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바그너 이야기

라라와복래 2009. 6. 10. 03:51

 

최인훈의 비유를 잠시 빌리자면, 브람스는 ‘밀실’의 음악가이고 바그너는 ‘광장’의 음악가다. 물론 그들의 밀실과 광장은, 소설 <광장> 속 이명준의 정치적 고뇌보다는 좀더 옅은 색의 문화적 자장이지만 말이다. ‘밀실’의 브람스도 <알토 랩소디>를 썼고 네 개의 교향곡을 썼으며 무엇보다 그로서는 매우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독일 레퀴엠>을 썼다. 하지만 그것이 혁신의 새 도시에서 이제껏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드라마틱한 음의 뭉치를 해일처럼 쏟아내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브람스의 많은 곡들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에 연원을 둔 것으로, 그를 고전주의자라고 할 때, 그것은 문화적인 보수주의자라는 뉘앙스를 깔고 있는 것이다. 물론 브람스는 저 자신의 비통한 생애와 파탄 지경의 유럽 시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뇌와 기도의 음악을 쓰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고독한 성채의 쓸쓸한 영주였다.  (좌: 음악적 전통주의자 브람스)


‘광장’의 바그너는 우선 19세기 중후반의 모든 문화예술을 거대한 솥단지에 넣고 펄펄 끓이고 우려내서, 전혀 새로운 양식의 총화로 신경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그 ‘혁신’은 부분적으로 기존의 모든 주류 관념을 부정하려는 정치적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그의 사후에, 그 혁신은 일부 왜곡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19세기 유럽 주류 문화예술 안에 거대한 다이너마이트를 창작하고는 마침내 그것을 폭발시켜 버렸다. 혁신이었다. 생각해 보라. 그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는, 무려 16시간 동안이나 진행되는 거대한 가상 세계다.

  

게다가 그의 인생 편력 역시 구도와 기도의 브람스와 달리 뛰어난 작곡가이자 흥행업자였고 노회한 정치력을 지닌 야심가였으며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저만의 왕국을 지어올린 오만한 지배자였다. 바그너는 종종 동료나 애인들에게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달성시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대체로 그의 야심대로 실현되었다. 바그너를 지지하고 옹호했던 당대의 음악가 한스 폰 뷜로는 아내 코지마까지 바그너에게 ‘빼앗기는’ 패배자의 역할을 맡았다.


19세기 초에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이미 국민국가의 발전을 시작하여 봉건제를 극복하고 국내 시장 개발과 왕성한 대외 진출에 나섰지만 독일(당시는 프로이센)은 300여 개의 영방으로 분열된 채 극심한 정치적 쟁투와 경제적 후진성에 시달리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수세기 동안 중세적 고립감에 빠져 있었다.  (우: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독일의 지식인을 고무시킨 사건은 프랑스 혁명이었다. 혁명 소식이 독일에 전해지자 괴테가 주창했던 세계시민 사상에 빠져 있던 지식인들은 혁명을 전적 환영하며 열광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고전주의적 교양에 젖어서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 맥락과 혁명의 진행과정을 면밀히 논구하지 못하고 그저 외형적으로 순진하게 파악하였을 뿐이었다.


이들은 혁명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양태로 다가오자 서둘러 냉담한 태도로 돌변하고 말았다. 더욱이 나폴레옹이 독일을 지배하게 되자 세계 시민 사상이라는 관념에 젖어 있던 독일인들은 유럽의 전황을 파악하고 일순간에 민족주의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는 프랑스에 맞서 독일을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국가 공동체를 희망하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이 열망을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비스마르크이다. 그는 1860년대에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배제하고 프로이센 중심으로 독일 통일을 이룩하려는 ‘소독일주의 노선’을 적극 추진하였다. 철혈 정책으로 유명한 그는 드디어 1870년에 보불 전쟁을 일으켜 나폴레옹에게 당한 독일 민족의 설움을 씻은 다음, 프랑스 권력의 상징 베르사유 궁전에서 당당히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에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가 배제되었으며 북독일 연방을 주축으로 남독일의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등을 결속시킨 형태가 되었다. 그가 이룩한 통일 독일은 1919년에 1차 대전을 종결짓는 조약에 따라 해체되는데, 이 조약이 바로 베르사유 조약이다. 같은 장소에서 시작되고 종결된 비스마르크의 독일, 이 시대를 표현하는 유일한 단어가 바로 민족주의이다.

 

 (좌: 철혈수상 비스마르크)


독일의 주요 지역은 대개 중부 유럽에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사에는 대체로 북유럽적인 신비스럽고 음울한 분위기가 잔뜩 배어 있다. 이를 반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문호 괴테의 지중해 여행인데, 괴테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일의 지식인들이 북구적인 음울함을 못견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유럽의 화사한 태양을 선망하곤 하였다. 고트프리트 벤의 ‘남국 이미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것이다.


확실히 독일 문화에는 어둠의 분위기가 칙칙하게 묻어 있다. 이 어둠의 문화가 자아내는 가장 큰 특징은 비현실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관념성, 낭만주의, 초월의식, 신비주의 등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북구적인 음울함을 대변하는 독일 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은 독일 문학의 거장들이 세기별로 웅변해 주고 있다. 자연과 윤리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위기감을 보다 고양된 이상향을 통해 구원받고자 한 횔덜린의 ‘히페리온’, 낭만적 초월의식의 상징인 노발리스의 ‘푸른 꽃’, 서구 철학의 오랜 전통인 이데아에 대한 거부를 보여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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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한 장면

  

바그너의 경악스런 대작들은 이런 맥락에 따를 때, 보다 선명하게 부각된다.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경찰 서기의 아들로 태어난 바그너는 출생 후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화가, 배우, 작가로 활동하던 루드비히 가이어를 의부로 맞았다. 아주 어릴 때 일이었으며 바그너는 루드비히를 친연적 관계를 맺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바그너는 예술 방면에 재질을 나타낼 수 있었다.


바그너는 음악의 첫 번째 행로에서부터 19세기 중엽을 풍미하던 이탈리아 오페라 대신 ‘악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화학 반응에 골몰하여 끝내 그 실험을 성공시켰다. 바그너는 모든 악극의 대본을 스스로 썼을 뿐만 아니라 무대 장치, 연출, 분장, 조명까지 직접 관장하면서 악극의 양식화를 선도하였다.


바그너는 음악어법에서도 모험을 감행하였는데 등장인물마다 특정한 동기를 부여하는 ‘시도동기(leitmotif)’와 대단히 유연하고 자유스러운 ‘반음계적 어법’이 바로 그것이다. 시도동기란 극 중의 특정 인물이나 사물, 또는 어떤 정서적인 상태나 이념이 처음으로 나타나거나 언급될 때 부여되는 특징적인 동기를 말한다. 바그너는 어떤 인물이나 상황이 재현될 때마다 특정 동기를 반복하여 극적 상황을 고조시켰으며 심지어는 해당 대상이 무대에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예의 동기를 변주함으로써 악극의 의미론적 맥락을 증폭시켰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의 한 장면

 

아래 영상은 바그너의 중기 작품군을 대표하는 악극 <탄호이저>의 서곡 대목이다. 이 서곡의 주제 선율은 주인공 탄호이저가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흐른다. 아래 영상은 주빈 메타가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1994년 뮌헨 국립극장에서 가진 실황으로, 19세기의 바그너 음악이 1백 년도 더 넘은 20세기 후반에도 얼마나 파격적인 실험으로 변용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쾌락의 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탄호이저 주위로 몰려드는 온갖 관능의 악령들이 이 악극이 매우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준다.




바그너는, 이 영상과 같은 악극을 통하여, 19세기까지 유럽을 지배해온 남서유럽의 정신을 부정하고 그것과 단절하며 북구 유럽의 민족주의와 신비주의 정신을 유감없이 펼쳐보이고자 했다. 13살 어린 나이에 라틴어로 된 <오디세이아>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읽곤 했던 바그너는 그리스 신화와 비극 및 북구의 전설에 평생 심취하였다. 시와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실은 청년 시절에 닥치는 대로 읽은 온갖 신화와 전설의 대부분이지만) 바그너는 셰익스피어나 괴테 같은 고전주의 작품까지 섭렵하여 ‘문학의 음악화’를 통한 독일 정신의 구현에 필생을 걸었다.


이러한 작업의 백미가 바로 필생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다. 이 작품은 4일에 걸쳐 상연되는 4부작으로 오페라와 악극, 아니 거의 모든 시간 예술 중에서 가장 긴 작품에 해당할 것이다(19시간 가까이 똑같은 멜로디를 정확히 840번이나 반복하여 연주하는 ‘짜증’이라는 제목의 에릭 사티 피아노 곡이 있지만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 중 '발퀴레'의 한 장면

  

악극 <니벨룽의 반지>는 1200년에서 1204년 사이에 씌어진 영웅 무훈담 <니벨룽의 노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세의 가장 침통한 시절에 음유시인들이 유랑하면서 부른 영웅 무훈담이다. 방대하고 남성적인 무훈가는 성지 순례와 십자군 원정의 주변에 있던 여관, 교회, 장터 등지에서 생성되어 11세기에 완성된다. 대개 기독교 성지의 유래와 성자의 유물들, 거대한 무덤과 거기에 묻힌 영주와 군사들의 용맹담이 소재가 되었는데, 프랑스 쪽에서는 <롤랑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바그너는 기독교 문명의 대표작인 <롤랑의 노래> 대신 북구 전설과 이교도적인 이미지로 가득찬 <니벨룽의 노래>를 필생의 작업으로 선택하였다. 이 점만으로도 바그너 음악의 주제를 알아차릴 수 있다. <니벨룽의 노래>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이 집단적인 파멸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롤랑의 노래>와 같은 영웅적 무훈담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독일 민족 특유의 강인함이 배어 있는 이 무훈담에는 대단히 신비적이고 음울하며 가히 운명론적인 비극에 가까운 분위기가 깔려 있다.

 

바그너 음악의 성채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바그너는 이 신비성을 <니벨룽의 반지>에서 극적으로 고양시키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장대하고 용감한 활약을 거듭 선보이고 있지만 그러나 그 의지의 원천은 개별 인물들의 개인적 충성심이나 용맹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러나 운명론적으로 관련 맺는 어떤 숭고한 힘에서 터져 나온다. 주인공 지그프리트의 보검이 바로 그것이다.


바그너는 자신이 이룩한 악극 양식 속에 수세기 동안 전해져 온 독일 영웅 무훈담과 북구 전설의 신비성을 총체적으로 결합시켜 세기말의 독일 민족주의에 부응하는 새로운 기운을 고양시켰던 것이다. 독일 문화사를 지배해 온 음울하고 원천적인 신비성은 바그너에 의해 총합되었으며 이는 곧 독일 민족이 경험한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음악적으로 체현한 결과가 되기도 하다.

 

바그너 후손들과 함께 하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그것은, 바그너에게 직접적으로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20세기의 새로운 오욕으로 이어졌다. 독일 민족주의와 문화적 신비주의, 이 양자를 탁월하게 총체화했던 바그너의 음악은, 안타깝게도 히틀러 파시즘으로 왜곡된 바 있지만, 어쩌면 그 광란 역시 바그너 음악 속에 잠재된 또 하나의 핵심이기도 했던 것이다.


바그너는, 생전에 자신의 악극을 가장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지었다. 그것이 독일 바이에른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의 ‘축제극장’이다. 그는 1876년이 이 극장을 완성하고,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에 올렸다. 1882년에는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을 상연했으며 1883년 2월 13일에 70살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해마다 이곳에서 바그너 음악제가 열린다. 만약 오늘 <니벨룽의 반지>를 예매한다면, 7~8년쯤 후의 표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2005년 9월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단과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하여 <니벨룽의 반지>를 올렸을 때, 필사적으로 가서 그것을 보았다. 4부작 전체가 무대에 올려진 것은 그것이 국내 초연이었다. 그런데, 게르기예프는 무대를 너무 ‘미니멀’하게 차렸다. 고문이었다. 하루 저녁에 4시간짜리 하나씩, 그 나흘 동안, 밀린 잠을 보충하였으나 고개가 많이 아팠다.


아래 영상은, <니벨룽의 반지>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발퀴레’의 한 대목이 절묘하게 사용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한 장면이다. 전쟁광 킬코어 대령이 바그너 음악을 틀면서 베트남의 작은 마을을 공습한다.


 

 

 

사랑과 구원

트리스탄과 이졸데 |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 도이치 그라모폰


원래 이 이야기는, 켈트족의 전설이 변용된 것으로 12세기 중엽에 프랑스에서 완전한 이야기로 엮어졌으며 그 이후 전 유럽 연애 예술의 핵심 소재가 되었다. 불멸의 사랑과 강렬한 죽음의 충동이 이중주를 빚어낸다. 다양하게 변주되었으나 바그너는 그것을 ‘운명성’으로 집중하였다. 인간을 구속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그것에 속박 당하는, 뭔가 기이한 힘이 인간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에 대한 이중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19세기 시민 사회에 이 작품은 짜릿한 흥분을 주었다. 다니엘 바렌보임의 dvd로 골랐다. 아무래도 ‘악극’이니까.


 

파멸과 구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 볼프강 자발리쉬 지휘 | 도이치 그라모폰


이 악극은 바그너의 초기 작품이다. 그래서 등장 인물들이 집단 파멸로 가지 않고, 맨 마지막에서는 구원의 상승을 한다. 그럼에도 죽음을 통한 구원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한 세계가 멸하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니벨룽의 반지>, 반기독교적 신비주의로 가득찬 <파르지팔> 같은 후대의 걸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앞대목에서 여주인공 젠타의 아리아를 들으면, 아 오페라의 여주인공 아리아가 꼭 매혹적인 게 아니라 악몽에 시달리는 귀기어린 호소일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하게 된다. 이 곡의 음반으로는 칼 뵘이나 오토 클렘페러(강추!)가 우선 꼽히지만, 만약 당신이 초심자라면 아무래도 dvd를 봐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dvd 타이틀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볼프강 자발리쉬는 이런 조건들 속에서 선택할 만한 작품이다.


 

버나드 쇼가 들려주는 반지 이야기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 버나드 쇼 지음 | 유향란 옮김 | 이너북


<니벨룽의 반지>는,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구성된 4부작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과 일면 흡사하다. 라인강 밑바닥에서 세 처녀가 지키고 있던 황금, 그것을 누군가 훔쳐 반지를 만들게 되고, 그 반지를 끼게 되는 사람은 모두 파멸에 이른다는 모티브로 시작한다. 신까지 포함하여, 모든 구세계가 붕괴한다. 버나드 쇼가 할 말이 많은 작품이다. 철학자이며 작가이고 무엇보다 당대의 뛰어난 음악평론가인 버나드 쇼는 이 책에서, 유감없는 말과 해석의 성찬을 보여준다. 이 책 말고도 <니벨룽의 반지>를 해석하거나 소개하거나 이 작품에 녹아 있는 바그너 사상을 알려주는 책들이 적지 않다.


[원문 출처 : 오마이뉴스 블로그 <정윤수의 BOOKing 365> 200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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