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는 19살 연하의 알마 신들러와 결혼할 때 아름다운 ‘아다지에토’를 선물했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와 하프만으로 꿈꾸듯 노래하는 이 곡은 두 사람의 사랑의 기념비로 남아 있다.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교향곡 5번의 네 번째 악장인데, 처연하고도 비극적인 선율미가 무척 아름다워서 별도로 연주되는 일이 많다. 1963년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 추도식 음악으로 사용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말러를 모델로 삼은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 삽입돼서 더 유명해졌다._라라와복래
“그대를 위해 살다! 그대를 위해 죽다”
그의 첫 남편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유작인 교향곡 10번의 악보에 이같이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다. 두 번째 남편은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세 번째 남편인 작가 프란츠 베르펠은 “우리 시대 보기 드문 마법사 같은 사람”이라고 그를 예찬했다.
짧은 시간 그와 불꽃같은 사랑을 꽃피웠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는 이 여성과 자신을 한 화폭에 담은 <바람의 신부>를 그렸다. 빈의 찬란한 세기말을 장식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도 그의 매력에 포박되었던, 한때의 연인이었다.
한 시대를 자신의 매력 앞에 무릎 꿇린 주인공, 숱한 천재들과 사랑을 나누고 그들과 정신적 교류를 가졌던 여성. 그는 알마 마리아 말러(Alma Maria Mahler, 1879-1964)이다.
그러나 그가 동시대 남자들에게서 받은 예찬은 알마의 한쪽 측면일 뿐이다. 오늘날 알마의 이름에는 ‘거짓말쟁이’라는 악명이 덧씌워진다. 당대를 대표한 대작곡가이자 지휘 거장인 구스타프 말러(1860-1911)와 함께 살고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으면서도 심하게 왜곡된 증언으로 말러의 인물상에 심각한 손상을 가했다는 것이다.
“진실에 대한 가장 심각한 왜곡을 말러의 부인인 그가 저질렀다.” ―앙리루이 드 라 그랑주(음악학자)
“그의 손을 거친 모든 것은 모조리 변질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휴 우드(작곡가) ◀알마 말러(1900)
첫 만남의 시점부터 왜곡했다
알마 마리아 신들러는 화가 에밀 야코프 신들러의 딸로 태어났다. 그가 죽자 어머니는 남편의 제자였던 카를 몰과 재혼했다. 몰은 빈 분리파 창립 멤버로 당대 빈 문화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알마가 장성하자 모친은 빈 문화계와 사교계에 딸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폭넓은 교유를 갖도록 했다.
알마 자신의 회상에 의하면 야심만만한 빈 국립오페라극장 지휘자이자 41세의 노총각이었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와 그가 처음 만난 것은 22살 때인 1901년 11월, 빈 사교계의 여왕 베르타 추커칸들의 집에서였다. 알마와 말러는 식사가 끝난 뒤 가까운 자리에 앉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알마는 자기의 음악 교사였던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1871-1942)가 국립오페라에 보낸 발레곡을 말러가 답변 없이 방치한 것을 따졌으며, 말러는 이 작품이 가치 없다고 폄하하다가 결국은 쳄린스키를 불러 얘기를 듣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 직후 두 사람은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3주 후에는 약혼에 이르게 되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알마의 회상과 집주인인 추커칸들의 기억이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알마와 말러의 첫 만남이 아니었다. 이 만남에 2년 앞서 알마는 할슈타트 호수 부근에서 자전거를 타다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는 말러와 마주쳤다. 그 일주일 전, 알마는 당대의 유명인인 말러에게 대담하게도 사인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말러는 엽서에 사인을 해서 알마에게 보냈는데 그 주소가 바로 알마가 머무르고 있던 할슈타트 호수 부근 슈탐바흐였다. 자전거를 타다 마주친 말러는 자신이 사인을 요구한 처녀였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고 알마는 회상했다. 자전거로 달리는 중 네댓 번 마주칠 때마다 말러는 말을 걸어 왔다. 1997년에야 책으로 발간된 알마의 일기에 나오는 일화다. ▶알마 말러(1900)
회상록에는 나오지 않는 얘기지만, 사실은 이로부터 2년 후 추커칸들 집에서의 만남도 사실 당시 말러를 몰래 연모하고 있었던 알마가 베르타 추커칸들에게 간청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첫 만남의 기록에서부터 알마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말러에 대한 기술로 남기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러의 삶에 대해 알마가 가한 조작은 베토벤의 비서 신들러의 조작과도 비교할 만하지만 그 영향에는 분명한 차이도 있다. 베토벤으로부터 한 세기 뒤 활동한 말러는 빈 국립오페라 감독으로서 왕성한 대외 활동을 이어 나갔으며 방대한 양의 보도와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알마가 왜곡할 수 있는 부분은 대부분 공적인 측면을 제외한 말러의 사적인 측면에 국한됐다. 특히 말러의 정신세계에 대한 자신의 영향, 두 사람의 애정, 가정 분위기, 지인들과의 관계 등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신들러가 베토벤의 대화록을 조작하고 자기 구미에 맞는 평전을 썼던 것처럼, 알마도 사료를 조작하고 자기 구미에 맞는 회상록을 썼다. 말러는 알마에게 편지 350통 이상을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알마는 이 가운데 200통 가까이를 숨기고 159통만 출판했다. 그의 유품으로 남은 편지들을 검토한 결과 최소 122통에서는 알마가 조작한 혐의가 발견되었다. 알마만이 사용한 잉크로 보란 듯이 덮어씌우거나 서로 다른 편지들을 이어 붙인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자신이 말러에게 보낸 편지는 결혼 전 쓴 단 한 통만 남기고 나머지는 폐기했다.
알마가 왜곡할 수 있었던 부분이 비록 사적, 가정적인 영역에 국한되지만 그 영향이 결코 작지는 않다. 말러는 누구보다도 강한 자아와 심리상태를 가졌고 인생의 각 단계에 있어서 직면한 상황들을 작품에 투사한 작곡가였으며, 대다수의 음악팬과 음악학자들은 말러라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크게 의거해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억압받은, 우울한 자기희생의 삶으로 포장
알마와 말러는 1902년 3월 9일 결혼식을 올렸다. 알마의 회상에 따르면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함보다는 절제와 억압, 무거운 자기희생이 동반된 삶이었다.
먼저 결혼 당시 말러는 5만 크로네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다고 알마는 회상했다. 말러의 여동생 유스티네의 낭비벽 때문에 감당할 수 없게 빚이 많았지만, 자신이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다 갚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빈 음악계의 최고봉인 국립오페라 음악감독 자리라고 해도 말러의 수입은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5만 크로네라는 거액을 갚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알마가 부채 액수와 자신의 역할을 과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알마의 묘사에 따르면 이 가정의 삶은 시계처럼 정확하게 돌아갔다. 매년 휴가 기간을 제외한 열 달을 알마가 매일 저녁 국립오페라에 남편을 직접 도보로 ‘모시러’ 가야 했다. 폭우가 쏟아져도, 임신을 했을 때도 예외는 없었다. 알마는 “말러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 나는, 역시 그의 삶을 함께 살아야 했다”고 우울하게 회상했다. 여기 더해 알마는 음악팬들을 자기편으로 돌리기 위해 강력한 무기를 사용했다. 일찍이 높은 수준의 음악 교육을 받은 자신도 작곡을 하고 싶었지만, 말러가 이를 말리고 억압했다는 것이다. ▶구스타프 알마 말러
사실을 들여다보면 알마는 말러와의 결혼생활 속에서 작곡을 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알마와 사귀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위기에 처했던 시기, 말러는 알마가 쓴 가곡 등 작품들을 검토한 뒤 아내의 재능에 찬탄을 보내고 자신의 이기심을 사과하며 이 가곡들의 출판을 주선했다.
이는 가정 내부의 ‘압력’을 해소해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는 말러의 전략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 빈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곡을 하고 이를 출판했던 여성은 알마 외에 없었다. 무엇보다 말러가 죽은 뒤 알마는 다시는 작곡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말러의 ‘억압’에 대한 상징적 징표로 ‘작곡 금지’를 들었던 데 비하면 의외의 일이다.
말러가 ‘금욕적이고 병적이며 신경증적이고 일에만 열중했다’는 시각도 알마의 기록 속에만 나타나는 말러상이다.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수영과 등산, 하루 온종일에 이르는 긴 산책, 자전거 여행을 즐긴 활동가였으며 농담을 즐기고 쾌활한 인물이었다. 알마는 첫 남편이 성적으로 무능력하기 그지없었다고 회상했지만, 이 역시 자신의 외도에 정당성을 더하기 위한 책략의 일환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6번 교향곡 ‘운명의 세 타격’은 공상담
오늘날 알마의 증언이 가장 비난을 받는 부분 중 하나는 말러가 결혼 후 첫 거작으로 내놓은 교향곡 6번의 총체상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1903~1904년 작곡된 이 작품은 오늘날 ‘비극적’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악장은 쿵쿵거리는 행진곡 주제에 이어 현으로 솟아오르는 듯한 두 번째 주제가 강한 인상을 준다. 알마는 “말러가 1904년 초에 이 주제 속에 나(알마)를 ‘잡아넣으려’ 했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이 두 번째 주제는 ‘알마의 주제’라고 불린다.
이 얘기가 맞을 수 있지만 알마의 회상 외에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앞서 5번 교향곡의 유명한 4악장 ‘아다지에토’ 중간부에도 비슷한 모티브가 등장한다. 알마와 말러의 연애시절에 작곡된 곡이기 때문에 이 모티브 역시 알마를 상징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4번 교향곡 3악장 끝부분에도 유사한 부분이 나온다.
이 곡의 스케르초 악장에 대해서 알마는 “두 딸이 모래 위에서 뛰놀다가 목소리가 점점 슬퍼지고 결국 훌쩍이는 소리로 사라져가는 것을 묘사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 악장은 1903년 여름에 쓴 것이고, 당시 장녀 마리아는 만 한 살이 안 됐으며 둘째 안나는 임신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허구 내지는 상상에 의한 회고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는, 중간 두 개 악장(2, 3악장)의 연주 순서에 대한 혼선 문제가 있다. 초연 당시 말러는 두 번째 악장에 빠른 스케르초, 세 번째 악장에 목가적인 안단테 악장을 배치했다. 그런데 리허설 도중 생각을 바꾸어 안단테를 두 번째 악장으로, 스케르초를 세 번째 악장으로 맞바꾸기로 결정했다. 말러는 악보 출판사 측에 이 새로운 순서대로 2판 악보를 발간해달라고 주문했고, 기존 인쇄된 스코어에도 ‘악장 순서를 바꾼다’는 설명문을 집어넣었다.
그는 생전 세 번 이 작품을 지휘할 당시 모두 이 악장 순서를 따랐다. 2판 악보도 그의 주문에 따라 이 순서대로 출간되었고 그의 생전 다른 지휘자들이 지휘를 맡은 세 번의 공연도 이 순서에 따랐다. 그런데 말러 사후 8년 만인 1919년 알마가 돌연 말러와 친분이 두터웠던 지휘자 빌렘 멩겔베르크에게 편지를 보내 “스케르초가 먼저, 그 뒤에 안단테가 맞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 알마의 생전 결정들이 총체적인 의심 속에 놓이게 되면서 “말러 생전에 연주된 여섯 번 연주 순서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기 더해 마지막 피날레 악장에는 ‘세 번의 해머 문제’가 있다. 이 악장에서 말러는 여태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괴이한’ 악기를 도입했다. 나무망치로 나무판을 가격해 굉음을 내도록 한 ‘해머’다. 이 무시무시한 소리에 대한 설명은 알마의 회고록에만 등장한다. 남편이 “세 번의 강타는 운명의 강타를 뜻하며, 그 마지막 타격으로 영웅은 쓰러진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알마는 그 세 번이 말러의 빈 국립오페라극장 감독직 사직, 장녀 마리아가 성홍열로 죽은 일, 그리고 말러 자신이 치명적인 심장병을 진단받은 것이라고 설명하며 “말러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최종 악보에서 세 번째 타격을 삭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알마가 설명한 말러 인생의 ‘세 타격’은 모두 이 교향곡이 발표된 이후의 일이다. 말러가 빈 국립오페라 극장 감독에서 물러난 것은 1907년 5월, 장녀의 죽음은 두 달 뒤인 7월이었으며 이때 방문한 의사가 말러의 심장 이상도 진단해냈다. 이 때문에 알마가 해석한 세 번의 타격을 ‘순전한 거짓말’로 몰아세우는 목소리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비난에는 과도한 점이 있다. 알마도 이러한 시점상의 불일치를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세 번의 해머 타격을 ‘예언적인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알마 말러와 두 딸 마리아(3살), 유스티나(1살). 마리아는 7살 때 사망했는데, 말러는 그 3년 전에 작곡한 연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가 딸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마가 직접 세 번의 해머 타격에 대해 스스로 설명하려 한 것은 그 동기가 미심쩍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3년 뒤인 1910년, 말러는 아내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심각한 관계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충격으로 괴로워했다. 만약 말러가 세 번의 충격을 실제로 ‘예언’했다면, 결과적으로 그 충격들 중 하나는 아내의 부정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밖에 알마가 범한 사소한 왜곡 사례들은 모두 소개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남편이 혼신의 힘을 다해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지휘했다고 쓴 날 실제로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공연된 사실이 신문 리뷰 등으로 확인되는 식이다. 필적을 알아보기 힘들었던 알마의 일기가 1997년 마침내 책으로 공개되면서 그의 회상에 대한 불신은 훨씬 커졌다. 회상록에 쓴 얘기들이 실제로는 일기와도 상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알마는 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지인들을 회상록 속에서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시누이였던 유스티네에 대한 가차 없는 비방은 일부에 불과했다. 말러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게으르고 업무에 충실하지 않은 인물로, 그의 부인은 쇼핑과 사치의 화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이 회상한 이들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여인
1910년, 말러가 사망하기 1년 전 그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와 아내가 깊은 관계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아내에게 결정을 요구했고, 알마는 남편에게 돌아왔다. 이듬해 말러가 사망한 뒤에도 그는 그로피우스와 결합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다.
1912년에서 2년 동안, 알마는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사랑에 빠졌다. 코코슈카가 두 사람을 그린 <바람의 신부>에는 완전히 자신을 의지하고 쉬고 있는 알마와, 반대로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후 알마는 다시 그로피우스에게 돌아가 1915년 그와 결혼했고, 딸 마농을 낳았다. 이어 아들을 임신했지만 그로피우스의 아이가 아니었다. 아이의 실제 아버지는 유태인 작가 프란츠 베르펠이었다.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이혼한 뒤 베르펠과 결혼했다. 1918년 출산한 아이는 곧 사망했다. ▶발터 그로피우스. 그는 현대건축의 산실이자 조형예술의 초석이 된 바우하우스(Bauhaus)를 세운 거장이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베르펠과 알마는 프랑스로 이사했다. 프랑스마저 독일군의 손에 놓이게 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주했다. 베르펠의 소설 <베르나데테의 노래>가 성공해 생활은 안정됐지만 베르펠은 194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알마는 LA와 뉴욕에서 옛날 빈의 베르타 추커칸들처럼 사교계 여왕으로 군림했다. 1964년 85세로 사망해 빈 근교에 묻혔다.
알마는 자신의 남편과 연인들을 한때나마 진정으로 사랑했을까. 그가 죽기 전 작가 엘리어스 카네티에게 했던 말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는 두 번째 남편인 그로피우스를 회상하며 “그는 진짜 아리아인이었고 인종적으로 나와 맞았던 유일한 남자다. 나와 사랑에 빠진 다른 사람들은 말러처럼 작은 유대인이었다.”고 말했다. 유대인 천재 예술가 두 명과 결혼했고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여인이 나치 인종주의자와 다름없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처럼 부박하고 편견에 가득 찬 것으로 밝혀진 그의 정신세계는 알마에 대한 일말의 공감이라도 간직했던 사람에게 그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 ‘불편한 진실’이었다.
알마는 1964년 뉴욕에서 별세했다. 자신의 장례식에 사용할 음악까지 꼼꼼히 지정해 두었지만 그 목록에 말러의 작품은 들어 있지 않았다.
만년의 알마 말러. 그녀는 자신의 공식 이름을 알마 마리아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Alma Maria Mahler Gropius Werfel)로 표기해 달라고 했다. 마리아는 결혼 전 이름이고,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은 남편들의 이름이다.
글 유윤종 (음악 칼럼니스트) 연세대 독어독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동아일보 음악 전문기자와 독일 특파원, 문화부장을 역임했으며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사무국장 및 서울시향 월간 SPO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고 동아일보에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 칼럼을 연재중이다. 신사동 음악공간 ‘무지크바움’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