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Beethoven, An die ferne Geliebte, Op.98)
라라와복래2015. 8. 2. 12:19
Beethoven, An die ferne Geliebte
베토벤 ‘멀리 있는 연인에게’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Dietrich Fischer-Dieskau, baritone
Jörg Demus, piano
Jesus-Christus-Kiche, Berlin
1966.04.14-18
Dietrich Fischer-Dieskau - Beethoven, An die ferne Geliebte, Op.98
연인과의 거리는 곧 망각으로 이어질까요? 아주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에게 물리적인 거리는 열정을 더욱 타오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죠. 아프로디테 여신의 여사제 헤로와 그를 사랑한 청년 레안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각각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 축제 때 헤로에게 반한 레안드로스는 밤마다 헤로를 만나기 위해 해협을 헤엄쳐 건너왔죠.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기도했습니다. “무사히 건너가 헤로의 웃는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돌아가는 길에 힘이 다해 물에 빠져죽는다 해도 결코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연인을 향한 그리움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이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는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헤로는 목숨 걸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연인의 바닷길을 비추기 위해 매일 밤 탑에 올라가 횃불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풍랑이 심한 어느 밤, 횃불이 비바람에 꺼졌고 레안드로스는 파도 속에서 길을 잃어 익사했습니다. 아침에 그의 시신이 해안으로 밀려오자 그 모습을 본 헤로는 바다로 뛰어내려 연인과 운명을 같이 했죠.
낭만주의 후배들을 앞지른 베토벤의 파격
1804년 교향곡 3번 ‘영웅’을 발표하면서부터 이후 1812년에 이르기까지 베토벤은 가장 왕성한 창작 시기를 보냈습니다. 교향곡 5번에서 8번까지,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등 베토벤을 대표하는 다수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죠. 하지만 베토벤은 1812년 ‘불멸의 연인에게’라는 수신인 미상의 편지를 쓴 이후로 한동안 창작 활동의 속도가 느려졌고, 청력을 상실해 좌절감이 깊어갔습니다. 이런 시기에 탄생한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에 깃든 독특한 낭만주의적 정서는 베토벤 연구자들로 하여금 그의 개인사와 이 음악을 연관 짓게 만들었지요. 이룰 수 없는 열정의 대상이었던 ‘불멸의 연인’을 생각하며 이처럼 간절한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었습니다. ▶레안드로스를 기다리는 헤로.
프라하 출신의 스물두 살 의학도 알로이스 야이텔레스는 1816년 베토벤에게 연작시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보냅니다. 젊은 감성으로 충만한 이 그리움의 시를 읽은 마흔여섯 살 베토벤은 언어의 아름다운 리듬과 정서에 매혹되어 이 작품을 연가곡으로 만들었죠. 1곡부터 6곡까지의 연주시간이 1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연가곡이지만, 베토벤은 이 하나의 작품으로 낭만주의 시대 리트의 후배들을 뛰어넘는 음악적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소나타 형식을 리트에서 구현하듯 연관과 대비의 테크닉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어떤 작품보다도 완결된 형식의 연가곡을 작곡했던 것입니다.
피아노는 곡과 곡 사이를 짧은 혹은 긴 피아노 솔로 멜로디로 연결해, 여섯 곡을 마치 하나의 통작가곡처럼 보이게 합니다. 특히 5곡 앞에 붙은 피아노의 카덴차 식 트릴과 느려지는 템포는 베토벤의 독창성을 명료하게 드러냅니다. 독일 리트의 최고 장인으로 불리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는 이 <멀리 있는 연인에게>에 “연가곡이라는 장르가 출발하는 시기에 가장 훌륭한 본보기가 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바쳤습니다. 멜로디가 단조롭고 부르기 쉬운 듯하지만, 형식면에서는 상당히 복합적이고 진보적이며 개성 가득한 작품입니다.
1곡
모두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이 연가곡의 첫 곡은 ‘언덕 위에 앉아 푸른 안개에 싸인 대지를 바라보네’(Auf dem Hügel sitz' ich spähend)입니다. 주인공인 젊은이는 언덕 위에 앉아, 예전에 연인을 처음으로 만났던 그 목장 길을 눈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산과 골짜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행복도 고통도 연인과 함께 나눌 수 없음을 젊은이는 탄식합니다. 시는 모두 다섯 연으로 나뉘는데, 멜로디는 거의 반복되며 유절가곡 형식을 보입니다.
그대에게 그토록 타오르듯 달려가는 내 눈길을 그대는 볼 수 없으니
그리고 우리를 갈라놓는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내 한숨도
그 무엇도 내 사랑을 그대에게 전해 줄 전령이 될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노래를 불러 내 고통을 그대에게 털어놓으리
사랑의 노래 앞에서는 모든 공간과 시간이 사라지는 법
그러면 내 사랑은 그대의 사랑에 닿을 수 있으리
2곡
그러나 두 번째 곡에서 분위기는 갑자기 몽환적인 성격으로 전환됩니다. ‘잿빛 안개를 뚫고 푸른 산들이 솟아 있는 곳, 태양이 눈부시게 타오르고 구름이 감도는 곳, 그곳에 있을 수 있다면!’(Wo die Berge so blau) 첫 연은 선명하고 격정이 담긴 멜로디로 시작하지만, 둘째 연으로 옮겨가면 성악부의 멜로디는 꿈결처럼 잦아듭니다. 마치 웅얼웅얼 잠꼬대를 하듯 한 음의 모노톤으로 가사를 읊조리죠. 연인이 있는 곳에 자신도 함께 있고 싶다는 간절한 꿈을 마치 꿈속에서처럼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파격은 베토벤이 이미 슈만 이후의 본격적인 낭만주의 가곡 형식을 앞질러갔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충족되지 않는 소망과 내면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세 번째 연에서는 다시 격정적인 톤으로 돌아갑니다.
3곡
3곡 ‘하늘 높이 떠가는 가벼운 구름’(Leichte Segler in den Höhen)에서 분위기는 다시 한 번 새롭게 바뀝니다. 피아노는 참으로 가벼운 걸음으로 주인공의 희망을 실어 나릅니다. 젊은이는 구름과 시냇물에게 연인을 향한 인사를 당부하죠. 또 수풀과 새들에게 자신의 슬픈 탄식을 연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4곡
4곡으로 가면 탄식은 곧 간절한 그리움과 희망으로 바뀌며 곡조는 경쾌해져 들뜬 감정을 표현합니다. 젊은이는 자연의 품에 자신의 사랑을 맡기며 자연을 통해 연인에게 닿고 싶은 소망을 노래하죠. “이 서풍은 장난스럽게 그대의 뺨과 가슴을 어루만지고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휘젓는데, 나도 그런 즐거움을 바람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5곡
그리고 5곡 ‘5월이 돌아와’(Es kehret der Maien)에서 젊은이는 천지에 봄이 왔는데도 자신은 연인과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다시 눈물로 탄식합니다.
6곡
마지막 6곡 ‘그대에게 부르는 이 노래들을 받아 주세요’(Nimm sie hin denn, diese Lieder)에서 주인공은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사랑을 노래가 이어주기를 희망합니다. “내 가득한 가슴에서 우러나온 이 노래를 그대가 불러주면 좋으리. 오로지 그리움만을 아는, 아무런 꾸밈없이 솟아나는 이 노래를.”
Beethoven, An die ferne Geliebte, Op.98
Fritz Wunderlich, tenor
Heinrich Schmidt, piano
Wien, 1963.05
추천음반
1. 프리츠 분덜리히
2.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3. 마티아스 괴르네
4. 올라프 베어
글 이용숙 (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