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빗소리를 듣는 나무 - 김정기 시집

라라와복래 2014. 7. 7. 10:53

빗소리를 듣는 나무 

김정기

문학동네

2014년 6월 25일 발행

156쪽

<꽃들은 말한다> 이후 다시 십 년, 시인이 굴곡진 지난 삶의 한을 가슴에 묻고 먼 곳에서 날려 보낸 새로운 시편들은 오히려 이곳-고국의 우리를 어르고 달랜다. 그의 시는 고통 속에서 끌어내 더욱 빛나는 깨달음을 물, 나무, 꽃 등 부드럽지만 강인한 자연의 이미지로 전달한다. 이 86편의 시들은 타국에서 고독과 그리움으로만 삼십여 년을 살아낸 시인의, 그럼에도 계속해서 세상을 마주하고 모국의 언어로 시를 쓰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다.

 

역사의 광풍에 휘날려 떠나온 고국

고독과 그리움이 피워낸 들꽃 같은 시편들

김정기 시인의 신작 시집 <빗소리를 듣는 나무>가 출간되었다. 1975년 첫 시집 <당신의 군복>으로 문단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반응을 이끌어냈던 시인은 1979년,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시간이 흘러 시인의 이름이 거의 완전히 잊힌 뒤에야 그는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묵혀두었던 시편들을 조금씩 꺼내어 선보여 왔다.(<구름에게 부치는 시>, 공저, 1987 ; <사랑의 눈빛으로>, 1989 ; <꽃들은 말한다>, 2004)

시인으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가장 빛나야 했던 시절, 왜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금-여기에서 사라져야 했던 것일까.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인의 남편이 뉴욕 UN 한국본부에 외교관으로 재임 중이던 1979년, 10‧26이 터졌고, 시인의 남편은 하루아침에 외교관에서 ‘국가원수를 살해한 대역죄인의 측근 제1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시인과 가족들은 뉴욕에서 불법 체류자가 되어 이국땅에 표류하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시간도 어느새 삼십오 년이나 흘러 냉혹한 낙인의 굴레는 벗었지만, 시인에게는 ‘고국으로부터 잊힌 존재’가 되었다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안온했던 흙에서 뽑혀 뿌리 잘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낯설고 거친 땅에 새로이 파고들어야만 했던 시인. 시인의 눈에 아른거리던 고국의 모습은 그를 배신하듯 완전히 변해버렸지만, 그럼에도 그곳과 연결되어 있고자 김정기는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을 계속해 왔다. 시에 대한 열망 하나로 지구 반대편 멀고 먼 뉴욕에서 문인 양성에 힘을 쏟아 온 시인의 삶에 깊은 인상을 받은 소설가 신경숙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모티프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봉인된 시간>, 계간 <문학동네> 2013년 봄)

<꽃들은 말한다> 이후 다시 십 년, 시인이 굴곡진 지난 삶의 한을 가슴에 묻고 먼 곳에서 날려 보낸 새로운 시편들은 오히려 이곳-고국의 우리를 어르고 달랜다. 그의 시는 고통 속에서 끌어내 더욱 빛나는 깨달음을 물, 나무, 꽃 등 부드럽지만 강인한 자연의 이미지로 전달한다. 이 86편의 시들은 타국에서 고독과 그리움으로만 삼십여 년을 살아낸 시인의, 그럼에도 계속해서 세상을 마주하고 모국의 언어로 시를 쓰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다.

눈물의 결정화(結晶化) ― 나이 들어간다는 것

눈을 감으면 보입니다.

이별이 아깝던 날 청춘의 눈물이

눈을 뜨면 안개망에 걸려온 저녁빛

숨지는 햇살에 당신이 가고 다시 오는

질긴 동아줄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산들이 기우뚱하고 흔들릴 때

부서지는 뿌리에 매달린 나무들의 애달픈 사랑

때로는 속을 드러내서 빛나는 최후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풋풋했던 기억의 방에 들어가

드디어 당신을 놓아주었지요.

만지면 모두 하늘이 되는 땅 위의 형체도

이제 놓아버립니다.

막막한 길을 걷는 맑은 피가 균형 잃은 몸을

그래도 좋아하며 받쳐줍니다.

아득해서 더욱 가까운 시간의 눈빛을 마주 보며

이 자리가 황홀합니다.

나는 완벽한 흰빛이 되어 있습니다. ―‘현기증’ 전문

이번 시집에서 김정기는 무너질 것 같은 자신에게 오랫동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이와의 영원한 이별, 그리고 노년에 이방에 홀로 남은 이의 절절한 외로움을 절제된 언어로 읊조린다. 칠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세상을 마주 본 시인에게 슬픔이란 솔직하고 강렬하게 발산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치기를 버리며,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마음속에서 삭이고 다듬어 고매하고 세련된 결정(結晶)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그것이 시인에게는 ‘나이 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독여 떨치고 일어서는 시인의 노련함과 원숙함은 이번 시집의 주된 분위기를 형성한다.

‘현기증’은 노년에 이른 시인이 이별과, 이별 후 남은 감정들을 대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 시에서 시인은 스스로 떠난 이를 붙잡아 둔 채 “질긴 동아줄”을 놓지 못하고 있음을 성찰한다. 산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불던 날, 시인은 부러진 나무줄기 속 흰 속살이 애달프다. 나무의 “속을 드러내서 빛나는 최후”를 아름답게 여긴 그는 “드디어 당신을 놓아”주었다. 닿을 수 없기에 내게 더 이상 의미 없었던 형체들을 놓아버리면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끝을 인정하지 못한 채 붙들고 있던 것들과 진정한 이별을 하는 시인. 그의 육체는 이별을 감당하기에 버겁고 어지럽기도 하지만, 나무처럼 자신의 내부를 모두 드러내고 인정한 시인은 나무의 빛나는 속살처럼 “완벽한 흰빛”이 된다.

뿌리 잘린 이들의 고독 ― 이민자로서의 시선

바람에 마지막 번지를 둔 오늘도

우리집 돌계단엔 꽃잎이 쌓입니다.

그 무거운 외로움을 입술에 물고서

상처에 싹을 키우는 말없는 언어에 귀를 엽니다.

측백나무 가지 위에서 선잠을 자고

지도에도 없는 강물을 밟고 오실 때도

어깨를 누르는 돌무더기 말없이 받아 져줄 때도

묻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모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언제나 길 없는 땅에 길을 내고

따뜻한 것만 모여 사는 마을로 나를 데리고 갔지요.

우리가 버렸던 사투리들이 몰려와서도

자꾸만 외면하는 사랑이라는 단어

끝내 알고 있는 고국산천을 가리고 마는 손바닥

몸을 숨길수록 드러나는 꿈속의 얼굴

머리칼만 보이는 미로의 연속입니다.

영커스 기자회견은 무산되었습니다. ―‘영커스 기자회견’ 전문

김정기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이국적 풍경들은 그의 작품과 분리시킬 수 없는 아련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미국에 거주 중인 시인이 그날그날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은 바를 풀어낸 시에 외국 지명과 조형물, 해외 작품들은 그 존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 더욱 서글프다.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은 고국을 조금이라도 자기 앞으로 당겨오기 위해, 고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지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모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에게 정작 ‘지금-여기’란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뉴욕인 것이다. 시인을 잊은 조국에 대해 그가 느끼는 감정은 온몸으로 부정된 서러움과 사무치는 고독감일 것이다.

‘영커스 기자회견’은 시인이 조국을 향해 품고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시인의 인생은 “바람에 마지막 번지를 둔” 곳에서,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아 “돌계단에 꽃잎이 쌓”이는 외롭고 정처 없는 삶으로 정리된다. 지금껏 시인을 버티게 해준 고국에 대한 그리움, 또는 고국과 그를 이어주고 있는 ‘언어’는 어렵게 찾아와 그의 고단함을 씻어주곤 했다. 하지만 조국에 대해 “오래전부터 알았”던 굳은 믿음은 반전되어 시인을 “더욱 모른다고” 내리친다. 상처 입은 시인은 고국산천을 밀쳐내고 피하려 하지만, 기억하고 있는 고국의 모습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나 이제는 떠오르는 고국의 얼굴조차 “머리칼만 보이는” 아리송한 “미로” 같다. “영커스 기자회견은 무산되었습니다”라는 마지막 행은 시인의 설 자리가 흩어져 사라진 쓸쓸한 상황에 외국 지명이 주는 낯설고 신산한 감각이 더해져, 고국을 그리는 이민자로서의 허망함, 무상함이 극대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 강인한 여성성의 시들

이제 나뭇잎 위를 구르는 빗소리

그 착한 언어의 굴절을 알아듣는다.

몸에 어리는 빗방울의 무늬를 그리며

한 옥타브 낮은 음정에 울음이 배어

수군거리는 천년의 고요 안에

당신의 대답이 울려온다.

밤새 내릴 비에 몸 적시고 서서

잎새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휘청거리는 나무의 눈물을 당신은 모른다.

혼자만 갈 수 있는 길 위에 비가 내리고

비의 말을 헤아려 일기를 쓴다.

산이 깊을수록 빗소리는 커져서

한 줄기 빛이 되는 비밀을 터득하니

먼 곳에서 들리는 몸 떠는 소리를

이제 알아듣는다. ―‘빗소리를 듣는 나무’ 전문

그러나 김정기는 그저 슬픔에 잠겨 있기보다는 자신의 고통을 빛나는 무언가로 치환하려 한다. 그는 또한 자신뿐 아니라 타인, 심지어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아픔을 그저 잊고 지나치려 하지 않고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한다. 그 아픔의 씨앗들은 시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 피어나고, 시인은 이를 천천히 곱씹어 온화하고 여성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항상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고통으로 점철된 곳에서 빛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보게 하는 이러한 긍정성 또한 김정기 시의 큰 특징이다.

표제작 ‘빗소리를 듣는 나무’에서 시인은 나뭇잎 위를 구르고, 줄기를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을 관조한다. 잎새의 속삭임을 들으며 밤새 비에 젖어 휘청거리는 나무의 고통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시인의 눈에 목피(木皮)를 흐르는 물방울들은 “나무의 눈물”로 비친다. 산이 깊어 험해질수록 빗소리는 커지고, 이 험난한 곳에서 드디어 “한 줄기 빛이 되는 비밀”을 깨달은 그는 진정한 시인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제 시인은 “먼 곳에서 들리는 몸 떠는 소리”처럼 우리가 지나치고 갈 법한 이 세상의 사소한 고통들까지 시인으로서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크고 작은 고난 속에서 인생의 비의와 깨달음을 얻는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아닐까.

‘디아스포라의 삶’ - 소설가 신경숙의 발문에서

선생의 시들은 그렇게 긴 세월 모국어와 떨어져 사는 동안에 발생한 안타까움이 언어 사이에 구름처럼 떠다닌다.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고 현실은 부유하기 마련이다. 한 덩어리일 수밖에 없는 게 모국어와 시인의 운명이나 선생에게는 떠나는 말을 붙잡기 위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을 살아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자니 어느 하루라도 어깨가 무겁지 않은 날이 있었겠는지. 내가 선생에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곤 선생이 집중해서 시 이야기를 할 때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때로 어떤 것들은 너무 가까이 있으면 익숙해지기 때문에 대상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 선생과 가까이 지내는 동안 나는 내가 잃어버린 모국어들이 훼손되기 이전의 것으로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오는 순간들과 만나곤 했다.

시인의 말에서

시는 나의 온갖 남루함을 덮어주고 숨결을 조정해주는 수줍음이다.

고국을 떠난 지 삼십오 년, 황무지에서 우리말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시선의 떨림과 황홀함으로 서툴고 약한 시를 지키면서 자랑스럽고, 그래서 행복하였다.

여린 꽃잎 같은 시 한 구절에 입김을 불어넣었던 나의 평생이 부끄럽지만 따뜻하다.

시인 약력

1972년 <시문학>에 시가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다. 2004년 미주문학상을 수상했다. 미 동부한국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뉴욕 AM라디오 코리아 양서 추천을 16년간 방송했고 현재 중앙일보 문학교실(뉴욕 뉴저지)을 14년 동안 담당하고 있다. 시집 <당신의 군복>, <구름에게 부치는 시>(공저), <사랑의 눈빛으로>, <꽃들은 말한다>, 자전 에세이집 <애국가를 부르는 뉴요커>가 있다.

*위 글은 <문학동네> 편집자 리뷰를 전재한 것입니다.

 

조국으로부터 유배 35년, ‘봉인된 시간’을 열어 보이다

김정기 재미시인 새 시집 <빗소리를 듣는 나무>

김재규 사건 연루 남편 따라 불법 체류자 돼 미국 생활

‘말에 베이고 잘려도 좋아’ 시로 꽃피운 모국어 사랑

“한 인간에게 모국어란 이런 것이구나, 17년 6개월 만에 만나도 아무 거름망 없이 귀에 둥지를 트는 것이구나, (…) 이 말에 베이고 찔리고 잘려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TV 앞에 오래 서 있었네.”(신경숙 소설 <봉인된 시간> 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자의 최측근의 아내란 이유로 35년 전에 모국어로부터, 시로부터, 조국으로부터 유배당해야 했던 한 시인이 있다. 재미 시인 김정기(74)다. 1972년 등단한 시인은 1979년 외교관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3년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국에 간 지 반년 만에 박 전 대통령 시해와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시인과 그 가족은 다시는 함께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의 남편 박기창은 당시 현역 육군장교이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비서실장 출신이었다.

그사이 이국땅에서 삶의 한 버팀목이던 남편까지도 잃은 시인의 슬픔은 시 속에서 “완벽한 흰빛”으로 다져졌다. 향수와 비탄도 닦이고 삭혀 정갈한 시어가 됐다. 그래도 86편의 시들에서는 시인의 고독이 읽힌다.

시인은 고등어 배에서 흐르는 피에서 한반도 지도를 보고, 뉴욕의 노을에서 조선의 엉긴 핏자국을 떠올리고, 뉴욕 지하철을 타고 가다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를 읽으며 눈물 흘렸다. “젊은 평론가가 내 손을 들어주었다./ 몰락하는 자가 지는 것 같으나 결국 이긴다는./ 하나를 위해 열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표정은/ 순간 절정이 보인다고. 지면서도 이기는/ 그들이 지킨 하나는 아무도 파괴하지 못한다.”(‘2월의 눈물’ 중)

현대사가 꿰뚫고 상처 낸 시인의 삶과 그 시에 대해 작가 신경숙(51)은 지난해 주석 같은 서간체 소설 <봉인된 시간>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김씨의 시 전반에 흐르는 상실감과 그리움의 전말을 마치 시인 그 자신이 말하는 양 고백하고 있다. 네 가족이 한방에 모여 앉아 벨소리마다에 떨었던 시간, ‘외교관 가족’에서 ‘불법 체류자’로 전락해 진흙탕 같은 삶 속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도 ‘그날’ 이후 단 한 번 화도 부정도 없이 야위고 꼿꼿한 자세로 시인의 곁에서 떨어져본 적 없던 남편, 요새는 시를 쓰지 않느냐는 문우의 편지에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실컷 자는 것”이라고 답장을 쓰려던 기억, “나는 시인이다, 시인을 강등시키지 못한다”고 되뇌며 견뎌낸 시간들….

김 씨에게 시와 모국어는 그 어느 곳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떠다니던 디아스포라의 35년간 그나마 위안이 되는 부표 같은 존재였다.

시인의 험난한 세월이 소설로 엮이게 된 인연은 신경숙 씨가 뉴욕에 1년간 체류하면서 김정기 씨에게 집과 반찬, 가전제품까지 생활에 여러 도움을 받은 데서 시작됐다. 신 씨는 시인에게 서울과 모국어가 어떤 의미인지를 소설에서 김 씨의 입을 빌려 말한다. “선생으로부터 김치 참 맛있었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 그것은 나와 내 가족을 잊어버린 서울이 내게 해주는 말이었다네.”

이번 시집의 발문도 쓴 신경숙 씨는 모국어를 귀하게 여기는 시인의 태도를 보고 “내가 잃어버린 모국어들이 훼손되기 이전의 것으로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오는 순간들과 만나곤 했다.”고 밝혔다. “깊이 사랑한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기억, 아문 후에도 마음에 폐허를 남(겼던)“ 세상과의 불화를 시인이 녹일 수 있던 것도 시와 모국어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쓰라리다라는 어휘를 잊어먹고/ 경마장으로 쇼핑몰로 찾아 헤맸지만 찾을 길 없어서/ 집에 와서 펼쳐본 낡은 책자에서 찾아냈구나”(‘디아스포라의 노을’ 중).

김정기 씨가 1979년 이후 17년 만에 귀국길에 오른 것도 시 덕택이었다. “딱 한 번 서울에 다녀온 후 알게 되었네. 조국이 우리 가족을 버린 게 아니라 정부가 우리를 버린 것이었다는 것을.”(<봉인된 시간> 중) 세월이 흘러 정치적 낙인을 벗고 고국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됐지만 시인의 남편은 한국 땅을 다시 밟지 않고 미국에 몸을 묻었다.

잊혀지고, 돌아갈 곳이 없어 다시 고국을 찾지 않는 시인의 시에는 원망이 없다. 다만 ‘제5공화국’을 제목으로 삼은 시 한 편에서만 유일하게 격렬한 화가 엿보인다. “(…) 우리는 함께 총을 쏜 사람의 부하였고 친구였다/ 세상은 하늘과 땅으로 갈라졌다/ 당신이 임금이 되기 위하여/ 뉴욕에서 추위에 떨던 한 가족이 있었고,/ 흑인에게 커피잔을 내밀며/ 스패니시 등을 두들기던 대한민국의 시인이/ 어떻게 눈을 부릅떴는가를 알리고 말 것이다/ 역사는 결코 거짓말을 안 한다. 할 때도 있지만.” [경향신문 김여란 기자 201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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