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세계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던 냉전시대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당연히 양 진영 간의 문화ㆍ예술 교류도 완강히 가로막힌 시기였다.
막혀 있으면 더 상대의 것이 궁금한 법. 당시 서방 세계에는 소련에 천상의 소리를 내는 전설의 합창단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스탈린이 애지중지하는 합창단이라고 했다. 소련 패망 후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전설의 주인공들. 세계는 뜨겁게 그들을 반겼다. 일명 붉은 군대 합창단, ‘Red Army Chorus’다.
정식 명칭이 ‘Red Star Red Army Chorus’인 이 합창단은 1928년 50개가 넘는 연방, 자치공화국, 자치주에서 내로라하는 솔리스트만을 뽑아 온 소련 육군합창단이다. 광활한 대륙의 울림이 그야말로 보드카처럼 뜨겁고 호탕하다. 이에 더해 사회주의 체제하의 예술 단체인 만큼 체제를 수호하는 ‘선동성’까지 가미돼 있어 일단 알게 되면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애호가들은 입을 모은다.
스탈린 체제하에서는 당과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홍보대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혁명가와 군가를 넘어 러시아 민요와 클래식을 소화하는 능력이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 있는 힘이 됐다. 러시아 전통 음악에서 빠지지 않는 발랄라이카(balalaika)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색다른 맛이고. 영화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에 나오는 ‘라라의 테마’를 연주하던 그 발랄라이카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의외로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점이다. 그 첫 번째가 이들의 대표곡 중 하나인 ‘검은 눈동자’. 이 곡은 한국의 88올림픽 때 ‘손에 손 잡고’를 부른 코리아나가 유럽 무대에서 리메이크해 불러 인기를 끌었다. 두 번째가 ‘칼린카(Kalinka)’. 러시아의 결혼식에서 자주 불리는 이 곡은 19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유독 귀에 쏙 들어온다. ‘테트리스’라는 오락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이기 때문.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우리와 깊은 인연의 곡은 ‘바르샤바의 여인(Warsovienne)’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소비에트 군대의 비장한 각오가 담긴 곡이다. 하지만 ‘바르샤바의 여인’이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원래는 폴란드의 노래다. ‘바르샤바 행진곡(Warszawianka)’을 소비에트 군대가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부른 것이다.
이 노래가 우리와 연결되는 것은 6·25 동란 때 한국군의 군가였던 ‘전우야 잘 자라’ 때문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하는 가사의 이 군가는 ‘바르샤바의 여인’과 대단히 많이 닮아 있다. ‘전우야 잘 자라’의 원곡으로 추정되는데 적성 국가의 노래를 다른 때도 아니고 전시에 군가로 불렀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하나의 노래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이 노래를 가장 효과적으로 부른 Red Army Chorus의 남다른 힘이리라. 세계가 그 존재 자체를 색안경 쓰지 않고 예술로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글 최영옥 (음악평론가) 선화예술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동덕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음악 전문지 기자를 거쳐 KBS 1FM ‘KBS 음악실’, ‘SBS 개국 10주년 기념 음악회’, EBS ‘예술의 광장’ 등을 진행했다. 지은 책으로 『클래식, 아는 만큼 들린다』, 『영화 속 클래식 이야기』 등이 있다.
출처 : ‘최영옥의 백 투 더 클래식’ 매경이코노미 제1760호(2014.06.04-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