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의 하이든에게 첫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생계를 위해 테레제에게 음악을 가르쳤는데, 어느새 깊은 사랑의 감정이 싹튼 것입니다. 그런데 테레제의 부모는 그녀를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하이든의 가슴앓이는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테레제도 하이든을 좋아했지만 결국 부모의 뜻에 따라 1755년 수녀원에 들어갔고, 이듬해 공식 서원식을 치릅니다. 하이든은 테레제의 수녀 서원식을 위해 <살베 레지나>(성모여, 우리를 구하소서) G단조를 작곡했고, 1756년 5월 12일 직접 지휘했습니다.
모든 것이 전능한 신의 뜻임을 받아들이고, 그녀가 택한 성스러운 길을 축복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신의 품으로 보내는 하이든의 아픔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녀에게 바치는 축하의 음악이지만 그녀의 마음도 하이든의 마음도 찢어집니다. 이 곡은 젊은 그들에게는 차라리 ‘레퀴엠’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눈물을 속으로 가라앉히고 의연한 동작으로 지휘하는 젊은 하이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이든은 이 곡의 악보에 1756년이라고 날짜를 써 넣고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이 작품에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강조라도 하듯 말입니다.(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28)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은 어릴 적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다 노래를 좋아했지요. 하이든은 8살 때 슈테판 대성당 소년합창단(지금의 빈 소년합창단)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배웠습니다. 그는 고음역의 수석 독창자가 됐고, 17살 때에는 그의 노래 실력에 감탄한 교장 선생님의 제안으로 ‘카스트라토’(거세된 남자 성악가)가 될 뻔한 적도 있습니다.
1741년 빈의 슈테판 대성당에서 열린 비발디의 장례식에서 9살 하이든은 다른 단원들과 함께 노래했습니다. 바흐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17살 하이든은 변성기가 와서 슈테판 대성당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요제프 하이든은 이제 노래하는 게 아니라 꽥꽥거리는군.” 하고 퉁명스레 말했다고 합니다.(<하이든, 그 삶과 음악> p.19) 아직 어린 하이든은 눈앞이 캄캄했겠지요. 그는 혼자 생계를 해결하고 음악 공부도 해야 하는 가난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로크 시대는 지나고 음악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훗날 하이든의 회상입니다. ▶빈의 슈테판 대성당
“목소리가 변성기에 이른 뒤, 나는 장장 8년 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비참한 삶을 이어 나가야 했다. 필요에 의해 일상의 빵을 벌어야 하는 비참한 사정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서 수많은 천재들이 망가지곤 했다. 내게도 똑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밤을 새워 작곡에 대한 열정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내 변변찮은 업적도 결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행히 포르포라, 메타스타지오 등 당대의 거장을 만나 제대로 작곡을 배울 수 있었고, 그들의 소개로 글루크, 바겐자일 등 중요한 작곡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짜는 없는 법,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 1686-1768)는 하이든을 고용하여 제자들 교습 때 피아노 반주를 시켰고, 여름휴가 때 젊은 하이든을 시종처럼 부려먹으며 까다로운 일을 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다시 하이든의 회상입니다. “포르포라는 전적으로 얼간이, 멍청이인데다가 행실이 개차반인 불한당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을 기꺼이 참아냈다. 노래와 작곡과 이탈리아어를 배웠으니 그에게서 얻은 게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하이든, 그 삶과 음악>, p.25)
1750년대 중반부터는 사정이 좀 나아졌습니다. 성당과 수녀원 등 여러 곳에서 지휘했고, 오르간을 연주했고, 특히 귀족 자제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작곡한 건반악기 소나타와 삼중주는 대부분 교습용 교재로, 제자들의 능력에 맞춰서 작곡한 것입니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p.27) 테레제를 위해 <살베 레지나>를 작곡한 이듬해인 1759년, 하이든은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의 궁정 음악감독이 됐습니다. 드디어 마음껏 작곡하는 일이 공식 임무가 된 것입니다. 한 해 동안 10곡이 넘는 교향곡, 그리고 건반악기 독주곡과 삼중주, 사중주 등 다양한 편성의 기악곡을 썼습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이든은 테레제가 수녀원에 들어간 5년 뒤인 1760년, 그녀의 언니 마리아 안나와 슈테판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사랑했던 테레제와 닮았기 때문에 마음이 끌린 걸까요?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고 합니다. 동생 테레제와는 작별이 불행이었지만 언니 마리아와는 만남이 불행이었군요. ▲하이든의 아내 마리아 안나
하이든은 젊은 시절에 고생은 했지만 장난을 좋아하는 쾌활한 청년이었고, 그의 이러한 온화하고 유쾌한 품성은 평생 음악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담고 있는 <살베 레지나>를 평생 간직했습니다. 바로크 시대가 끝나고 고전주의 시대가 시작할 무렵의 풍경입니다.
글 이채훈MBC 시사교양 PD로 30년 가까이 일하다 해직되었다. 역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리즈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추적했고,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 <정상의 음악가족 정트리오> 등 다수의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요즘은 ‘진실의 힘 음악여행’, ‘와락 음악교실’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에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이채훈의 마술피리 - 마음에서 마음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