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올린 2012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의 바그너 ‘파르지팔’ 공연 전막입니다.
연민으로 깨달음을 얻은 순수한 바보
1막
주요 모티프가 들어 있는 경건한 전주곡이 끝나면 1막은 몬살바트 성 부근의 숲에서 시작됩니다. 성배 기사단의 원로 기사 구르네만츠는 암포르타스 왕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호수에 목욕을 하러 올 것이라면서 두 명의 기사와 함께 왕의 병세를 걱정합니다. 이때 쿤드리가 암포르타스를 위해 구해 온 아라비아 향유를 구르네만츠에게 건네줍니다. 이제 기사 구르네만츠는 쿤드리의 정체, 암포르타스의 부상 경위, 암포르타스의 아버지인 선왕 티투렐과 마법사 클링조르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로 풀어놓습니다. 쿤드리는 원래 착하고 온순한 여자지만 클링조르가 마법을 걸면 색정적인 여인으로 변해 성배 기사들을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선왕 티투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옆구리를 찔린 성창과 그 피를 받은 성배를 얻은 뒤 성배 기사단을 조직해 그것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클링조르도 성배의 기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티투렐은 그의 사악함을 꿰뚫어보고 거절했지요. 그러자 앙심을 품은 클링조르는 마법으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빼어난 미녀들을 종으로 삼아 성배 기사들을 유혹하게 합니다. 티투렐이 노쇠하자 아들 암포르타스가 왕위를 계승하고 클링조르의 왕국을 공격했지만, 암포르타스 왕은 성창에 상처를 입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결코 낫지 않는 상처로 고통을 받으면서, ‘연민으로 깨달음을 얻은 순수한 바보(Durch Mitleid wissend - der reine Tor)를 기다리라’는 계시를 얻고 그를 기다립니다. ▶기사들을 유혹하는 쿤드리와 그녀를 조종하는 마법사 클링조르.
그때 호수 위를 날던 백조를 쏘아 떨어트린 젊은이가 활을 들고 나타나 자랑을 하자, 구르네만츠는 생명을 경시한다며 그를 꾸짖지요. 그가 바로 파르지팔입니다. 구르네만츠는 젊은이에게 출신을 묻지만 그는 이름도 고향도 모릅니다. 쿤드리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알고 있다고 말하며, 기사였던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죽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이 싸움터에 나가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자연인으로 키웠다고 알려줍니다. 파르지팔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쿤드리의 말에 파르지팔은 격분하여 덤벼듭니다. 구르네만츠는 이 젊은이가 계시 속의 ‘순수한 바보’라는 예감이 들어 그를 데리고 성배의 성으로 갑니다.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데리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차원이동’을 하는 이 장면의 음악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롱합니다.
성배 기사들이 전당 안으로 모여듭니다. 티투렐은 암포르타스에게 성배를 꺼내 의식을 거행하라고 명하지요. 그러나 성배의 빛이 상처의 고통을 더 견딜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암포르타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합니다. 기사들은 왕을 위로하고 곧 성찬식을 거행하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를 합창합니다. 의식이 끝나고 기사들이 퇴장한 뒤 구르네만츠는 파르지팔에게 의식을 이해했느냐고 묻지만 파르지팔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왕이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상처에 대해 묻지 않은, 즉 ‘연민’을 드러내지 않은 파르지팔을 구르네만츠는 ‘정말 바보’라고 화를 내면서 내쫓아버립니다.
2막
2막은 마법사 클링조르의 성에서 시작됩니다. 클링조르는 파르지팔이 계시 속의 ‘순수한 바보’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그를 타락시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쿤드리를 깨워 파르지팔을 유혹하라는 과제를 주지요. 쿤드리는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강력하게 저항하지만 결국 클링조르에게 굴복합니다.
파르지팔이 이곳에 나타나자 성배 기사들을 유혹하는 마법의 성 ‘꽃처녀’들은 파르지팔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입니다. 그러나 곧 쿤드리가 나타나 파르지팔의 이름을 부르자 이들은 사라지죠.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느끼며 애틋한 그리움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쿤드리는 부모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며 파르지팔을 현혹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입맞춤이라며 파르지팔에게 키스하죠. 그 순간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 왕을 기억해냅니다. 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그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파르지팔은 쿤드리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칩니다. 그때 클링조르가 나타나 파르지팔에게 성창을 던지지만, 창은 그의 머리 위에서 그대로 멈추고 맙니다. 파르지팔이 그 창을 움켜쥐고 십자가를 긋자 꽃밭은 황무지로 변하고 클링조르의 마법의 세계는 무너져 내립니다.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나를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갑니다.
Giuseppe Sinopoli/Bayreuther Festspiele 1998 - Wagner, Parsifal
Parsifal: Poul Elming
Kundry: Linda Watson
Gurnemanz: Hans Sotin
Amfortas: Falk Struckmann
Titurel: Matthias Hölle
Klingsor: Ekkehard Wlaschiha
Chor der Bayreuther Festspiele
Orchester der Bayreuther Festspiele
Conductor: Giuseppe Sinopoli
Bayreuther Festspiele 1998
성배의 종교적 의미 또는 세속적 기능
3막
3막은 몬살바트 성 부근의 숲입니다. 2막과 3막 사이에 긴 세월이 흘렀죠. 성금요일 아침에 구르네만츠는 잠든 쿤드리를 깨웁니다. 그때 갑옷 차림의 기사가 나타나죠. 구르네만츠는 처음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지만 투구를 벗으니 파르지팔입니다. 파르지팔이 성창을 되찾아온 것을 보고 늙은 구르네만츠는 감격합니다. 암포르타스 왕이 보낸 고통의 세월, 그리고 오랫동안 성배의식을 거행하지 못해 쇠약해진 성배 기사들 이야기를 들은 파르지팔은 깊은 죄책감을 느낍니다. 파르지팔에게 세례를 받은 쿤드리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줍니다. 구르네만츠는 파르지팔과 쿤드리를 성배의 성으로 데려가지요.
오래도록 성배를 보지 못한 티투렐은 기가 쇠하여 죽음을 맞이합니다. 티투렐의 장례를 위해 성배 기사들은 최후의 성배의식을 거행하지요. 암포르타스는 성배로 인해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제발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사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러나 기사들은 모두 뒤로 물러납니다. 그때 파르지팔이 앞으로 나서서 ‘유용한 무기는 오직 하나(Nur eine Waffe taugt)’라며 성창을 암포르타스의 상처에 갖다 댑니다. 그 순간 고통은 사라지고 암포르타스는 기쁨에 넘쳐 왕좌를 파르지팔에게 넘겨줍니다. 파르지팔이 성배를 꺼내 높이 쳐들자 밝은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흰 비둘기가 그의 머리 위에 머무릅니다. 쿤드리는 놀라움과 기쁨 속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기사들은 성배와 구원의 기적을 찬송합니다.

성배의식을 거행하는 성배의 기사들.
이 극의 핵심어는 죄의식과 구원입니다. 주인공들 중 기사 구르네만츠를 제외한 파르지팔, 쿤드리, 암포르타스는 모두 죄의식에 시달리며 구원을 갈망합니다. 파르지팔에겐 어머니를 돌보지 못한, 그리고 암포르타스와 기사들의 고통을 깨닫지 못한 데 대한 죄의식이 있고, 쿤드리에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법에 조종당해 기사들을 유혹한 데 대한 죄의식, 그리고 암포르타스에겐 성배 기사의 정결의 의무를 망각하고 여자의 유혹에 빠져 성배 기사단을 위험에 몰아넣은 죄에 대한 가책이 있죠.
그런데 왜 모두들 그토록 목숨을 걸고 성배를 차지하려고 했을까요? 성배에는 ‘숭고함’(das Erhabene)이라는 정신적ㆍ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충족’(Labung, 먹고 마셔 몸과 영혼에 새 힘을 주는 일)이라는 세속적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배는 자신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는데요, 그 덕분에 성배 기사단은 마치 그리스 신화나 게르만 신화의 신들처럼,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영생을 누리는 것이죠. 이 작품에는 신앙의 동기, 성찬식 동기, 성배의 동기, 성창의 동기 등 주요 유도동기(Leitmotiv)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 라이트모티프들을 주의 깊게 익혀두면 이 긴 작품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진답니다.
정치-심리극으로 새롭게 해석된 ‘파르지팔’
바이로이트 축제에서는 스테판 헤르하임이 연출한 <파르지팔>이 2008년 이래 해마다 공연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성배와 성창 전설을 토대로 한 작품이 이 프로덕션에서는 정치극이자 심리극으로 새롭게 해석되었지요.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연출 콘셉트의 거대한 축은 바이로이트의 역사를 포함하는 독일의 근현대사로, 무대 위에는 바그너가 말년을 보낸 바이로이트의 저택 반프리트(Wahnfried)가 재현되어 관심을 끌었습니다. 성배 기사들의 장엄한 의식은 찾아볼 수 없고, 핵심적인 사건 대부분은 무대 한가운데 놓인 흰 침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2012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파르지팔’ 공연에서 가장 어려운 주역인 구르네만츠를 연기하는 베이스 연광철(오른쪽).
파르지팔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으로 깊은 심리적 상처를 입은 청년으로 그려졌습니다. 쿤드리는 파르지팔을 유혹할 때 1930년대 세계를 사로잡은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로 분장했고, 마법사 클링조르는 검은 망사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트라베스티의 모습으로 등장해 ‘나치’라는 악의 유혹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 악을 희화화했습니다. 음악을 정확히 이해하고 연기를 음악에 맞춘 헤르하임의 연출은 매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왔답니다.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베이스 연광철 씨가 가장 어려운 주역 구르네만츠 역을 맡아 매년 놀라운 갈채와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