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방식의 연주회입니다. 차이콥스키의 <사계> 각 달에 딸린 시구를 먼저 읽은 다음에 그 달의 곡을 연주합니다. 발렌티나 리시차(1973~ )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동안 투어 연주도 하고 리코딩 작업도 했으나 현재는 유투브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연주를 선보이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2012년에는 유투브 5천만 뷰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 짝꿍 연주를 자주 한다네요._라라와복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연작인 <사계>는 이 작곡가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교향곡이나 다른 협주곡에 가려져 있지만 그 음악적 가치는 재발견되고 있는데 계절의 변화와 시 그리고 음악이 매우 색다른 방식으로 어울리고 있다. <사계>는 출판업자이자 잡지 발행인이었던 니콜라이 베르나르드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매달 1일에 발행하던 음악잡지 누벨리스트에 싣기 위해 차이콥스키에게 위촉한 작품이다. 현재 이 작품의 기원과 관련하여 문서로 남아 있는 정보는 극히 드물다. 베르나르드와 차이콥스키가 이 위촉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서신 날짜는 1875년 말로 되어 있다.
매달 잡지에 실렸던 차이콥스키의 1년 사계절 연작
1875년 11월 24일, 차이콥스키는 출판업자인 니콜라이 베르나르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계> 연작을 쓰겠다는 답장을 보낸다.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에게 기꺼이 그토록 많은 작곡료를 주겠다는 당신의 배려에 대단히 감동받았습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열과 성을 다해 돕겠습니다. 첫 번째 곡, 어쩌면 그 다음 두세 곡을 더 간략하게 보내려 합니다. 여건만 맞는다면 곡들을 빨리 마무리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피아노곡을 쓰고 싶은 기분입니다. P. 차이콥스키로부터. 당신이 제안한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렵니다.”
1875년 12월 13/25일에 차이콥스키는 베르나르드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첫 두 곡을 우편으로 보낼 것입니다. 당신이 이 작품을 너무 길거나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진 않군요. 부디 솔직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그래야만 다음 곡들을 쓰는 동안 당신이 요청한 바를 마음속에 새겨둘 수 있을 테니까요. 만일 두 번째 작품이 적합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그러니까 다시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주저 없이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다음 번, 그러니까 1월 15일경에는 다른 곡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연작에 속한 나머지 곡들은 1876년 1월 23일과 2월 4일 차이콥스키가 베르나르드에게 쓴 편지에도 나타나 있듯이 아마도 1876년에 작곡되었을 것이다.
“오늘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나 면목이 없네요, 그래서 편지로 대신할까 합니다. 지금 200루블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돈이 없으면 여기서 살 수가 없습니다. 남은 작품들의 작곡료를 분할하여 지급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작품을 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때에 곡들을 받을 거라 기대하셔도 됩니다.”
작품 ‘3월’(3번)이 실려 있는 잡지 누벨리스트 3호는 2월 17일에 검열을 통과했다. ‘4월’(4번)이 소개된 4호는 1876년 3월 22일에, ‘5월’(5번)이 실린 5호는 4월 20일에 통과됐다. 뒤의 일곱 곡(‘뱃노래’부터 ‘크리스마스’까지)은 하나의 카피북에서 모두 찾을 수 있고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판업자는 각각의 곡마다 다양하게 메모를 해두었다(예를 들어 11월에는 ‘Nuvellist No.11’이라고 적혀 있다).
시구와 함께 소개된 피아노 작품 시리즈
‘뱃노래’(6월)는 1876년 5월 18일에 검열을 통과한 이 잡지 6호에 출판된 것으로 보아, 차이콥스키가 발레곡 <백조의 호수>를 완성한(4월 10일) 뒤 4월부터 이 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해서 늦어도 1876년 5월 15일에는 완성한 것으로 결론짓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확실히 차이콥스키는 5월 말에 우크라이나와 해외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곡들을 서둘러 완성했다. 1876년 10월 23일에 이 시리즈는 각각 출판하기 위한 검열을 통과했다. ◀이 곡은 봄부터 겨울까지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감정을 아름답게 형상화했다.
앞서 언급한 증거를 감안해볼 때 차이콥스키가 매달 앉아서 한 곡만 쓰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언급했던 편지 중 1875년 11월 24일 차이콥스키가 니콜라이 베르나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각 작품의 제목과 그에 따르는 시어들은 이 출판업자가 작곡가에게 제안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사계>는 1876년 누벨리스트지에서 처음 출판됐다. 출판에 앞서 1875년 12월호(통권 12호) 표지에 굵은 서체로 쓴 안내문이 실렸다. “유명한 작곡가 P. I. 차이콥스키, 내년 호에 본지를 위해 작곡한 피아노 작품 전곡 시리즈를 기고하겠다고 누벨리스트 편집자에게 약속하다. 작품의 성격은 완전히 곡의 제목들과 일치하며, 각 작품은 각 제목에 해당하는 달에 잡지에 게재될 것이다.”
그러나 누벨리스트에 출판될 때, 각 달의 명칭이 제목 앞에 주어지지는 않았었다. 필사본 악보를 보면 8번과 12번에 부제가 달려 있는데, 각각 ‘추수’(The Harvest, Scherzo)와 ‘크리스마스 무렵’(Christmas-Tide, Waltz)이라 되어 있다. 다음은 러시아판에 실려 있는 시구들 중 일부를 번역해 놓은 것인데, 모든 시구들은 출판인인 니콜라이 베르나르드가 직접 골랐다. 다만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러시아는 구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달력에서 약 12일 정도가 빠르다.
1월 난롯가에서 Au coin du feu
더없이 행복한 시간 한편에서
밤은 여명으로 옷을 갈아입네
작은 불씨 벽난로에서 타들어가고
양초는 모두 타버렸네 ―알렉산데르 푸시킨
2월 축제 Carnaval
활기 넘치는 참회의 화요일
머지않아 큰 축제가 벌어지리니 ―표트르 비야젬스키
3월 종달새의 노래 Chant de l'alouette
꽃들이 흐드러진 들판
하늘에는 별들이 소용돌이 치고,
종달새 노랫소리 푸른 심연을 채우네 ―아폴론 마이코프
4월 아네모네 Perce-neige
푸르고 순결한 아네모네 꽃
아마도 마지막이리.
지나간 고통 위로 떨구는 마지막 눈물방울들
그리고 또 다른 행복을 향한 첫 희망 ―아폴론 마이코프
5월 별이 빛나는 밤 Les nuits de mai
밤이도다!
세상천지에 축복을!
내 고향 북쪽 나라를 떠올린다.
얼음의 왕국으로부터
몰아치는 눈보라와 눈송이들,
5월은 얼마나 상쾌하고 산뜻하게 날아드는가! ―아파나시 페트
6월 뱃노래 Barcarolle
바다로 가자
신비로운 슬픔을 머금은 파도가
우리의 다리에 키스를 보낸다.
별들이 우리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알렉세이 플레시예프
7월 농부의 노래 Chant du faucheur
어깨를 들썩이고
팔을 흔들어라!
한낮의 바람이 얼굴을 감싼다! ―알렉세이 콜트소프
8월 추수 La moisson
곡식은 모두 익고
식구들은 다 자란 호밀을 베어낸다!
낟가리를 한데 모아
한 짐 가득 실은 마차의 노랫소리, 밤새 끊이질 않네. ―알렉세이 콜트소프
9월 사냥 La chasse
시간이 됐다!
뿔나팔 소리 드높도다!
사냥복을 입은 사냥꾼들, 말을 몰아 달린다.
이른 새벽 보로조이 뛰어다닌다. ―알렉산데르 푸시킨, 그라프 눌린
10월 가을의 노래 Chant d'automne
가을, 가련한 난초 위로 내려앉고
낙엽은 바람에 흩날린다. ―알렉세이 니코라예비치 톨스토이
11월 삼두마차 Troïka
삼두마차를 따라 달려 나가지도 마라.
곧장 마음을 억누르면 열망의 두려움이 마음속에 영원하리니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12월 크리스마스 Noël
외로울 땐 길을 돌아보지 마라
옛날 어느 크리스마스 밤 소녀들이 운명을 점치고 있었네
슬리퍼를 벗어 들고 문을 향해 던졌다네 ―바실리 주코프스키
Tchaikovsky, The Seasons, Op.37a
Olga Scheps, piano
Stadthalle Germering, München
2016.04.29
추천음반
1. 대부분이 러시아 계통의 피아니스트들이 주로 연주했지만 얼 와일드 같은 미국 피아니스트도 녹음을 남겼다. 만약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가 전곡을 리코딩했다면 첫 번째 선택이 되겠지만, 그는 몇 곡만을 녹음했다. 사실 전곡이라고 해도 음반 한 장에 고스란히 들어간다.
2.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멜로디아와 버진에서 남긴 두 번의 녹음은 각자 독특한 개성이 있다. 차이콥스키의 <사계> 연주에서 플레트뇨프는 첫 번째로 통과해야 할 문이다.
3. 예핌 브론프만(Sony)이 펼쳐 보인 감각의 제국은 대단히 특별한 감동을 준다. <사계>를 이토록 섬세하게 연주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4.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Decca)의 세련되고 서정적인 연주, 그리고 데니스 마추예프(Sony)의 미묘한 울림의 터치는 만화경처럼 다양한 차이콥스키의 <사계>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5.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Melodiya)가 가우크의 편곡판을 사용해서 소비에트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녹음은 작곡가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글 김효진(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스트라드>, <콰이어 & 오르간>, <코다> 등을 거쳐 현재 클래식 음반 잡지 <라 뮤지카>의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