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환상과 욕망을 그린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그래서 그와 그의 그림이 풍기는 매력이 한층 돋보이게 된 것일까?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겐 자유를" - 음악 도시 빈에 미술 바람이 불다
세계 미술사에서 ‘분리주의’ 또는 ‘분리파’를 얘기하게 되면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올리게 된다. 예술사조 중에서 ‘분리파’라는 이름처럼 특이한 것도 없다. 통합이 아닌 분리를 이념으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술의 경우에는 ‘분리주의’가 있을 수 있다. 19세기 말 클림트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빈 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으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중견과 원로들의 작품을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은 빈 미술가협회로부터 분리(독립)를 꿈꾸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이란 안정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도전 정신이 넘쳤던 클림트는 안주를 거부하고 ‘빈 분리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897년 4월 3일, 클림트를 회장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먼 모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이 함께한 빈 분리파는 빈 미술가협회에 공식 통보하고 조촐한 창설식을 올림으로써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왼쪽] 1898년경 빈 분리파의 창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서 있는 사람 왼쪽부터 요제프 호프만, 카를 몰, 클림트, 알프레드 롤러, 신원 불명, 콜로만 모저, [오른쪽] 클림트가 만든 제1회 분리주의 포스터. 분리파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있다

빈 분리파가 분리파의 처음은 아니었다. 1892년 독일의 프란츠 폰 슈투크를 중심으로 ‘모나코 분리파’가 창설되었으며, 1893년에는 막스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베를린 분리파’가 이미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파 하면 빈 분리파가 떠오르는 것은 클림트라는 거장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제자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빈 분리파가 결성되면서 클림트의 작품은 혁신적으로 바뀌게 되며, 그의 작품세계는 예술의 도시 빈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결국 빈 분리파의 등장은 빈이 음악의 도시에서 예술의 도시로 이미지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에 맞섰다. 그들은 이제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렸다. 빈 분리파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수공예를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들은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바야흐로 유럽 작단의 아틀리에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어린 시절, 청년 시절에는 최고의 역사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기 힘들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 적도 없고 인터뷰 한 적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항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일곱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어머니 마리아 치머만과 어린 클림트. 클림트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 곁을 떠나자 못했다.
1876년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83년까지 이 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 또한 훗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클림트가 특히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르였다. 특히 ‘예술의 연인’이자 ‘빈의 우상’인 한스 마카르트의 그림은 모호하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었다.
클림트는 한스 마카르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의뢰 받은 작품을 그렸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세 예술가는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했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 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에서 의뢰 받은 빈 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할 내용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랜 구상 끝에 마치와 클림트는 첫 천장 도안을 제출했다. 마치는 중앙과 신학 부분을 작업하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았다. 나중에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빈 대학의 천장화로 사용하기 위해 그린 그림 중 유일하게 밑그림이 남아 있는 <의학>(1900),<철학>(1900),<법학>(1903).
빈 분리파의 전성시대, 불후의 걸작 <베토벤 프리즈>를 역사 속에 각인시키다
클림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에 매료되어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이제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유겐트>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을 창간했다.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 황제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림트는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불편하긴 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어 있다.

<베토벤 프리즈>의 마지막 부분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철학>, <의학>, <법학>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의학(Medicine), 1898, 캔버스에 유채, 72x55cm
1903년 <법학>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 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물뱀 II>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났다고 해서 분리파 이념까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분리파를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권력화된 분리파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 진정한 분리파의 이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클림트를 추종하는 몇 명의 예술가와는 계속해서 교류했지만, 이제 클림트를 막을 수 있는 단체는 없어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어차피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리하여 <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의 이면에 존재한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클림트의 전기 작가들도 그가 영원한 피터 팬이 되고 싶어 했다고 짐작한다. 그것은 그가 오히려 사랑에 관한 한 이상주의자였음을 말해준다. 이상적인 사랑은 쉽게 오지 않는 것,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였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키스>의 여주인공이 플뢰게라고 짐작하고 있다.

<키스>(1907/08),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실로 <키스>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지는 않다.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넘어서 오히려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입술이 아니라 볼에 키스하고 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여성의 표정도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두 사람은 몸을 잘못 놀리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절벽 위에서 키스하고 있다. 결국 <키스>는 클림트가 꿈속에서 그려본 이상적인 여인인 플뢰게와의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닐까? 아직도 <키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키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신비함에 이끌리고 더 황홀해하는지도 모른다. ◀에밀리 플뢰게와 클림트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미디는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가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다고 한다. 플뢰게는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클림트의 마지막에는 또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묘하게도 빈 분리파의 주축 멤버였던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 그리고 에곤 실레도 같은 해에 죽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속에 숨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자유를 향한 열망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50여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서게 된다. 20세기의 세기말이 19세기의 세기말과 비슷해서일까?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클림트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클림트의 전기를 쓴 니나 크랜젤은 이렇게 말한다. “빈이 낳은 유명한 예술가 클림트가 만약 자신의 작품이 현재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지금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그 당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작업 방식은 일상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클림트의 그림에 나왔던 모티프들은 다양한 상품으로 둔갑하여, 넥타이, 열쇠고리, 도자기, 게임용 카드, 퍼즐 등으로 다시 나온다. 우리는 다양하게 다가오는 그의 생애와 예술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즐긴다. 그는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스핑크스는 우리가 답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즐길 뿐이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글 차창룡 (시인, 문학평론가)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라라와복래가 초대하는 클림트 전시회
아래 작품과 글은 <2009 구스타프 클림트 한국 전시 - 클림트 황금빛 비밀> 도록(圖錄)에서 뽑아 정리한 것입니다. 제 스캐너 해상도가 300dpi밖에 안 돼 원 그림에 비해 색조가 빠진 점 양해 바랍니다.

소녀의 얼굴 Sudy of a Girl's Head, 1880, 캔버스에 유채, 43x30cm
클림트의 초기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료 프란츠 마츠의 작품과 그의 작품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같은 학교를 다니며 미술 공부를 했고 예술가로서의 길을 함께 걸었던 동반자였다. 이 작품은 그들이 학교를 다닐 때 클림트가 그린 것으로, 마츠 또한 1880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동일한 형태의 작품을 남겼다. 두 사람은 같은 모델을 두고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이 소녀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시선을 아래로 둔 소녀를 그렸지만, 마츠는 소녀가 입은 옷과 앉아 있는 의자의 디테일에 심혈을 기울인 반면, 클림트는 보다 여유롭고 흘러가는 듯한 화법으로 그려냈다.

움직이는 물(Moving Water), 1898, 캔버스에 유채, 53x66.4cm
이 작품은 1898년부터 1907년까지 클림트가 작업했던 작은 크기의 상징주의 작품 시리즈 중 첫 작품으로 <철학>, <의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무중력 상태에서 허리를 뒤로 젖히고 누워 있는 사람의 형상은 <철학>, <의학>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움직이는 혹은 떠 있는 여인들의 형상은 물줄기와 함께 흐르듯 표현되어 있다.
클림트는 비슷한 형상의 여인들을 반복적으로 리드미컬하게 그림으로써 역동적인 구성을 연출하였다. 그는 아름다운 선의 형태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했는데, 윤곽선이야말로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힘 있는 선의 형태라는 것을 깨닫고, 곡선으로 이루어진 윤곽선과 흐릿한 형태만을 사용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움직이는 물의 흐름과 그 물살을 따라 같이 흘러가는 여인들의 몸짓을 수많은 곡선의 형태로 묘사하였다.

유디트 I(Judith I), 1901, 캔버스에 유채, 84x42cm
1901년 다섯 번째 분리파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던 이 작품의 본래 제목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였다. 유디트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한 후 목을 잘라 복수를 하는 ‘팜 파탈(femme fatal: 남성을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성)'이다. 클림트가 유디트를 팜 파탈의 전형적인 여인상으로 그려낸 것은 당대의 시대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유디트의 손은 처참히 잘려버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에 살며시 놓여 있다. 아래를 바라보며 졸린 듯 살짝 감긴 눈과 약간 벌어진 입술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에로틱한 향기를 더욱 짙게 만든다.
불투명한 스톨에 반쯤 가려진 오른쪽 가슴과 관람객을 유혹하는 눈빛을 보내며 화면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유디트는 단연 작품의 주인공이다. 상대적으로, 액자의 일부로 잘려 나간 듯 어두운 그림자에 묻혀 있는 홀로페르네스는 존재감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다. 이는 남녀를 한 화면에 배치하면서 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치명적 파워를 드러내고자 했던 라파엘전파의 전도된 남녀 배치 방법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클림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갑옷을 입은 유디트를 표현함으로써 보다 강한 남성성을 담은 팜 파탈의 또 다른 프로토타입(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은물고기Silverfish)/물의 요정(Water Nymphs), 1901/02, 캔버스에 유채, 82x52cm
루드비크 헤베시는 1903/04년에 열린 클림트 전시회 팸플릿에서, “클림트의 새로운 작품 ‘은물고기(물의 요정)’은 다시 한 번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광택 없는 금색과 녹색으로 표현된 물속 풍경의 두 여인은 가자미 종류의 납작한 생선인 듯하다. 비록 나는 이들이 생선보다는 올챙이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라고 소개했다.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 Bauer), 1907, 캔버스에 유채, 138x138cm
클림트는 당시 빈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일상성을 벗어나 나른하고 화려한 그의 초상화는 돈 많은 빈 사교계 여인들이 가지고 싶은 작품 1순위였다. 그가 그린 여인들의 초상화는 구불거리고 우아한 아르 누보적인 선과 마치 공작새 같은 화려한 옷으로 극도로 세련된 장식성을 보인다. 정면을 향한 얼굴, 모자이크 처리는 비잔티움 미술의 영향이다. 클림트는 1903년에 이탈리아 라벤나 시를 방문하고 그곳 산 비탈레 교회에 있는 그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에서 큰 영감을 받았었다.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에서 정성스럽게 사실적으로 그린 평면적인 얼굴은 모자이크 패턴으로 꾸민 의상과 잘 대비되고 있다. 불확실한 위치에 서 있는 이 여성은 중국 벽걸이 비슷하게 보이는 배경의 그림과 꽃과 더불어 하나의 장식적 요소가 되어버렸다. 당시 26세였던 아델의 머리 주위로 후광처럼 빛나는 원과 곡선의 장식 그리고 황금색 색채는 마치 그녀를 기독교의 성인과 같이 보이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델은 이 작품을 자신의 결혼기념으로 부모에게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다나에(Danae), 1907/08, 캔버스에 유채, 77x83cm
클림트는 자신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여성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의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누드화나 여인의 초상화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여인들은 일상적 생활 차원에서 벗어나 극도로 세련되고 우아하며 신비스럽다. 이 여인들은 감각적인 선과 화려한 색채로 장식되어 마치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지며 유혹하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결코 직접적이지 않고 시사적이며, 확실하게 포착하기 어려우나 감지할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다. 그리고 에로티시즘의 쾌락이 건강한 남녀의 관계가 아닌 데카당하고 사악하기까지 하며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이 내포되었다는 점 역시 느끼게 된다. 이러한 도발적인 표현은 프로이트가 파헤친 인간의 비밀스러운 욕망과 억압에서 도출된 이미지들이라 하겠다.
1907/08년에 제작된 <다나에>의 경우 그리스 신화(제우스 신은 다나에에게 반하여 황금빛 비의 형태로 또는 떨어지는 동전의 형태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다나에에게 접근한다)에서 주제를 빌렸는데, 여인의 표정이나 강조된 허벅지, 둥글게 양식화된 인체의 곡선에서 실제 이 그림의 주제는 성적 갈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육체적 욕망과 그것의 심리적인 의식, 클림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그때까지 덮어 두고 있었던 인간 본성의 포착이었고 새로 발견한 인간상이었다.

카머 성 공원의 산책로(Avenue in Schloss Kammer Park), 1912, 캔버스에 유채, 110x110cm
클림트는 에밀리 플뢰게 가족과 아터제 호수에서 휴가를 즐기기 시작한 1897년경부터 새로운 양식의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해마다 잘츠부르크 주변의 그림 같은 호숫가에서 여름휴가를 보냈고 그러면서 점차 풍경을 자신의 중요한 작품 모티브로 삼았다. 클림트는 카머 성 근처에 있는 공원의 산책로를 그리면서 풍경화 표면 구조의 균등성을 한층 더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산책로 위로 높게 뻗은 나무들은 그 길의 끝자락에 위치한 카마 성의 파사드(입구)로 관람객들을 인도하는 듯하다.
클림트는 부분적으로 단축법 또는 강한 원근법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과 풍경은 대체로 사실에 근거하여 정직하게 그렸다. 그는 이 작품에서 직선을 많이 사용하였고 새로운 화법을 개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이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두꺼운 윤곽선 안의 견고한 색채 구성에 의하여 단단한 느낌을 준다. 반면에 사용된 모든 색채들은 장식적인 요소를 띠고 있어 물체의 명확한 형체 표현과 장식을 구분하기는 힘들다. 선명한 윤곽선을 표현했던 이전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클림트의 후기 풍경화에서는 묘사화의 느낌보다는 색면화의 느낌이 더 강해진다. 이로써 클림트는 후기 풍경화를 통해 완벽한 현실과 관능적인 지각의 공존을 담아내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담과 이브(Adam and Eve), 1917, 캔버스에 유채, 173x60cm
팜 파탈의 역사는 먼저 문학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성경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첫 주인공은 바로 이브이다.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하는 이브의 유혹은 최초의 팜 파탈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클림트는 팜 파탈 시리즈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이브를 선택했다. 사실 이브는 최초의 팜 파탈 여성상이라고는 하지만 대다수 시각 작품에서는 아담과 함께 죄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클림트의 작품 <아담과 이브>에 등장하는 이브는 매우 당당하거니와 사뭇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클림트의 이브는 관람객이 있는 정면을 향해 작은 미소를 띠고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듯 여신의 형상으로 서 있다. 그 뒤의 아담은 이브와 똑같은 포즈로 눈을 감고 마치 이브의 그림자처럼 묵묵히 서 있다. 이 작품에서 이브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옆으로 젖힌 긴 목 등 팜 파탈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클림트의 독특한 팜 파탈 해석은 이브를 감싸고 있는 오브제들의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에로스를 상징하는 호피 무늬와 이브의 발밑에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다산의 상징 아네모네를 통해서, 이브는 비단 남성만이 아닌 인류 전체 타락의 근원이 될 만큼 파괴의 힘을 내재한 존재로서 표현되고 있다. 지금도 클림트의 이브는 한없이 무기력한 아담을 등 뒤에 잡아 둔 채 관람객을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보내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