댜길레프가 신예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에게 대규모 오케스트라용 발레음악인 <불새>를 위촉한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자 숨 돌릴 겨를도 없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전투를 벌이는 듯한 일종의 발레-콘체르트슈튀크(Ballet-Konzertstück)를 작곡해 달라고 작곡가를 설득했다. 이에 1910년 여름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꼭두각시 인형인 페트루슈카(영국에서는 Punch, 프랑스에서는 Polichinelle, 이탈리아에서는 Pulcinella)라는 제목을 떠올리게 되어 1장의 러시아 춤과 2장 대부분을 작곡했다. 댜길레프의 요청대로 피아노를 등장시켰고 특히 2장에서 큰 역할을 하게끔 구성했다. 10월에 프랑스로 거처를 옮긴 뒤 1장 나머지와 3장 전체, 4장 대부분을 작곡하고 1911년 3월경에는 작품의 오케스트레이션까지 거의 마쳤다.
이렇게 총 1막 4장으로 구성된 발레음악 페트루슈카는 1911년 5월에 작곡이 완성되었고, 다음 달인 6월 13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피에르 몽퇴의 지휘와 발레뤼스의 무대로 초연되었다. 이 발레의 시나리오를 쓴 알렉산드르 베누아가 무대장치를 제작했고 안무는 미하일 포킨(Michael Fokine, 1880-1942)이 맡았으며 페트루슈카 역은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zinskii, 1890-1950)가 맡았다. 결과는 불새 초연 때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즉각적으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발레에는 어마어마한 열광을 보냈다. 파리는 물론이려니와 이후 빈 슈타츠오퍼에서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음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정도였지만, 발레뤼스의 안무와 스타 발레리노인 니진스키의 탁월한 감정 표현은 단박에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특히 사람도 아니고 인형도 아닌 페트루슈카의 기묘하고도 광적인 동작과 공허한 얼굴 표정, 그리고 고통스러운 내면의 파토스를 완벽한 몸짓으로 보여준 천재 니진스키의 연기는 찬탄을 자아냈다.◀페트루슈카 역을 맡은 니진스키
무대감독 베누아에게 헌정된 이 페트루슈카는 전통적인 발레와는 전혀 다른 음악 언어와 무용 언어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파격적이다. 인형이 발레나 오페라에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전적으로 주인공으로 나선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들이 펼쳐내는 치정극으로서의 비극적인 결말, 현실을 은유하는 듯한 리얼리티는 대단히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만큼 이 페트루슈카는 낭만주의 시대 발레 전통과 결별한, 일종의 19세기 전통의 종지부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20세기에 접어들어 드라마틱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이 작품은 주인공의 심리 묘사로 표현되는 고통과 불안, 폭력과 과시로 얻어진 속물근성의 승리, 권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소시민들의 쳇바퀴적인 삶, 소외되고 버림받은 개인의 잔혹한 결말, 현실에 대한 은유 등등이 20세기 예술의 주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음악 또한 혁신적이지만 스트라빈스키의 다음 작품인 <봄의 제전>만큼 전통과 관습을 파괴하는 작품은 아니다. 러시아적인 정서와 독창적인 화성의 대비가 현대적인 조화를 이루며 안무와 무대장치와 함께 서사적인 클라이맥스와 드라마틱한 전개를 도출하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칭찬한 베누아의 데코르와 다채로운 코스튬, 포킨의 절제된 안무를 중심으로 E.T.A. 호프만적인 환상과 스트라빈스키 특유의 러시아적인 감수성, 동화적인 분위기와 신랄한 현실 비판,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과 초현실적인 상징 등등이 때로는 무시무시하거나 신비스럽게, 때로는 흥겨우면서도 연극적으로 펼쳐지는 동시에 이 모든 예술적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음악과 발레, 시각과 청각, 서사와 은유가 창조적으로 결합된, 바그너의 종합예술론과는 전혀 다른 진취적이고 러시아 취향적인 종합예술의 개념을 정립한 효시로 평가받기도 한다.
니진스키가 페트루슈카의 영웅이라면 음악을 작곡하고 많은 부분을 자신의 아이디어(마지막에 지붕 위에서 페트루슈카의 영혼이 등장하는 아이디어도 스트라빈스키 것이다)로 무대를 채운 스트라빈스키는 페트루슈카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민속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요소, 협화와 불협화, 온음계와 반음계, 콜라주와 병치 효과, 불연속적인 음악적 흐름과 상상력과 드라마의 연속성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전혀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낸 결과 오케스트라 음악에 일대 혁신을 몰고 왔다.
오케스트라 버전은 1911년 오리지널 버전과 그보다 조금 작은 편성으로 손을 본 1947년 개정판이 존재하는데, 전체적으로 러시아 춤을 제외하면 독립적으로 떼어내기 힘든 순환적이고 연속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불새>처럼 연주회용 모음곡으로 만들 수 없었다. 대신 작곡가는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하여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했다. 처음 작곡할 때부터 피아노를 염두에 두었던 탓에 오케스트라 버전의 중요한 요소들을 피아노에 모두 담아내어 원곡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특히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와 아케 팔크 감독이 1965년에 흑백으로 제작한 스튜디오에서의 피아노 솔로 연주 영상물은 발레 뤼스의 무대만큼이나 현대적이고 창조적인 클래식 음악 영상물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1장 : 무어인, 발레리나, 페트루슈카가 같이 러시아 춤을 추는 장면
1장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사육제 분위기가 흥청거린다. 금욕적이고 소박한 사순절이 오기 전인 만큼 시작부터 축제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노점상과 가판대가 가득 찬 가운데 작은 촌극들이 펼쳐지며 사육제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손풍금과 오르골(클라리넷, 플루트, 첼레스타)에 맞추어 아가씨들과 무용수들이 군중들 사이에서 춤판을 벌인다.
작은북이 울리며 복잡한 상점들 사이에서 마법사인 약장수(바순과 콘트라바순)가 페트루슈카, 무어인, 발레리나로 구성된 세 개의 꼭두각시와 함께 극장에 등장한다. 약장수가 플루트를 불며 신호를 보내자 세 꼭두각시는 생명을 얻은 듯 벌떡 일어나 러시아 춤(러시아 민요인 A Linden Tree is in the Field와 Song for St. John's Eve)을 추기 시작한다. 군중이 환호하자 세 꼭두각시는 팬터마임을 펼친다. 페트루슈카와 무어인이 동시에 발레리나를 사랑하지만 결국 발레리나의 관심은 무어인에게 꽂히지만 발레리나의 화해로 흥겨운 러시아 춤을 춘다는 내용이다. 군무가 끝나자마자 세 꼭두각시들은 약장수에 의해 생명을 뺏겨 무대에 쓰러지고 급작스럽게 막이 내린다.
2장 : 굳게 닫혀 있는 발레리나의 방 앞에서 슬퍼하는 페트루슈카
2장
무대 뒤 페트루슈카의 방. 검은 벽지에 별과 초승달로 장식되어 있다. 악마가 그려진 금빛 문은 발레리나의 방을 향해 굳게 닫혀 있다. 청중은 그가 인간과 동일한 감정을 갖고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페트루슈카(C장조와 F샤프장조의 병렬 3화음으로 구성된 ‘페트루슈카 코드’)는 인간의 몸과 정신, 자유와 열망을 원하지만 약장수의 노예와 같은 상태임을 한탄한다. 그리고 디아길레프가 의도했던 콘체르트슈튀크 형식을 반영하여 피아노 아르페지오가 페트루슈카 코드를 장식하며 슬프고 음침한 그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우울함은 자신의 방에 들어온 발레리나로 인해 급격하게 기뻐하며 그녀의 사랑을 얻고자 정력적으로 춤을 추며 구애한다. 방의 기이한 모습과 페트루슈카의 거친 모습에 놀란 발레리나는 이내 자신의 방으로 도망가버린다. 절망에 빠진 페트루슈카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감옥 같은 자신의 방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오른쪽 벽에 주먹만 한 구멍을 낸 채 실패한다. 결국 아무런 통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약장수의 초상화를 향해 절규하며 바닥에 쓰러진다.
3장 : 무어인과 사랑을 나누는 발레리나
3장
무어인의 방. 벽에는 붉은 대지 위에 야자수가 서 있고 천연색의 과일이 그려져 있다. 빈둥거리며 소파에 기대어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다가 코코넛을 발견하고 이리저리 굴리고 돌리며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코코넛을 향해 큰절을 올리기까지 한다. 작은북이 울리며 발레리나가 작은 나팔을 불면서 등장한다. 거만하게 춤을 추며 무어인은 발레리나를 유혹하기 시작하고 이내 같이 춤을 추다가 둘은 포옹을 하며 사랑을 나눈다. 바로 그때 페트루슈카가 질투에 눈이 멀어 방으로 뛰어 들어오고 무어인은 칼을 빼서 그를 뒤쫓는다. 발레리나는 겁에 질리고 페트루슈카는 결국 밖으로 도망친다.
4장 : 죽은 페트루슈카를 끌고 나가는 약장수
4장
다시 1장과 동일한 카니발이 열리고 있는 시장 한가운데의 저녁 무렵. 군중이 몰려오는 가운데 유모들(오보에)이 춤을 추고 피리를 부는 농부가 곰(하이 클라리넷)을 끌고 나오며 술에 취한 상인이 집시 여인들(오보에)을 옆에 끼고 나와 지폐를 뿌린다. 한편 마부들(강한 현악 코드)과 가면을 쓴 무리, 서커스를 하는 광대들도 무대에 등장한다.
이러한 흥겨운 분위기는 겁에 질린 듯 뛰어나온 페트루슈카와 칼을 빼들고 그를 쫓는 무어인 때문에 극적으로 바뀐다. 결국 무어인이 칼로 페트루슈카를 베어 쓰러트리고 놀란 군중은 죽은 페트루슈카 주위에 몰려든다. 경찰까지 달려오지만 약장수는 나무 머리와 지푸라기 몸을 한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페트루슈카기 한낱 지푸라기 인형임을 확인한 군중은 뿔뿔이 흩어지고 약장수는 인형을 무대 밖으로 끌고 가려는 순간 페트루슈카의 유령(트럼펫)이 극장 지붕 위에서 원통한 듯 몸부림치며 자신과 사람들을 조롱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Stravinsky, Trois movements de Petrushka (피아노 독주)
Yeol Eum Son(손열음), piano
Yeol Eum Son Recital 2016
Seoul Arts Center Concert Hall
2016.02.27
[37:16]1곡: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중 “러시아 춤” -[40:00]2곡: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중 “페트루슈카의 방” -[45:05]3곡: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중 “사육제”
Stravinsky, Petrushka (오케스트라 버전)
Paavo Järvi, conductor
Orchestre de Paris
Seoul Arts Center Concert Hall
2011.12.03
추천음반
1. 피에르 불레즈/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버전, DG
2. 마리스 얀손스/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버전, RCO
3. 파리 오페라 발레, 발레 버전, Nonesuch LD
4. 데니스 맞추예프, 피아노 버전, RCA
5.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피아노 버전, EMI DVD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