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llini, La Sonnambula
벨리니 오페라 ‘몽유병 여인’
Vincenzo Bellini
1801-1835
Amina: Eva Mei
Elvino: Jose Bros
Il conte Rodolfo: Giacomo Prestia
Lisa: Gemma Bertagnolli
Teresa: Nicoletta Curiel
Alessio: Enrico Turco
Coro del Maggio Musicale Fiorentino
Orchestra del Maggio Musicale Fiorentino
Conductor: Daniel Oren
Maggio Musicale Fiorentino 2004
잠든 상태에서 묻는 말에 대답을 하거나 자다 일어나서 몇 걸음 돌아다니다 다시 잠드는 경우를 어린이들에게서는 가끔 볼 수 있지요. 잠에서 깬 뒤에 물어보면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요, 성장한 뒤에도 밤중에 돌아다니고 나서 기억을 못한다면 ‘몽유병자’로 불리게 됩니다. 몽유병의 정확한 진단명은 수면보행증(somnambulism)이라고 한다는군요.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벨칸토 아리아의 명곡 ‘아, 믿을 수 없어라’로 유명한 빈첸초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은 바로 몽유병에 걸린 여주인공을 등장시킨 작품입니다. 이 오페라 제목을 흔히 ‘몽유병 여인’으로 번역하지만, 백혈병에 걸린 여성 환자를 ‘백혈병 여인’으로 부르면 어색하듯, 성별을 강조하는 ‘몽유병 여인’이라는 표현이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빈첸초 벨리니는 나폴리 음악원에서 하이든, 모차르트, 페르골레시의 음악을 배우며 작곡가로 성장했습니다. 1824년 로시니의 오페라 <세미라미데>를 보고 결정적으로 오페라에 헌신하게 되었다는데요, 그의 오페라는 초기부터 관객과 제작자 모두를 만족시키며 인기를 끌었다고 하죠. <해적>을 작곡할 때 만난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와 함께 <몽유병 여인>, <노르마> 등의 히트작을 발표했지만, 파리로 이주한 뒤 마지막 오페라 <청교도>를 발표하고 34세로 병사해 그의 오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외젠 스크리브의 <몽유병 여인>을 토대로 스위스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삼은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은 1831년 3월 6일, 밀라노 카르카노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몽유병에 울고 웃다 마침내 결혼하는 연인들
1막
오늘은 부유한 젊은 지주 엘비노(테너)와 물방앗간집 양녀 아미나(소프라노)가 혼인을 서약하는 날입니다. 마을사람들은 아미나의 집 앞에 모여 축하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지만 이 마을의 젊은 여관주인 리사(소프라노)는 엘비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아미나는 양어머니 테레사(메조소프라노)와 함께 집밖으로 나와 이웃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곧 신랑 엘비노가 혼인서약을 위해 공증인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엘비노는 아미나의 손에 자신의 어머니가 물려준 반지를 끼워줍니다. ▶몽유병 상태로 걸어 다니는 아미나.
그때 어떤 신사가 마차에서 내립니다. 오래 전에 영지를 떠났다가, 긴 세월이 지난 후 다시 고향에 돌아온 로돌포 백작(바리톤)입니다. 그가 아미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미모를 예찬하자 엘비노는 강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아미나는 화가 난 엘비노를 진정시키려고 그에게 사랑의 맹세를 하고, 둘은 화해한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돌포 백작이 여관에서 쉬고 있는데, 여관주인 리사가 들어옵니다. 리사는 그가 영주라는 사실을 알고는 은근히 그를 유혹합니다. 백작과 리사의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누군가가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리사는 남의 눈에 띌까봐 황급히 방을 빠져나가는데요, 서두르다가 스카프(손수건인 경우도 있습니다)를 떨어뜨리고 가죠. 아미나는 자다가 일어나 몽유병 상태에 빠진 채로 이 방에 걸어 들어옵니다. 리사는 문 뒤에서 아미나와 백작을 지켜보지요. 백작은 한순간 아미나에게 손을 대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곧 자제하고, 아미나를 소파에 뉘여 편히 잘 수 있게 해줍니다. 아미나는 “드디어 결혼식 날이 되어 너무나 행복하다”며 그 자리에 없는 엘비노에게 하듯 얘기하다가 다시 잠들어버립니다.
로돌포가 이 고장의 영주라는 사실을 알고 마을사람들은 예의를 표하려고 아침 일찍 찾아옵니다. 그런데 백작은 없고 아미나 혼자 자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죠. 그때 리사가 엘비노와 테레사를 데리고 옵니다. 아미나는 사람들의 소란 속에 깨어나, 자기가 왜 거기 있는지를 모르고 크게 당황합니다. 결백을 주장해보지만 격분한 엘비노는 “이런 여자와는 결혼할 수 없다”며 나가버립니다. 테레사는 리사가 실수로 백작 방에 떨어뜨렸던 스카프를 슬쩍 주워듭니다.

여관에서 자고 있는 아미나를 발견하고 격분하는 엘비노.
2막
2막이 시작되면, 파혼 당한 아미나를 동정하는 마을사람들이 백작에게 아미나의 결백을 증명해 달라고 청하기로 하고 백작의 성을 향해 걸음을 서두릅니다. 아미나는 테레사를 향해 파혼을 슬퍼하는 비참한 심경을 노래하고, 엘비노는 혼자 나타나 배신당한 자신의 절망적인 심정을 토로합니다. 아미나가 다시 한 번 결백을 주장하지만 엘비노는 믿지 않죠. 마을사람들은 백작이 아미나가 결백하다고 말했다며 기뻐하지만, 엘비노는 오히려 더욱 화를 내며 아미나 손에서 자신이 끼워준 반지를 빼내 가져갑니다.
엘비노는 홧김에 리사에게 청혼하고 리사는 기뻐하며 그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백작은 지난밤 아미나의 행동이 몽유병자의 모습과 똑같았다면서 몽유병에 관해 설명하지만, 엘비노는 여전히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리사가 엘비노와 결혼한다는 말을 들은 테레사는 화가 나서 자기가 백작 방에서 발견한 리사의 스카프를 들이대며 “리사가 백작 방에 있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리사가 변명을 못하자, 엘비노는 다시 한 번 절망에 빠집니다.
그때 아미나가 잠옷 차림으로 나타나 물레방아 위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넙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물레방아에 쓸려 들어갈 위험한 상황입니다. 무사히 다리를 건너온 아미나는 몽유병 상태에서도 엘비노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 진실을 알게 된 엘비노는 백작이 시키는 대로 결혼반지를 다시 아미나 손에 끼워주고, 몽유병 상태에서 깨어나 반지를 본 아미나는 자신에게 돌아온 엘비노의 마음에 크게 기뻐합니다. 아미나가 행복에 겨워 노래하고 합창이 이에 답하며 막이 내립니다.
Anna Netrebko - "Ah! non credea mirarti" from Bellini's Opera 'La Sonnambula'
Anna Netrebko, soprano
Jiří Bělohlávek, conductor
BBC Symphony Chorus
BBC Symphony Orchestra
Royal Albert Hall, London
Last Night of the Proms 2007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 성당에 있는 벨리니 묘비에는 <몽유병 여인>의 ‘아미나의 아리아’ 첫 소절 ‘Ah! non credea mirati’(아, 믿을 수 없어라)가 새겨져 있습니다. 2막에서 엘비노가 오해를 하고 떠나자 아미나가 부르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아리아입니다. 이어지는 곡은 모든 오해가 풀려 행복에 겨운 아미나의 노래에 합창이 답하는 종곡입니다.

세리아와 부파 혼합한 ‘오페라 세미세리아’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로시니의 <도둑까치>(La gazza ladra)가 ‘세미세리아’라는 장르 명칭을 갖게 된 뒤로 비슷한 스타일의 오페라들이 작곡되기 시작했습니다.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 역시 진지한 내용의 ‘세리아’에 코믹한 ‘부파’ 요소를 섞은 작품이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도 <도둑까치>와 비슷합니다. ▶벨리니. 서른넷 젊디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벨리니는 원래 <몽유병 여인>이 아니라 빅토르 위고의 사극 <에르나니>를 오페라로 작곡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1830년에 도니체티가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안나 볼레나> 초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역시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의 탁월한 구성으로 <안나 볼레나>는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치는 사극이 되었고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초연의 대성공은 당대 최고의 인기 벨칸토 가수였던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와 테너 조반니 루비니가 출연한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안나 볼레나>는 1831년 런던 하이마켓 극장, 파리 이탈리아 극장, 또 드레스덴, 뉴욕,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카고에서도 엄청난 환호를 받았는데, 바로 이 성공을 지켜본 벨리니는 사극 오페라를 작곡할 용기를 잃었다고 합니다. 도니체티만큼 잘 쓸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외젠 스크리브의 보드빌 <몽유병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은 다른 여러 벨칸토 오페라 작품들과 더불어 오랜 세월 인기를 잃고 묻혀 있었습니다. 이미 베르디와 푸치니의 드라마틱한 오페라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배경도 평범한 시골이고 인물들도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이 오페라를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1950년대부터 마리아 칼라스, 존 서덜랜드, 에디타 그루베로바 등 벨칸토 오페라의 고난도 콜로라투라 기교를 탁월하게 소화해낼 뿐 아니라 연기력까지 뛰어난 소프라노들이 아미나 역을 맡으면서 이 작품은 새롭게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200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는 스위스 시골마을이라는 지나치게 평범한 배경이 극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떨어뜨린다는 종래의 비판을 염두에 두었답니다. 오페라 공연을 앞둔 리허설 상황을 극의 배경으로 삼아, 여주인공 아미나를 휴대전화를 든 현대의 오페라 가수로 바꾸어놓는 등 흥미로운 연출 아이디어들을 보여주었습니다.
Evelino Pido/MET Opera 2009 - Bellini, La Sonnambula
Amina: Natalie Dessay
Elvino: Juan Diego Florez
Il Conte Rodolfo: Michele Pertusi
Lisa: Jennifer Black
Teresa: Jane Bunnell
Alessio: Jeremy Galyon
Metropolitan Opera Chorus
Metropolitan Opera Orchestra
Conductor: Evelino Pido
Metropolitan Opera House, New York
MET Opera 2009
추천 음반 및 영상물 (아미나-엘비노-로돌포 백작 순)
[음반>] 마리아 칼라스, 니콜라 몬티, 니콜라 차카리아 등. 안토니오 보토 지휘,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1957년 녹음. EMI
[음반] 조안 서덜랜드, 루치아노 파바로티, 니콜라이 기아우로프 등. 리처드 보닝 지휘, 내셔널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런던 오페라 합창단, 1980년 녹음. Decca
[DVD] 에바 메이, 호세 브로스, 자코모 프레스티아 등. 다니엘 오렌 지휘, 피렌체 5월음악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페데리코 티에치 연출, 피에르 파올로 비슬레리 무대미술, 2004년 피렌체 시립 오페라극장 공연 실황. TDK
[DVD] 나탈리 드세,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미켈레 페르투시 등. 에벨리노 피도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메리 짐머만 연출, 2009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공연 실황(한글 자막). Decca
글 이용숙(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