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ussorgsky, Boris Godunov
무소륵스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Modest Mussorgsky
1839-1881
Boris Godunov: Yevgeny Nesterenko
Grigory (False Dmitry): Vladislav Piavko
Marina: Irina Arkhipova
Xenia: Galina Kalinina
Varlaam: Artur Eisen
Shuisky: Andrei Sokolov
Bolshoi Theatre Opera Chorus & Orchestra
Conductor: Boris Khaikin
Bolshoi Theatre Opera 1978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독학한 덕분에, 러시아 5인조 가운데서도 무소륵스키의 작품들은 가장 독창적입니다. 강렬한 원시적 생명력을 지녔고 민속적인 색채 또한 강하죠. 바로 그런 러시아적 특성 때문에 그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유럽인들에겐 너무 거칠고 지루한 작품이었고, 그래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작품을 유럽적인 음악 어법으로 손질해 1908년 디아길레프와 함께 파리 오페라극장 공연으로 서유럽에 소개했습니다. 작곡가 무소륵스키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죠. 그래서 이 작품에는 몇 가지 초판과 개정판이 존재하는데요, 오늘날 세계의 오페라 극장은 세련된 림스키코르사코프 개정판보다 무소륵스키의 오리지널 버전을 선호하는 추세입니다.
모스크바 귀족 출신으로 16세기 러시아의 차르였던 이반 4세(이반 뇌제라고도 불립니다)는 귀족 세력을 억압하고 절대적인 전제정치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백성을 공포에 떨게 했으며 자신의 맏아들까지 죽인 잔혹한 인물입니다. 이 이반 뇌제가 죽었을 때 세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드미트리는 아직 어려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척 보리스 고두노프가 섭정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간질로 고생하던 황태자 드미트리는 1591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요, 사인을 조사한 위원회는 드미트리가 칼을 쥐고 장난을 하다가 스스로 상해를 입어 죽었다고 보고했지만, 차르가 되려는 야심을 품은 보리스가 황태자를 암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냉철하고 능력 있는 통치자로 선치를 했으나 1600년대 초반 러시아를 덮친 끔찍한 가뭄과 기아, 모스크바의 방화 사건, 굶주린 농민과 도시 빈민의 반란 등으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1605년, 이반 뇌제의 막내아들임을 자처하는 가짜 드미트리가 출현해 변방에서 군대를 조직해서 모스크바로 진군하는데, 이때 보리스가 갑작스럽게 죽자 드미트리는 보리스의 아들을 살해한 뒤 권력을 쥐지만 그 역시 곧 암살당하고 맙니다. 러시아 사학자 카람신이 기록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세심하게 연구한 작가 푸슈킨은 군주와 왕정을 소재로 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참고로 해 1830년에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를 발표합니다. 그러나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금지령으로 이 작품은 푸슈킨이 세상을 떠나고 30여 년이 지난 후 연극무대에 올랐습니다.
당시 오페라 소재를 찾고 있던 무소륵스키는 이 작품에 깃든 민주주의적 이상에 깊은 감동을 받아 곧장 작곡에 착수해 1869년에 작품을 완성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은 이 오페라 상연을 거절했습니다. 이 초판은 뚜렷한 여주인공이 없고 러브스토리도 전혀 없는데다 군중 장면만 많은 건조한 작품이어서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없으리라 짐작했던 것이죠. 무소륵스키는 푸슈킨의 원작 의도에 충실하고 싶었지만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가짜 드미트리와 귀족의 딸 마리나의 연애 이야기를 3막에 끼워 넣었답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성대한 대관식 장면.
권력을 찬탈하고 가책으로 실성하는 러시아 황제
프롤로그
오페라의 프롤로그는 1598년 모스크바가 배경입니다. 이반 뇌제의 맏아들이 세상을 떠난 직후, 왕비의 오빠인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반 뇌제의 막내아들 드미트리를 암살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제위에 오르라는 민중의 탄원을 거절하고 보리스는 수도원에 칩거 중이죠. 그러나 결국 그는 즉위를 수락하고, 크렘린 광장에서 보리스의 대관식이 거행됩니다.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그는 자신의 막중한 책임감을 노래하죠.
Evgeny Nikitin, bass-baritone
Sergei Semishkur, tenor
Mariinsky Theatre Chorus & Orchestra
Valery Gergiev, conductor
Mariinsky II Theatre, St. Petersburg
2013.05.02
Valery Gergiev/MTO - "Coronation scene" from opera 'Boris Godunov'
2013년 5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제2극장 개관 축하 그랜드 갈라 공연 프로그램의 하나로 올린 무소륵스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프롤로그의 ‘대관식 장면(Coronation scene)’입니다.
1막
1막은 1603년 추도프 수도원에서 시작합니다. 늙은 수도사 피멘이 연대기의 마지막 장을 쓰면서 과거를 회상합니다. 옆에서 자다가 악몽을 꾸고 깨어난 젊은 수도사 그리고리는 “황제 보리스가 드미트리의 암살을 교사했고, 드미트리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리와 동갑일 것”이라는 피멘의 이야기를 듣고 놀랍니다. 한편, 러시아와 리투아니아 국경 근처의 여관에서는 술에 취한 파계 수도사 바를람이 이반 뇌제의 타타르 정벌을 찬양하는 ‘그 옛날 카잔에서’를 노래합니다. 베이스의 유명한 아리아죠. 그리고리는 이곳에 왔다가 체포가 두려워 도망칩니다.

2막
배경은 다시 크렘린 궁전입니다. 보리스의 딸 크세니아가 죽은 약혼자 때문에 상심해서 울고 있는데 유모와 남동생이 익살스러운 노래로 그녀를 위로합니다. 보리스는 딸의 약혼자가 죽고 귀족들이 모반을 계획하고 기근과 역병으로 민심이 등을 돌리자 극도의 불안과 심적 고통에 시달립니다. 게다가 선왕의 황태자를 죽인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괴로워하죠. 이때 귀족회의의 슈이스키가 찾아와 “드미트리를 사칭하는 자가 폴란드 군과 손을 잡고 모스크바를 공격하려 한다”고 보고하며 죽은 황태자의 모습을 다시 묘사하자, 보리스는 환각 속에서 드미트리의 모습을 보며 광란의 장면을 연출합니다. ▶가짜 드미트리에게 살해당하는 보리스의 부인과 아들.
3막
폴란드 산도미에르 성을 배경으로, 이곳에 폴란드 총사령관의 딸 마리나가 등장합니다. 드미트리를 사칭하고 있는 그리고리와 사랑하는 사이죠.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가짜 드미트리에게 마리나는 “나는 사랑보다는 모스크바 황제의 자리를 원한다”면서 일부러 드미트리의 자존심을 자극해 그가 출정을 결심하게 만듭니다.
4막
노브고로드 근처의 숲에서는 바를람과 미사일이 “악마 보리스를 타도하고 정통 황태자 드미트리를 즉위시키자”며 민중을 선동합니다. 한편 크렘린 궁전에서는 귀족회의가 드미트리의 진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정신착란 상태의 보리스가 들어옵니다. 수도사 피멘이 “드미트리 황태자의 무덤을 참배하고 기적으로 눈을 뜬” 어떤 장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충격을 받은 보리스는 아들을 불러 통치의 기본을 전한 뒤 깊은 참회 속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 보리스의 아들 표도르는 심약한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에, 테너나 바리톤이 아닌 메조소프라노나 카운터테너가 이 역을 노래합니다.
Boris: René Pape
Holy Fool: Andrey Popov
Metropolitan Opera Chorus & Orchestra
Conductor: Valery Gergiev
2010.10
Valery Gergiev/MET Opera 2010 - "Holy Fool scene" from opera 'Boris Godunov'
4막 첫 장면인 ‘바보 성자 장면’(Holy Fool scene: 해설에는 이 부분 설명이 빠졌습니다). 모스크바의 바실 성당 앞.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바보 성자(Holy Fool)’를 놀려대고 마지막 남은 동전을 빼앗습니다.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와 그의 근위병들이 성당에서 나오자 바보 성자는 보리스에게 그가 드미트리를 죽인 방식대로 아이들을 죽이라고 하죠. 슈이스키가 바보 성자를 체포하려는 것을 말린 보리스는 바보 성자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만 바보 성자는 보리스를 헤롯 왕이라고 부르면서 성모 마리아도 그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며 이를 거절합니다. 보리스와 수행원들이 떠난 뒤 바보 성자는 러시아의 어두운 미래를 탄식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독창적이고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음악
러시아 언어의 리듬을 살린 독창적인 작곡법으로 ‘러시아의 바그너’라고 불리는 무소륵스키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지만 음악 공부를 계속하지는 못했고, 13세에 근위사관학교에 입학해 직업군인이 되는 바람에 군의관이었던 보로딘과 알게 되었죠. 그리고 그를 통해 알게 된 발라키레프에게서 작곡을 배웠습니다.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군 생활을 그만둔 뒤 교향시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으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생계를 잇기가 어려웠던 무소륵스키는 도중에 다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던 중에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작곡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87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극장에서 이 오페라가 초연되었을 때 관객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젊은 관객들은 새롭고 파격적인 무소륵스키의 음악에 열광했지만 비평가들은 오히려 “음악이 부자연스럽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1896년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손질한 개정판이 같은 극장에서 초연되기도 했는데요, 그 뒤 정치적인 이유로 마지막 장면이 삭제되는 등 지속적인 수난을 겪던 이 오페라는 20세기에 들어서야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러시아의 전설적인 베이스였던 표도르 샬리아핀(Fyodor Ivanovich Shalyapin, 1873-1938)이었답니다. 성악가의 연기력을 거론할 때면 마리아 칼라스와 나란히 오페라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그는 일찍 무대에서 사라진 칼라스와는 달리 40년 이상 무대를 지키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카리스마로 관객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2막에서 보리스가 “죽음이 이 땅을 짓밟고 있다. 고통 받는 민중이 나를 저주한다”고 탄식하다가 “내 머리는 미쳐버리고 눈앞에는 피투성이 아이가 보인다”며 자신이 죽이게 한 황태자의 환영에 시달리는 광란의 장면에 이르면, 샬리아핀의 연기에 압도된 관객은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숨도 쉬지 못했다고 합니다. ▲광기 어린 왕 보리스의 모습을 연기하는 샬리아핀.
권력자의 심리극인 동시에 민중 중심의 역사극인 이 오페라는 주제면의 양극성 때문에 더욱 매혹적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해 러시아의 암울한 미래를 예언하는 ‘바보’는 권력의 억압 속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민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추천 음반 및 DVD
[음반] 아나톨리 코체르가, 마리야나 리포브셰크, 세르게이 라린, 새뮤얼 래미, 필립 랭그리지 등.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슬로바키아 필하모닉 합창단, 베를린 방송합창단, 퇼처 소년합창단, 1993년 녹음
[음반] 보리스 크리스토프, 에우제니아 차레스카, 니콜라이 게다, 보리스 크리스토프(3중 배역), 안드레이 빌레츠키 등. 이사이 도브로벤 지휘, 파리 국영방송 오케스트라, 파리 러시아 합창단, 1952년 녹음
[DVD] 마티 살미넨, (1869년 무소륵스키 오리지널 버전으로, 마리나 없음), 페르 린츠코그, 에릭 할프바르손, 필립 랭그리지 등. 제바스티안 바이글레 지휘,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빌리 데커 연출, 2004년 리세우 대극장 공연 실황
[DVD] 로버트 로이드, 올가 보로디나, 알렉세이 스테블리안코, 알렉산더 모로소프, 예브게니 보이초프 등.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키로프 오페라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스티븐 로울리스 연출(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오페라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프로덕션), 1990년 마린스키 극장
글 이용숙(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