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라벨 피아노 3중주 A단조(Ravel, Piano Trio A minor)

라라와복래 2015. 3. 26. 00:37

Ravel, Piano Trio A minor

라벨 피아노 3중주 A단조

Maurice Ravel

1875-1937

Amsterdam Chamber Soloists

Tijmen Huisingh, violin

Jan-Bastiaan Neven, cello

Thomas Beijer, piano

Muziekgebouw aan 't IJ, Amsterdam

2013.11.20


Amsterdam Chamber Soloists - Ravel, Piano Trio A minor

 

라벨은 드뷔시와 함께 이른바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출신 배경이 드뷔시나 동시대에 활동한 여러 프랑스 작곡가들과는 좀 다르다. 스위스 레만 호 인근 출신인 라벨의 아버지는 직업이 토목기사였다. 흔히 ‘시계는 스위스’라고 하는데, 라벨은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일을 깔끔하고 빈틈없이 처리하는 것이 몸에 배었던 사람이다. 그런 라벨을 보고 스트라빈스키는 그를 ‘스위스의 시계장인’이라고 빗대어 말했다.

라벨의 어머니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오래된 가문 출신이었다. 바스크 지방은 프랑스와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의 양쪽 지역을 가리킨다. 프랑스인 라벨이 <스페인 광시곡>, <볼레로> 등의 작품에서 스페인 취향을 확연히 드러낸 한 가지 배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프랑스 작곡가였고 프랑스의 음악언어와 문화와 정신의 아들이었다.

라벨은 태어난 지 3개월 정도 되어 파리로 왔다. 7세에 피아노, 화성, 작곡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2년 후에 파리 음악원 피아노 예비 클래스에 들어갔다. 1891년 샤를 드 베리오의 피아노 클래스로 진급해서는 에밀 페사르에게 화성학을 배웠다. 1897년에는 파리 음악원에서 가브리엘 포레의 제자로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편성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1901년부터 세 번이나 로마 대상에 도전했지만 연거푸 실패했고, 1905년에는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스캔들이 되어 파리 음악원 원장이 경질되기까지 했다. 그만큼 주위에서는 이미 라벨의 뛰어난 작곡 솜씨를 잘 알고 있었다.

<물의 희롱>, <셰헤라자데>, <거울> 등이 이미 그 시기에 씌어졌다. 1907년부터 1908년에는 <스페인 광시곡>이 작곡되었고, 1911년에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라 발스>까지 공개함으로써 서서히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혀 가고 있었으며, 이듬해에는 걸작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초연해서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17년 라벨은 삶의 지주였던 어머니를 잃게 되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결국 그의 만년은 질병과 어머니의 죽음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62세까지의 삶을 그리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 ◀수염을 기른 라벨, 1906년

세계대전의 불안 속에서 쓴 유서 같은 실내악곡

라벨의 유일한 피아노 3중주 a단조는 1914년 작품이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약 3년 전에 쓴 작품이다. 1914년은 아주 유명한 해다.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를 순방 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사건, 즉 1차 세계대전 발발의 빌미가 되는 사라예보 사건이 6월 28일에 일어났던 해가 바로 1914년이다.

장차 엄청난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징후를 모른 채 라벨은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 산맥, 자신이 태어난 곳과 가까운 휴양지 생 장 드 뤼즈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라벨에게는 편안한 휴식처로서 그곳만 한 곳이 없었는데, 그 조용한 산촌에서 편안한 여름휴가를 보내며 그는 바스크 풍의 주제를 가지고 피아노 협주곡을 쓰려고 악상을 다듬고 있었다. 피아노 3중주곡은 그가 당시 악상을 다듬고 있던 피아노 협주곡을 기초로 작곡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14년 여름은 라벨이 휴양지에서 시간을 보내며 한가로이 작품을 쓰고 있을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려주었다. 한창 피아노 3중주곡을 작곡하고 있을 때 전쟁 발발 소식이 휴양지에 급보로 당도했던 것이다. 당시 39세의 나이였지만 징병제 실시로 병역 의무를 지고 있었던 라벨은 군의 소집영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동원 명령을 받은 라벨은 5주 동안 피아노 3중주곡을 쓰는 데 매달렸다.

라벨의 평생 친구로 그의 음악 활동에 깊이 관여하며 라벨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뤼시앵 가르방은 당시 라벨이 “5주일 동안에 5개월 동안 해야 할 일을 모두 했다”고 전한다. 라벨이 불안한 전쟁터에 나가게 된다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창작 욕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피아노 3중주곡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전쟁터에 나가면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상념에 휩싸였을 때, 라벨은 종종 자신이 쓰고 있던 오선지가 유언장처럼 보였을 것이리라.

따라서 작품이 작곡가의 심리적 상태와 사회적 사건 등과 무관하다는, 가끔씩 들어맞는 그럴싸한 주장은 라벨의 피아노 3중주곡에서는 설득력을 잃는다. 이 작품에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 어두운 삶의 그림자와 멜랑콜리, 그러면서도 현실에 저항하는 열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대체로 이 작품의 외관은 뜨겁고 찬란하다.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라벨로 하여금 절망에 휩싸이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짧을 수도 있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찬가로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완성한 이듬해 1915년에 초연되었고, 파리 음악원의 푸가와 대위법 교수 앙드레 게달주에게 헌정되었다. 라벨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어로 적는 악장 표기를 프랑스어로 적어 놓았다.

샤를 드 베리오의 피아노 클래스. 맨 왼쪽의 학생이 라벨이다.

1악장: 모데레 (모데라토)

첫 악장부터 아주 매혹적이다.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인 1악장은 피아노가 아주 개성적인 리듬을 가진 주제를 조용하게 도입하면서 시작된다. 주제는 바스크 풍의 민요인데, 아름다운 오스티나토 저음부가 부드럽고 폭넓은 오른손 주제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진행된다. 피아노의 주제 제시가 끝나면 바이올린과 첼로가 유니슨으로 연주하면서 너른 옥타브로 뛰어오른다. 이때 느껴지는 음향의 분위기는 작곡가의 실내악곡에서 자주 보이는 라벨 특유의 것인데, 아마 스승 포레의 영향으로 습관화된 기교가 아닐까 싶다.

세 악기는 각기 자신의 영역에서 주제를 연주한 뒤 점차 격렬한 패시지로 진입한다. 전개부에서는 디베르티멘토(희유곡)와 유사한 짧은 악곡이 등장하고 피아노는 현악기들 사이를 다급히 오가면서 아르페지오 음률을 전개한다. 피아노가 주제를 연주하면 현이 트레몰로로 떨리고, 현악기가 주제를 연주하면 피아노가 아르페지오로 멋지게 장식되는 대목은 들을 때마다 흥미롭다. 뜨거운 열정으로 치닫는 피아노는 바스크 풍의 리듬으로 힘차게 노래하고 두 번째 주제가 재현되고 나서 멀리서 아련한 음률이 메아리치면 환상적인 악곡은 조용히 끝난다.

2악장: 판툼. 아세 비프 (아시이 비바체)

2악장은 ‘판툼(Pantoum)’으로 스케르초 악곡이다. ‘판툼’이란 두 개의 독립된 프레이즈가 나란히 노래되는 동남아시아 말레이 지방의 시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동양학자 에른스트 푸이네(Ernest Fouinet)가 프랑스어로 소개한 시 형식이며, 빅토르 위고도 자신의 <동방시집>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라벨의 음악에서 판툼은 중간부에 나오는 이국적인 코랄과 주요 스케르초 리듬이 병행 진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라벨은 이러한 동양 시 형식의 악곡을 스케르초와 트리오가 있는 악장에 위치시켰다. 피아노와 현악기의 겹리듬 진행, 생명력 넘치는 스케르초 음형의 발전이 매우 인상적인 악장이다. 코랄 부분은 4도 병행 진행과 낮은 음의 지속 덕분에 스케르초이지만 편안한 느낌을 준다.

3악장: 파사카이유. 트레 라르주 (몰토 라르고)

3악장은 ‘파사카이유(Pasacaille, 파사칼리아)’ 악곡이다. 8개 마디의 개시부는 이어지는 9개 변주곡의 기초가 되는데, 여기서 9개 변주곡이란 바로크 변주곡 형식인 파사카이유다. 흔히 파사카이유 악곡에서는 절정이 볼 만한데, 라벨의 음악에서도 그 에너지와 다이내믹이 압권이다. 변주 악곡은 약음기를 낀 바이올린과 첼로가 차례로 피아노의 저음부에 흡수되면서 마무리된다.

4악장: 피날. 아니메 (아니마토)

마지막 4악장은 주로 첫 악장의 주제를 수정해 가면서 전개된다. 피아노의 눈부신 활약이 특히 돋보이고, 화성도 깔끔하고 리듬도 아주 다이내믹하다. 음악언어의 두 분리된 요소들을 절묘하게 혼합하는 라벨 특유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악장이다.

Newbury Trio - Ravel, Piano Trio A minor

Arianna Warsaw-Fan, violin

Meta Weiss, cello

Henry Kramer, piano

The Conrad, Sherwood Aditorium, San Diego

2012.12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