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눈발이 날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해 지고 어스름 깔릴 때 느끼던 우주의 장막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만 영원성을 잃은 게 아니라 눈, 비, 바람도 장구한 기운을 잃었나봐요. 아무리 추워도 동장군의 기세가 두렵기보다 그냥 구차스러워지는 거예요.
고은 한반도 기후의 정석으로 오랫동안 삼한사온이 있어 왔는데 요즘의 동북아시아 기후변동으로 기온의 난조를 보여 왔어. 아열대의 북상 현상이 뚜렷한 한편 겨울의 충동적인 혹한도 지구온난화라는 재앙과는 또 다른 불청객으로 닥쳐오기도 하지. 이런 판이라 어쩌다 오랜만의 삼한사온의 기온이 있다 싶으면 마치 저승의 조상들을 만난 느낌도 드네 그려.
김형수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해바라기를 하는 사람은 남극의 펭귄들과 동시대인 같아요. 태양 아래 놓여 있고자 하는 모습이 영원 속의 한 지점을 차지한 형국이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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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임옥상 화백
고은 이런 따뜻한 풍경화에서 불현듯 깨달은 것은 따뜻함도 그냥 따뜻한 것이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차가움이 녹아서 이루어진 따뜻함이 아닌가 하는 것이며 또 그 따뜻함이란 지난 여름 폭염의 뜨거움이 식어서 남겨진 그 따뜻함이 아닌가 하는 그것 말일세. 그러니까 따뜻함에도 따뜻함의 역사가 들어 있지 않겠나. 그래서 이런 시적인 정서를 지난날의 연대기에도 채색해보고 싶어지네. 따뜻함이란 어머니의 체온 같은 것인데, 어머니만한 역사의 실체가 어디 있겠는가.
김형수 또다시 영감을 깨우십니다. “따뜻함에도 따뜻함의 역사가 들어 있다!” 어머니의 체내 온도가 생명의 온도이자 그리움의 온도라는 상상을 전에는 못해봤어요. 그곳에서 한 목숨이 이름을 얻어 나오는 순간 얻게 될 막막한 세계가 떠오릅니다.
고은 하지만 내가 문자 이전의 모국어의 터전에서 생득적인 시기를 지나 문자 언어로서의 학습 과정에 들어서자마자 내 이름마저 바뀌는 소위 창씨개명이 동시적으로 진행될 때의 그 낯선 체험은 아직도 희끄무레해지지 않는다네. 말하자면 내가 한 인간으로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식자(識者)의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그 언어의 자연 상태가 강제의 대상으로 깨어져버렸어. 게다가 한평생의 내 존재를 지속적으로 증명하는 성명이 바뀌게 되는 이변을 만나게 된 것이지. 비극 중의 비극이야.
김형수 누구나 겪게 되는 세파의 첫 경험이 문학적 자아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인 결손이 되었네요. 창씨개명 하나로 생득된 세계와 장차 학습해갈 세계의 불일치가 노정된 것 아닙니까?
고은 일본의 전시체제는 조선·대만 등의 식민지, 그리고 표면상 청나라를 계승한 만주 전역에 걸쳐서 그들이 말하는 대동아권을 망라했어. 그러니까 만주에서의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것도 그 대동아의 한 단위가 된 것이지. 이미 중국 본토의 동부 주요 도시도 점령한 터였고 특히 남경대학살의 만행으로 일본군은 동아시아 전체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어. 그 학살의 현장에다 일본은 뻔뻔스레 친일 중국 정권을 세우지. 그 정부를 흔히 위정부(僞政府)라 하고 그 우두머리가 왕조명(汪兆銘)이었어. 나중에 중국 사람들이 한간(漢奸)이라 해서 중국의 역적이고 친일 악질분자라고 규탄하는 인물 중의 하나였지.
김형수 그 시절 문학의 환경은 어땠습니까? 저희가 설화적으로 전해들은 바와 당대가 경험했던 사실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것을 말씀 중에 자주 깨닫곤 합니다.
고은 일본군은 중국뿐 아니라 필리핀과 동남아의 싱가포르와 자바, 그리고 불령(佛領) 인도차이나의 베트남과 버마까지 쳐들어갔어. 일본 본토는 날마다 승전고를 두들겨대는 분위기로 뜨거웠어. 심지어 일본 문단의 비평계 대부인 고바야시(小林秀雄)는 나도 전시에는 붓대를 꺾고 총을 들겠다고 외쳤고, 심지어는 아쿠다가와상(茶川賞) 수상자로 중국 상해, 남경 일대의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종군작가인 ‘보리의 병사(兵士)’ 작자한테 가서 그 전선의 한 현장에서 상장을 수여하기까지 했어. 문학의 전선화인 셈이지.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광수는 전쟁을 찬양하는 문학론을 발표했는데 홍명희가 그것을 반박했어. 세계적 시야를 아우른 반전평화의 문학론을 당당하게 펴냈어. 이때부터 모윤숙, 노천명의 대동아 승전시들이 이어지지.
김형수 문학과의 전쟁이 시작되는군요. 그 끝자락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홍명희의 <임꺽정>이 없었다면 그런 치열한 가치관도 얼마나 추상적이게 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분들의 자리에서 ‘어린 나그네’는 아직 먼 곳에 서 있지요?
고은 그 당시 신문이나 잡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내 고향 두메에서는 뜬소문이나 가뭇없는 풍문 따위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뒤늦게 짐작하게 되었지. 어쩌다 마을을 드나드는 등짐장수나 행상, 그리고 항구에서 온 사람의 입을 통한 소식 조각들인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김일성이란 사람의 신출귀몰하는 독립군 이야기였어. 1937년 5월의 보천보 사건이 동아일보 등에 기사로 난 것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온 것이지. 그런 소문의 하나로는 함경도 일대는 독립군이 차지했다는 것이었어. 이어서 서양에서도 커다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들려왔지. 독일의 폴란드 점령이 있게 되자 영국,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한 것이지.
김형수 북방의 풍문이 먼 남쪽 해변까지 드나들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한국인의 상상력을 토막 낸 주범이 분단이라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어요. 시베리아 출신 기러기만 오가는 게 아니라 그곳의 문화도, 이야기도 뒤따르기 마련인데, 언제부터인지 삼엄한 분계선이 가로막아 다들 자폐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고은 1940년 초 조선총독부는 소위 황민화 정책 첫 과제로 조선인 전체에게 성명을 일본 성명으로 바꾸는 창씨 제도를 시행했어.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하나이므로 마땅히 성과 이름도 일본의 그것으로 통일한다는 것이었어. 그런데 명치(明治) 초년까지 일본인 대부분이 성이 없었어. 아마 1872년 명치 5년에 모든 국민들이 부랴부랴 성씨를 붙였던 모양이야. 그래서 영국의 성받이가 대장간 사람이면 스미스이고, 과자나 빵 굽는 집이면 베이커이듯이 밭두렁에 사는 사람이면 다나카(田中)이고, 시냇가이면 호소가와(細川)이고 나무그늘에 사는 사람이면 기노시다(木下)였던 것이지. 물론 오래된 상류 지배층 가문의 성씨로는 후지와라(藤原) 따위가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에야 성씨가 붙은 것이지. 일본인들은 성씨를 필요에 따라 곧잘 바꿔도 되었어. 쉬운 예로 전후 일본 수상 가운데 기시(岸)와 사토(佐藤)는 형제간인데 처가 성씨를 따른 셈으로 성씨가 다르지.
김형수 일본은 부계 전통이 취약했을까요? 성씨가 희미해지면 근친 식별도 희미해지죠. 그런 건 주로 외침을 겪는 집단이 앓는 후유증인데 말입니다.
고은 반면 한국인의 성씨는 임진왜란 이후의 성씨 대란을 겪은 뒤 성씨의 판도가 뒤죽박죽이 되기도 했으나 자신의 혈통 명분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성씨야말로 절대의 기호였어. 한국인은 고구려 때부터 성씨가 있었다 하거니와 고대 당나라 성씨 제도가 본격적으로 건너온 이래로 도리어 중국의 그것보다 더 수직적인 보수성을 강화해 왔어. 그래서 한 인간의 인격을 내걸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때 “내가 성을 갈겠다”는 비장한 어조가 되지. 그뿐 아니라 한국인의 벌열(閥閱) 의식에서 지연, 학연 못지않게 혈연이 작용할 경우 그 종친 지상주의는 거의 종교적이기까지 하지. 한국인은 피의 족속이야. 이것이 단일민족론의 순혈주의로까지 나아가는 셈이야.
김형수 ‘피의 족속’이라 하시니 “성을 갈겠다”는 말이 참 비장하게 들리네요. 창씨개명의 무게감도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고은 이런 조선 후기 이래 완고해진 성씨 풍토에서 성을 갈고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한말 통감부 시절의 단발령 저항보다 더 맹렬할 판이었으나 워낙 일제의 구조적인 강압이 심해서 얼마간의 저항 말고는 수군수군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어.
김형수 궁금한데요, 성씨가 바뀐다 해도 혈연집단이 해체되지 않는 한 표현이 달라질 뿐 뼈다귀의 역사는 동일한 것 아닙니까?
고은 한국인에게 성씨란 그야말로 생명의 대명사였어. 이런 판에서 우리 고씨도 씨족 전체가 아닌 고을이나 마을 단위의 씨족끼리 정한 일본식 성씨가 만들어졌어. 종조부가 고씨의 고에 선영의 소나무 숲을 뜻하는 수풀 림(林)자를 붙여서 ‘다카바야시’라는 성을 제안했지. 그래서 다른 지역의 ‘다카다(高田)’ ‘다카하라(高原)’ ‘다카야마(高山)’ ‘다카하시(高橋)’ ‘다카무라(高村)’ 등과는 다른 성씨가 되었지.
김형수 아하!
고은 사실 일본인의 성씨 중에 다카무라(高村) 다카이(高井) 다카키(高木)가 있어서 그 흉내를 낸 것인지 몰라. 뒷날에야 들은 것이지만 강제로 성씨 바꾸는 일 때문에 끝내 성씨를 바꾸는 대신 조상에 대한 면목이 없다 해서 자결하는 이도 하나둘도 아니었어.
김형수 엊그제 <아마존>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원시 부족 내부의 사생활, 즉 사내들이 바람을 피우는 이야기가 아주 잘 그려져 있었습니다. 남녀상열지사가 부자유스럽지도 않고, 그 외 생로병사에 속하는 것들도 모두 갖춰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오토바이 한 대가 닿는 순간 그들의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강자들의 소위 문명, 제도 속의 장치들이 약자에게 얼마나 큰 폭력이 되는지 몰라요.
고은 우선 성씨를 바꾸지 않으면 역적에 해당되는 ‘비국민(非國民)’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학교 입학도 취직도 되지 않았지. 한용운이 늦게 낳은 딸 영숙이를 성과 이름도 바꾸지 않고 숫제 학교에 보내지 않은 저항의지 밖에서는 식민지 조선인의 불이익은 어디 하나 허술한 데가 없이 생존 전체를 위협하고 있었지. 그런데 본디 조선총독부는 같은 식민지의 경우라도 대만이나 류쿠(오키나와)와는 달리 조선인은 일본화될 수 없다는 초기의 판단으로 나아갔어. 이는 이미 합방이 되자마자 일진회 계열의 친일분자가 자발적으로 조선인도 일본인 성씨와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도리어 총독부 쪽에서 만류한 사실과도 맥락이 닿는 일이었어. 아니 합방 이전부터 일본의 하오리를 걸치고 게다를 신고 거리를 나다니는 쪽발이 시늉을 하는 사람도 있었네. 그것이 1930년대 문학평론가 김문집(金文輯)의 행태로 이어진 것이지.
김형수 김문집은 모르는 이름입니다. 행실이 칠칠치 못한 지식인이었나 봐요.
고은 1910년대 총독부 교육정책 실무자 스미모토(隅本繁吉)는 동화 불가능성을 확인하고 오직 식민지 피지배자로서의 ‘순량화(順良化)’만을 내세웠어. 이런 간접 통치정책이 전시체제 통치정책으로 전환되었겠지. 사실 조선총독은 일본의 칙임관(勅任官)으로서 일본 내각의 권한 밖이어서 ‘작은 천황’이기도 했어. 그래서 조선총독은 일본 총리대신 급으로 조선총독을 거치면 총리가 되거나 총리였다가 총독으로 재임명되거나 했지.
김형수 무단통치가 문화정치를 거쳐 전시체제로 옮겨가는 동안 선생님은 일본 학동이 되신 겁니까?
고은 나는 고씨가 아니라 ‘다카바야시’라는 성씨가 되고 이름도 마치 일본 사무라이 냄새가 풍기는 도라스케(虎助)가 되었어. 내가 3학년 때 일본인 여교사는 도라스케의 가운데에 ‘노(之)’를 끼워넣어서 ‘도라노스케’라는 애칭으로 부르기까지 했지. 그러니까 나는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서당 학동시절부터 신분상으로는 일본인 이름을 달고 있었지.
김형수 성씨란, 부계 전통에 의한 것이지만 낱낱의 인간에게 장구한 시간을 부여하는데요.
고은 1940년은 마침 일본 신화 속의 개조(開祖)인 신무(神武) 천황의 즉위 2600주년이 되는 해이자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해이므로 국력 과시와 군국주의 선양의 축제로 식민지의 방방곡곡까지 일본 국기가 휘날려야 했네. 일본 연호로는 쇼와(昭和) 16년이었어.
김형수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
고은 우리 동네는 김씨의 ‘가네다(金田)’ ‘가네무라(金村)’가 있고 박씨의 기무라(木村)가 있었지. 조씨는 도요하라(豊原)였고, 문씨는 히라바야시(平林)였어. 그런데 조선인이라도 일본에 모범적으로 순응하는 인사 가운데서 최남선 같은 사람은 성명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일제 말기까지 친일 지도자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어. 또한 이광수(그림)는 누구 못지않게 가장 앞장서서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香山光郞)’라 짓고 무척이나 행복해했어. 매일신보 신문지상에 그 진지한 소감을 써냈지. 이광수라는 이름도 그가 조선 말기 문부대신이 될 꿈을 접고 계몽문학에 나설 무렵 본명 보경(寶鏡)을 조선 후기 시인 신광수(申光洙)의 이름을 따다가 바꾼 것이었지.
김형수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오솔길이 있는지, 이광수는 북한에서도 나중에 문학적 복권을 얻게 되더라고요.
고은 식민지 경영이라고 말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가 인도야말로 대영제국의 비즈니스라고 말한 대로 영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대륙이 영연방이 뒤덮인 그런 제국주의였으나 가령 인도를 영국화하기보다 영국과의 차별화를 통해서 지배했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지배도 베트남의 프랑스화를 밀어붙이지 않고 그 저항만을 잠재우는 지배 방식이었어. 일본의 조선 통치는 어떤 식민지 체제와도 비교될 수 없는 폭력지배였고 성씨와 이름까지도 빼앗아버리는 악랄한 인간개조까지 목표로 세웠던 것이지. 미국에의 전쟁 선포도 어느 날 공명정대하게 한 것도 아니지. 일본 열도에서 태평양 복판에 떠 있는 6000km 저쪽의 하와이 군항의 미국 태평양 함대 여러 척의 초대형 해군력을 그야말로 도둑처럼 급습하고 나서 사후 선포를 한 것이지. 그런데 당시의 한 자료연구는 미국이 일본의 전쟁을 부추겼다는 주장도 하더군.
김형수 그 어수선한 세계의 모퉁이에서 저물어가는 강압적 근대의 풍경이 소년에게는 참으로 삭막했을 것 같습니다.
고은 이런 전시체제라 조선에도 광적으로 일본 군신(軍神)들을 경배, 찬양케 했어. 먼저 근대 일본의 육군 지도자인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노기(乃木) 대장과 러일전쟁 당시의 여순상륙작전 때 전사한 히로세(廣瀨) 중좌에 이어 하와이 진주만 폭격 당시 미국 쪽의 뒤늦은 대공 포화에 맞아 전사한 장교 9명의 ‘영령(英靈)’이야말로 천황 다음으로 고개 숙여 묵념을 바치는 대상이었어. 일본에는 고대 신뿐 아니라 이처럼 당대의 신도 양산되고 있었어.
김형수 ‘생명은 주어가 아니라 술어이며 주체이기보다 행위’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일본은 조선 사람의 주어이자 주체인 것들을 온통 천황의 현신으로 조작하고 말았으니, 섬사람들의 숙명이 그렇게 집요한 기질을 만들었는지, 하여튼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아직도 아시아의 딜레마가 되고 있습니다.
고은 그래서 학교 조회시간에는 천황의 거처인 동경 니주바시(二重橋) 쪽을 향해서 90도로 허리를 꺾어 요배를 했어. 일본어로 그것을 사이게이레이(最敬禮)라 했어. 우리로 치면 큰절인 셈이지. 또 낮 12시에는 누구나 서 있는 그 자리에서 5분간 고개 숙여 묵념의 부동자세를 실시했어. 이러다 중학과정 수업에서 조선어 시간을 없애버렸어. 그것이 초등학교까지 강행하는 데는 1~2년이 좀 더 걸렸어. 모국어의 암흑시대가 그렇게 오고 있었어.
김형수 1980년대 벽두였어요. 5·18을 겪고 이제 막 세계에 눈을 떠가던 무렵에 ‘민중’이라는 무크지에서 선생님이 쓴 ‘별’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한반도는 초강국들의 ‘핵 볼모’가 되려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신 그 사회비평지의 창간 서시로 게재된 작품입니다. 부제가 ‘제3세계 젊은이들에게’였는데, 나중에 뒤져보니 전집에도 수록돼 있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마뜩찮으셨을지 모르지만 제게는 얼마나 광활한 대지의 호흡을 안겨주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매번 국제적 환경을 묘사하는 걸 들으면서 저 같은 시야를 어디에서 얻으셨을까 한없이 압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