는 (신작 발표를 포함해) 할 수 없었고,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시벨리우스의 딸인 카타리나의 회상과도 상응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나이와 더불어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하며, 지금까지의 작품보다 나은 곡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교향곡은 그에게 ‘짐’이 되었다. 언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아버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노대가의 다른 지인들도 그가 나이 들수록 민감해져갔으며 사소한 비판에도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193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시벨리우스의 인기는 높아 갔지만, 반면 ‘시대의 발전을 놓친 퇴행적 작곡가’라는 악평도 커졌다. 작곡계는 쇤베르크가 창시한 12음 기법이나 스트라빈스키의 야수주의, 즉물적 신고전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도 시대와 순조롭게 지내기 힘들었을 시대에 그는 오히려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
지휘자 카야누스가 때로 작곡상의 조언을 해주었다는 사소한 증언에도 수치심으로 치를 떨었고, 1890년대 초에 쓴 작품을 연주하겠다는 제안을 받으면 그 ‘미성숙’한 면이 드러날까 두려워했다. 결국 거의 완성되었던 8번 교향곡을 포기한 것은, ‘시대와 맞지 않는’ 작품이 자신의 명성에 흠집을 낼까 두려워한 공포심의 발로였다는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시벨리우스 공원
반세기만에 들려온 대가의 소리
오래 잊혀져있던 시벨리우스 교향곡 8번에 다시 조명이 가해진 것은 1995년의 일이다. 음악학자 카리 킬페레이넨(Kari Kilpeläinen)이 교향곡 8번의 스케치로 보이는 악보를 헬싱키 대학 도서관에서 찾아냈다고 발표한 것이다. 한 페이지짜리 악보에는 ‘VIII’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킬페레이넨은 이 도서관에 소장된 시벨리우스의 다른 악보 몇몇도 이 멜로디와 관련되며, 이 스케치들 또한 8번 교향곡 스케치의 일부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다른 시벨리우스 연구가인 티모 비르타넨(Timo Virtanen)은 시벨리우스가 (교향곡 번호가 아니라) 주제나 패시지들에 숫자 기호를 종종 붙였으므로 ‘VIII’를 8번 교향곡의 스케치로 확신할 수 없다고 조심스런 견해를 보였다.
이런 조심스런 입장 속에서도 비르타넨은 시벨리우스 교향곡 8번 편린의 악보를 세 부분으로 정리해 발간했고, 존 스토르고르(John Storgårds)가 지휘하는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011년 리허설에서 이 악보를 연주했다. 이 연주는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 부분은 각각 작품의 개시부로 보이는 1분 남짓의 부분과 8초 정도의 스케르초, 이어 다시 1분가량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세 부분은 모두 듣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시벨리우스적 선율 전개와 분위기를 나타내지만 한층 과감한 불협화음도 드러내고 있다.
과연 이 세 부분은 시벨리우스가 쓰다가 파기한 교향곡 8번] 일부일까? 킬페레이넨의 영향을 받은 일부 음악학자들은 “언젠가 스케치들을 더 확보해 교향곡 8번 전곡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벨리우스가 1943년 사위 얄라스에게 한 이야기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잘 들어두게, 내가 죽은 다음에 스케치들은 모두 불태워줘. 누구든지 ‘시벨리우스의 마지막 생각들’ 같은 것을 써서 발표하기를 나는 원하지 않네.”
그러므로 시벨리우스에게 물어본다면, ‘교향곡 8번은 내가 파기한 것으로 끝’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교향곡은 인생의 각 단계를 대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의 마지막 30년은 무엇으로 대변할 것인가?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이곳 아이놀라(자택)에서는 침묵이 말을 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번 교향곡 이후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표현을 줄곧 간소화하고 줄여 나가는, 응축의 작업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묻는다면, “나의 마지막 30년을 대변한 교향곡은, 끝없는 응축의 결과 결국 무(無)로 돌아간 교향곡이다”라고 답하지 않을까.
시벨리우스 기념 조형물
글 유윤종 (음악 칼럼니스트) 연세대 독어독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동아일보 음악 전문기자와 독일 특파원, 문화부장을 역임했으며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사무국장 및 서울시향 월간 SPO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고 동아일보에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 칼럼을 연재중이다. 신사동 음악공간 ‘무지크바움’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