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퀸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작곡 부문 우승한 전민재

라라와복래 2010. 8. 9. 16:33

 

 

퀸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작곡 부문 우승한 전민재

   

지난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퀸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에서 작곡 부문 우승은 젊은 작곡가 전민재 씨에게 돌아갔다. 그는 이 대회 작곡 부문 역대 수상자 중 최연소 우승자로도 화제가 됐다. 차이코프스키콩쿠르, 쇼팽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이 콩쿠르의 입상은 당대 최고의 실력파로 인정받는 ‘보증수표’ 같은 의미. 앞으로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이 젊은 작곡가의 꿈은 음악의 순정을 찾는 일이다.

 [글 출처 : TOPClass 2010년 8월호 l 글쓴이 l 정은주 자유기고가]

 

듣는 이를 감동시키는 ‘살아 있는’ 현대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청년 작곡가’ 전민재(23) 씨를 만나기 위해 한 달을 기다렸다. 그는 콩쿠르 폐막 이후에도 서울행 비행기표를 끊지 않았다. “콩쿠르 입상자들의 기념연주회에 참석 중”이라며 그의 아버지인 화가 전준엽(57) 씨는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몇 번의 통화 끝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더위를 피해 카페에 들어갔는데 그는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는 뜨거워야 제 맛”이라며 자신의 커피 철학을 들려주는 그의 표정은 이번 콩쿠르의 우승작 <타깃>의 한 부분을 연상시켰다. “우승을 축하한다”는 인사에 “지금부터 시작이다”라고 답한 그는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라며 밝게 웃었다.

 

“기대는 전혀 안 했어요. 콩쿠르에서 기악 부문은 26세 이하 연주자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작곡은 30대 중반 이후 음악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거든요. 마침 지난해 여름방학 때 쓴 <타깃(Target)>이 콩쿠르가 제시한 여러 조건과 맞았고, 아버지께서도 이왕 쓴 작품이니 보내보라고 하셨죠. 결국 지난해 10월쯤 집에서 가까운 중앙우체국에 가서 악보를 부쳤어요. 그리고 정확히 두 달 후 벨기에에서 전화가 왔죠. 제가 우승했다고요.”

 

당시 콩쿠르 관계자는 그에게 한 가지 중요한 규칙을 전달했다. 바로 우승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피아노・바이올린・성악 부문은 3년마다, 작곡 부문은 격년으로 개최하는 퀸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이 콩쿠르의 특이한 점은 작곡을 제외한 부문의 결선 진출자는 선정된 작곡 부문 우승자의 작품을 1주일 동안 연습해 결선에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곡 부문 우승자가 알려질 경우 악보 유출 등 각종 구설수에 휘말릴 수 있어 우승의 조건으로 비밀 유지를 요구한다. 전민재 씨는 지난해 12월 초 우승 사실을 통보받고, 올해 5월 중순 콩쿠르 측이 공식 발표했으니 무려 6개월을 기다린 셈이다.

 

전민재는 피아노, 하프시코드 등 건반악기를 위한 작품을 즐겨 쓰며 직접 연주도 한다.

 

“우승보다 더 기뻤던 것은 제 작품을 걸출한 실력을 가진 연주자들이 연주한다는 점이었어요. 결선에서 12명의 피아니스트들이 각자의 색을 입혀 만든 <타깃>을 들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였으니까요.”

 

그렇다면 그의 의도를 가장 잘 꿰뚫어 표현한 피아니스트는 누구일까. 그는 “1위를 차지한 데니스 코츠킨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며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이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연주자가 작품에 대해 갖는 느낌이 그대로 청중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는 벨기에에서 머문 한 달 동안 열정적으로 결선 진출자들에게 <타깃>의 매력을 알렸다. 결선 진출자들의 모든 리허설에 참석해 크고 작은 의견을 제시했고,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타깃>은 표상이 무의미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금까지 무엇을 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주는 작품이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고요. 시작과 마지막 부분이 미술의 데칼코마니 기법처럼 같아요. 피아노가 찾는 타깃 음을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쫓고 쫓으며 시작하죠. 스산한 현악기의 음색에 불규칙한 타악기의 움직임이 섞이고, 피아노는 고음부와 저음부에서 불협화음을 연속적으로 처리해 공포감도 들죠.”

 

벨기에 파비올라 여왕의 초대로 성에서 열린 만찬에 콩쿠르 심사위원들과 함께 참석했던 그는 새로운 사람들을 사귄 게 이번 콩쿠르의 각별한 추억이라고 한다.

 

“현대음악은 초연과 동시에 마지막 연주가 되는 작품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산조’나 ‘수제천’ 같은 우리나라 전통음악,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서양의 고전음악은 아직도 수없이 연주되지요. 바로 음악이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다운 음악 속 이야기가 음악을 살려온 거죠.”

 

 

 

올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피아노 부문 5위에 입상한 피아니스트 김태형이 결선무대에서 <타깃>을 연주하고 있다.

 

전민재 씨는 “현대음악계는 음악이 가진 본연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시선을 끄는 수단은 화려해졌지만, 음악 본연의 목적인 감동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 오래도록 기억될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난 시대의 기법과 유산을 활용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음악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은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 때부터였다.

 

“다른 사람이 만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 재미없었어요. 제가 직접 곡을 쓰고 싶었죠. 악보를 그리는 방법과 기초 이론은 피아노 선생님께 배웠고요. 당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인 라모와 몬테베르디의 음악에 완전히 반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희귀 악보와 음반을 항상 구해다 주셨어요.”

 

퀸엘리자베스콩쿠르 입상자들과 함께. 전민재를 중심으로 왼쪽에 박종해, 김다솔, 오른쪽에 김태형, 선우예권이 보인다. 파비올라 왕비 오른쪽은 김규연.

 

여섯 살 꼬마였던 그는 어렵게 구한 대가들의 악보를 펼치고, 오선지에 그대로 그려 넣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으면 자신의 곡에 모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작곡의 매력을 느꼈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위해 작곡한 ‘왈츠’가 그의 첫 번째 작품. 각각 화가와 서예가인 그의 부모는 아들이 마음껏 재능을 발휘할 방법을 찾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홈스쿨링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부터 그는 작곡 공부에 몰두했는데, 현대음악가 스크리아빈과 서태지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다.

 

“아버지께서 전시회 준비를 위해 독일로 가시는데, 저도 따라갔어요. 뮌헨국립음대 작곡과 교수인 한스 위르겐 폰 보스를 찾아갔더니 저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면서 ‘지금처럼 계속 작곡해도 좋고, 기초를 다시 배우고 작곡해도 결과는 같을 텐데,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물으셨어요.”

 

파비올라 왕비와 인사를 나누는 전민재와 아버지 전준엽, 어머니 송설분

 

그는 보스 교수로부터 작곡의 기본기를 다시 익히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음악을 알게 된다. 계속 뮌헨에서 공부할까 고민하던 그는 귀국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감동을 주는 음악’이라는 순수한 목표로 돌아가자”를 모토로 선후배들과 함께 작곡단체 ‘아방가르드 서정적 숨’을 조직해 다양한 실험적 무대도 만들었다. 올 가을에는 실내악 프로그램 연주를 계획 중이다.

 

그는 “현대음악이 사람들로부터 멀어진 이유 중 하나는 작곡가가 직접 연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흐, 모차르트, 쇼팽 등은 작곡가이자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진 연주자였는데, 요즘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하는 작곡가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르간・피아노・하프시코드 등 건반악기 작품을 직접 연주한다.

 

“경복궁이나 부암동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해요. 학교는 꼭 가야 할 때만 가고요. 브뤼셀에 다녀온 후에는 과제 준비로 바빴어요. 졸업작품으로 오르간 곡을 쓰는 중이에요. 작곡할 때 별다른 징크스는 없지만 ‘이런 곡을 쓰고 있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면 그 작품을 절대 완성시키지 못했어요…. 아차!(웃음)”

 

그는 내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면 파리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다. 나라별로 특성이 있지만 “고전음악의 엄격한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파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을 누가 연주해줬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숨에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를 꼽았다. 피에르 불레즈는 작곡가 출신의 지휘자로 굉장한 카리스마로 유명한 음악가다. 그도 지휘를 배워 무대에 서고 싶은 꿈이 있다.

 

“가장 행복할 때는 훌륭한 작품을 들을 때예요. 감동을 받을 때죠. 제가 그러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음악가라는 사실이 가슴 벅찰 때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