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제임스 헤일라 - 아이가 아홉이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라라와복래 2013. 5. 4. 11:03

제임스 헤일라

아이가 아홉이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_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187918905     2013.04.25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쥔장 선동기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2009)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화가들의 이야기를 뒤적거리면서 관심 가는 것 중 하나가 결혼 이야기와 아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화가 이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 느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내용도 좋지만 아이들이 무척 많았고 그 아이들 중 네 명이 화가가 되었으니 참 대단한 아버지였던 영국의 제임스 헤일라(James Hayllar, 1829-1920)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복이 많은 화가였습니다.

 

가시  The Thorn, oil on canvas

작은 수레에 손녀와 꽃바구니를 함께 싣고 가던 할아버지가 수레를 세웠습니다. 꽃송이를 들고 있던 손녀의 손에 가시가 박혔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지만 눈은 핀셋을 들고 조심스럽게 가시를 제거하는 할아버지의 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표정을 보면 혹시라도 손녀가 아플까 봐서 아주 조심조심하는 모습입니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이 이렇게 따뜻하게 묘사될 수도 있군요. 아름다움 속에 가시가 숨어 있다는 것을 저는 어른이 되어서 배웠는데, 어린 소녀는 지금 이 순간 배울 수 있을까요?

헤일라는 웨스트 서섹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열세 살이 되던 해 헤일라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란시스 캐리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의 길을 위해 집안 식구들을 설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 나이 때 저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제 앞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As the Twig is Bent So Is the Tree Inclined, oil on canvas

저녁기도 시간인 모양입니다. 할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손을 의자에 올려놓았습니다. 하루를 잘 보낸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신께 드리는 순간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소녀도 손을 가운데로 모았습니다. 반성할 것이 없는 천사 같은 어린아이지만 어른을 따라 하는 것이지요. 기도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어린 나이부터 배웠으니 잘 클 것 같습니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 문제로 매스컴이 시끄럽습니다. 그것이 아이들 문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나타난 것이지요. 무엇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는지 정말 냉정하게 어른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헤일라가 입학한 아카데미의 선생님인 캐리는 존경받는 역사화가였습니다. 또 라파엘전파의 대표주자인 로세티와 밀라이의 스승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헤일라의 연대기를 상상해보면 6년 정도 캐리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848년, 헤일라는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기 위해 런던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시골집의 신생아  The First Born at the Cottage, oil on canvas

시골집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소식을 들은 이웃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소박한 곳을 찾아 왔으니 축하할 일이지요. 갓난아기를 보여주는 어머니나 아이를 보러 온 이웃이나 모두 행복한 얼굴입니다. 한 걸음 뒤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의 아빠도 흐뭇한 얼굴입니다. 태어난 아이가 남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고 있는 할아버지의 편한 모습 때문입니다. 시간은 이렇게 흐르는 것이죠. 어머니의 품에서 두 발로 그리고 지팡이와 의자로 자리를 옮겨 가는 것, 사람 사는 순서 아니겠습니까? 저도 가서 아이의 탄생을 축하해주고 싶습니다.

로열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해 로열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하게 됩니다. 영국 화가로서는 그곳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 되는데 그 후로부터 거의 50년 가까이 정기적으로 작품이 전시되었으니까 헤일라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극장에서  At the theater, oil on canvas

저 남자 누군지 알아? 누구? 건너편에 붉은 커튼이 몸을 반쯤 가린 남자. 이리 줘봐. 내가 자세히 볼게. 오, 괜찮은데. 그런데 언니 아는 사람이야? 왜? 괜찮지? 얼마 전 카페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인데 머릿 속에 떡하고 자리를 잡는 거 있지. 그런데 오늘 여기서 다시 보게 되네. 이건 운명인 것 같아. 여보세요 아가씨, 운명이라는 건 그럴 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만큼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것, 목숨 걸고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할 때 쓰는 겁니다. 그나저나 아가씨들 눈, 정말 별처럼 빛나고 있군요.

1851년, 스물두 살의 헤일라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납니다. 영국에서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던 프레데릭 레이턴과 함께 여행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함께 한 것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에서 만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3년간 그곳에 머무는 동안 이탈리아 화가들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아무래도 보는 것이 많아지면 표현하는 것도 달라지겠지요.

할아버지의 어린 간호사  Grandfather’s little nurse, oil on canvas

할아버지, 좀 괜찮으세요? 아파서 누워 있는 할아버지 머리에 뺨을 댄 손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합니다.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복잡합니다. 손녀의 그런 모습이 기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겠지요. 의자에 놓은 음식이 그대로 있습니다. 소녀가 들고 왔을까요? 광주리 위에 올려놓은 꽃 한 송이, 할아버지를 위해 준비했을 겁니다. 이런 그림을 만나면 쉽게 눈을 돌리지 못하겠습니다. 영혼과 영혼이 하나 되는 순간이 흔하지 않거든요. 나중에 저는 아프지 않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헤일라는 문학적인 내용이나 역사적인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제작해서 로열 아카데미에 전시합니다. 처음에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초상화 분야였다고 하니까 여러 분야에 재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55년,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헤일라는 자신보다 두 살 많은 이디스와 결혼합니다.

마차를 탄 두 여인  Two Ladies in a Carriage Ride, c.1860, oil on canvas

쌍둥이 자매일까요? 입은 옷도 생김새도 똑 같습니다. 복장을 보면 부잣집 따님입니다. 자가용 마차 모는 모습을 요즘 시대로 바꿔 놓으면 최고급 오픈카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것이 되겠지요. 관객을 할끗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눈과 입에는 자신감이 가득 걸렸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외모도 눈에 확 들어옵니다. 요즘 딸아이를 보고 있으면 젊었을 때 아내 모습이 떠오릅니다. 물질적인 것과 관계없이 마음이 아주 건강했거든요. 그렇게 자라주기를 기대했는데 잘 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그림 속 두 여인도 마음이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연상의 여인과의 결혼, 그것도 거의 큰 누나뻘 되는 여인과 결혼하는 남자들도 있어서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제가 결혼할 때만 해도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일라의 결혼이 당시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궁금합니다. 두 사람의 금슬이 좋았던 것인지 아홉 명의 아이를 낳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결혼에서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배우기에는 결코 늦지 않았어  Never Too Late to Learn, 1897, oil on canvas

할아버지가 한 자 한 자 글을 써 가는 동안 두 여인의 시선은 펜 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을 보면 아마 할아버지는 글을 모르다가 얼마 전부터 옆에 있는 손녀에게 배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잘못 쓸까봐 손녀는 할아버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의 입이 살짝 열렸습니다.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놀랍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햇빛은 방안으로 가득 밀려들고 있고 펜이 종이 위를 사각거리며 지나가는 소리와 여인들의 침을 삼키는 소리가 방안을 아주 따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헤일라 부부는 네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두었는데 나중에 이 아들 중에 네 명이 화가가 되었고 훗날 헤일라를 포함해서 화가로 성공한 네 아이들의 작품이 로열 아카데미에 전시되는 대단한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물론 아이들의 미술교육은 헤일라가 직접 맡았습니다. 아버지만큼 좋은 선생님도 드물죠. 그런데 저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추위 조심하세요  Keeping out of the Cold, oil on canvas, 112.7x87.3cm

밖에 겨울비라도 내리는 모양입니다. 외출을 하는 아버지를 위해 딸은 한 손에는 우산을, 또 한 손에는 음료수를 들고 준비 중입니다. 붉은색 목도리를 단단히 하고 있는 아버지는 어깨를 잔뜩 치켜 올렸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냐? 그래도 아버지, 추위 조심하세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입가에 예쁜 미소가 번졌고 아버지의 눈에도 미소가 담겼습니다. 어머니는 어디 갔을까 하는 생각은 잠시 접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바라만 보아도 좋거든요.

헤일라는 조지 레슬리와 함께 빅토리아 여왕 제위 50주년 기념 초상화를 함께 그릴 정도의 명성을 얻습니다. 1866년부터는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일련의 풍속화를 제작하는데 대중들로부터 매우 인기가 좋았습니다. 이런 성공을 거둔 후 로열 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추천을 받았지만 그만 투표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캐슬 프라이어리의 달맞이꽃  Primrose Castle Priory, oil on canvas, 1881, 84x63cm

캐슬 프라이어리에 물 항아리와 달맞이꽃 바구니를 든 소녀가 등장했습니다. 물을 길러 나오면서 바구니에 꽃을 채운 모양입니다. 헤일라의 식구들이 살던 집입니다. 나중에 헤일라의 딸들의 회고에 의하면 이 집은 행복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아홉이나 되었고 사촌들과 이웃들이 자주 놀러왔다고 하니까 늘 집안은 왁자지껄했을 겁니다. 사람 사는 집이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로열 아카데미 준회원에서 탈락 한 후 헤일라는 두 번 다시 회원 투표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큰 집을 구해 런던을 떠납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속이 좀 상했을 것 같습니다. 1875년에는 ‘캐슬 프라이어리’(Castle Priory)라는 이름이 붙은 집으로 이사를 갑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수도원 성’쯤 될 것 같은데 대저택이어서 붙은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테니스 놀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헤일라와 식구들 역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런 환경에서 영감을 못 얻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요?

오월제  May Day, oil on canvas

5월 1일, 오월제 준비가 한창입니다. 소년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가 메이폴(Maypole) 역할을 하겠군요. 가지를 장식할 꽃다발을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손을 보고 있는데, 어린 숙녀는 벌써 꽃송이 하나를 들었습니다. 동네를 돌아다니기 위해 이미 단장을 끝낸 아이도 있고 할머니가 마지막 머리 손질을 해주는 아이도 보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무릎에 앉힌 할아버지는 설명하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물론 아이가 알아들을 턱이 없지만 사람 사는 재미가 별것 있겠습니까?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 물 흐르듯 흐르고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재미지요.

1899년, 아내 이디스가 일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내가 없는 집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인지 ‘수도원 성’에서 사는 동안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던 풍경을 뒤로 하고 헤일라는 본머스로 이사를 갑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나와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당시로서는 매우 장수한 셈입니다. 화가로 성장한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노후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요, 헤일라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