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23) 때로 한자·알파벳이 싫증나면 아랍 문자에 사로잡히곤 하지

라라와복래 2012. 3. 3. 11:01

[고은과의 대화](23) 양 세기의 달빛

때로 한자·알파벳이 싫증나면 아랍 문자에 사로잡히곤 하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문자는 사람의 마음을 데생하는 그림 같습니다. 소통의 기호에 발신자의 숨결이 담겨 있어요. 티셔츠 무늬의 걸작들도 각종 문자들입니다. 글씨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은 대단한 발명 같아요. 특히 형상 기호로 위세를 떨친 게 한자 말고 또 있을까요?


고은 그런데 말이네, 아랍 문자가 한자 못지않게 서예와 서도의 문자로서도 절묘한 문자 형태더군. 언젠가 라틴아메리카의 국제행사 때 어느 유서 깊은 도시의 호화 주택가를 지나다가 한 집 대문 전체를 아랍 문자의 서예로 장식한 것을 보고 ‘야 이것 왕희지체나 구양수체 따위와는 전혀 다른 서도의 한 극치로다’ 하고 감탄한 적이 있다네. 석봉이나 추사가 아니 고대의 김생이 이런 아랍 문자를 만났다면 또 다른 조선 서도의 진경(進境)을 남겼을 터였지.


김형수 미술사학자 이태호 선생이 ‘개조심체’라고 명명하던 글씨가 떠오릅니다. 호남의 어느 시골집에서 발견했는데 민예의 품격이 느껴져 얻어왔대요. 제가 문단에 나왔을 때도 학교에서 배운 바와 전혀 다른 서체가 많이 돌았습니다. ‘문학의 실천, 실천의 문학’ 같은 문구들인데, 선생님이 쓰신 거예요.

                       그림 임옥상 화백


고은 나는 한자나 라틴 문자 계열의 익숙한 형태에 싫증이 날 때면 아랍 문자의 그 밑도 끝도 없는 듯한 무용(舞踊) 같은 이슬람 세계의 고혹성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네. 그래서 내가 이따금씩 끄적여보는 붓글씨체의 그 수직서체 탈피라 할 사행체(蛇行體)의 유동성을 감히 꿈꾸어보기도 한다네.


김형수 바위에 새겨진 비문을 고대 서예로 봐도 될까요?


고은 선사시대의 화석에도 흔적화석이 있지. 서예 그대로더군. 그런데 아랍 문자는 유난히 상고시대 신성문자 의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모양이네. 가로대 ‘신(알라)이 선을 그으시고 인간이 점을 찍었노라. 그리하여 아랍 문자가 쓰이기 시작했노라’라는 투로 말이네.


김형수 재작년에 거란 소문자를 찾는 한·몽골 학자들과 유라시아 고원을 보름이나 누비고 다녔습니다. 문명과 오래 격리된 바위벽에서 거란, 돌궐, 위구르, 금나라 문자들을 발견하면 절로 비명이 터져요. 그러면서 미감(美感)도 달라지더라고요.


고은 그런데 이런 먼 곳의 문자들이 중국 오지 실크로드를 경유해서 15세기 조선 땅에도 일정하게 표착했을 것이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실크로드란 중국의 비단이 로마나 다마스쿠스로 건너가는 낙타길 이상으로 ‘문자의 길’이었단 말이지. 문자 중에도 자음문자의 길 말일세. 아니, 그곳은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의 문자가 와서 한자어로 바뀌는 길이기도 하지. 쿠마라지바라는 천재적인 역경(譯經) 학승이 우리네가 사용하고 있는 한역 대승경전의 많은 분야를 번역했는데 그는 인도인 대처승 쿠마리아를 아버지로 구차국 공주 지바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사람이지. 그의 태생 자체가 ‘문자의 길’ 아닌가. 그 역경은 실은 번역이기보다 창작이기도 해.


김형수 말씀에 중독성이 있습니다. 실크로드를 그냥 비단길이라고 하는 것과 ‘낙타가 가고 또 자음이 다녔다’고 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후배들에게 시적 영감을 많이 줄 것 같아요.


고은 세종 당시 왕실의 여러 왕자나 집현전의 젊은 수재들의 언어 탐구는 오랜 중화체제로서의 문자적 결착(決着)을 넘어서 다른 언어 틀을 탐색했어. 주원장의 명나라는 몽골족의 원 왕조를 끝장내고 그야말로 대명천지의 한자 존엄을 다시 한번 이념화했지.


김형수 그런 뜻글자 천하에서 어떻게 소리글자가 태어났을까 늘 의문이었는데, 다른 언어 모델들도 보았던 거네요?


고은 몽골의 몽골 문자나 파스파 문자는 고려 시기에는 우리에게도 한동안 강요된 적이 있었지. 그 밖의 것으로는 20세기 전반기까지도 투전판에서 썼던 글안 문자와 한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여진 문자도 집현전에서는 검토했을 것이 틀림없어. 심지어 일본의 가나 문자도 알고 있었겠지.


김형수 옛 고구려의 흔적도 있었겠지요? 몽골어와 우리말 사이에 동일한 낱말이 많은 이유도 그와 관련이 있다고 하던데요.


고은 몽골 문자나 파스파 문자는 멀리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알파벳이 아시아 사막에까지 그 문자의 유전자를 퍼뜨린 셈이지. 시리아 팔레스티나의 북방 셈족의 것이 동방에까지 모래바람에 실려온 것이 아닌가. 한 갈래가 인도를 거쳐 티베트로 넘어가고, 그것이 몽골의 파스파가 되는 경로라네. 여기에다 집현전 학자도 요동에 귀양살이를 온 중국 장강 하류 지방의 학자한테 가서 중국 남부어 음운을 새삼 확인하기도 했지. 또 속리산의 범어 학승 수미와 신미의 범어도 크게 참고했다네. 법주사 복천암이 세조의 사액사찰이 된 까닭이 있지.


김형수 생태계란 자연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개념화한 표현인데, 지금 마치 언어 생태계가 드러나는 듯합니다.


고은 이런 세계 언어를 냉철하게 연찬한 나머지 라틴 문자 계열의 모음과 자음과 단순 자모 병렬의 2차원을 넘어 3차원의 입체 배열이 이루어졌다 하더군. 그러니까 훈민정음이야말로 문자언어사상 그 이전에 없었던 전면(全面)의 단음문자 체제를 완성한 것이 아닌가. 세계의 학계가 한글을 문자의 제왕이라고 칭송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야.


김형수 소리와 문법과 어휘가 제각기 새로운 방식으로 형성된 하나의 의사소통 체계를 완성한 공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고은 참 ‘한글’이라는 이름을 남겨놓은 주시경 선생이야말로 세종대왕 그 다음으로 섬겨야 하겠어. 그 주시경의 제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남의 최현배, 북의 김두봉이지. 그런데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회 회의 때문에 내가 북의 원로학자를 만났을 때 김두봉을 말하자마자 그 학자는 안색을 바꿔 김두봉 이놈 김두봉 이놈이라고 욕설을 퍼붓더군.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냥 입을 다물고 말더군. 아마도 이런 주장이 그쪽 체제논리에 저어되었던 모양이지.


김형수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바른지 모르겠습니다. 북에서 김두봉이 우리말 다듬어 쓰기 운동을 하는데, 가령 이화여대를 ‘배꽃큰계집배움터’라 하는 듯한 양상이었나 봐요. 그래, 논쟁이 생겼을 때 김일성 주석이 언어는 고운 것보다도 소통이 더 중요하다, 또 우리나라는 남북해외가 나뉘어 있어서 어느 한쪽만 고쳐 쓰면 분단고착이 심해진다는 교시를 합니다. 나름대로 ‘꽤 진지한 답을 얻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고은 아무튼 루소처럼 문자 이전의 말의 시대, 그러니까 크로마뇽인의 그 3만 5000년의 말 이래 기껏 5000년의 문자가 인류의 타락과 동행한 사실을 거슬러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탈역사를 따를 이유가 없는 한 15세기라는 뒤늦은 시기에 인류의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이 창제된 사실을 나는 종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네. 내 신은 창세의 신이 아니라 나에게 운명이 된 문자를 만들어준 세종대왕이라네.


김형수 ‘세계 내 존재’란 ‘언어 내 존재’라는 것을 뜻하기도 할 것입니다. 원시든 문명이든 사회 밖의 사람은 없으니까요. 한글은 우리를 매우 유구한 ‘세계 내 존재’로 이끌어 왔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이리도 기뻐하시니 저도 더불어 기쁩니다.


고은 이런 문자로써 내 어린 날 이래 내 삶의 일체를 삼고 있는 축복을 내가 어떤 행복과 바꾸겠는가. 이 세계화 시대에 영어나 중국어의 문자로 시를 쓰지 않고 내 숙명적인 교착어인 한국어의 한글로 시를 쓰는 일이야말로 나를 나이게 한다네. 주체란 타자에의 굴종 없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다그치는 것 아닌가. 이 점에서 20세기의 독립과 자아가 21세기의 관계와 타아화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관계와 타자에의 동일성이야말로 나 자신의 내적 통증을 견디어냄으로써 세계와의 만남도 제대로 구현된다고 믿고 있네. 나 없는 세계는 세계도 아니겠어. 그렇다고 나만의 세계를 세계 속에 고립시키지도 않아야 하겠지.


김형수 옳습니다. 에즈라 파운드가 “어떠한 언어도 혼자만으로는 인간이 이루어낸 모든 형태, 모든 수준의 이해를 나타낼 능력이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합니다.


고은 이런 모국 어문으로서의 한글과 한글로 표기된 조선어가 식민지 시기 후기에 이르러 금지된 문자, 금단의 언어가 되고 말았어.


김형수 그런 금단과의 싸움을 통해 한국시의 근육이 형성된 것 같아요. 조금 비켜서지만, 선생님의 전집에도 수록되지 않은 작품인데 ‘벽시’라고 계엄 하에서 <실천문학>을 창간하면서 ‘무단(舞丹)’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시가 생각납니다. 1980년 5·18 직전 소위 ‘서울의 봄’이라던 때 대학가에 얼마나 회자되었는지 몰라요. 당국의 검열로 삭제된 후반부의 빈칸 속에 우리가 아직 이르지 못한 세상이 숨어 있었어요.


고은 그런가. 그때가 쓰겁게 그립기도 하네 그려. 내가 늦게까지 서당 학동이다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이 1943년이야. 만 10세이므로 요즘의 초등학교 신입생으로는 늙다리였지. 그때 내 고향 옥구군에는 면 단위로 국민학교가 있었어. 그래서 옥구군 미면에는 군산부(群山府) 교외에 있는 미면 신풍리 소재의 신풍국민학교가 있었지. 그런데 취학인구가 늘어나므로 하나를 더 세웠는데 그것이 미면 미룡리의 미룡국민학교였어. 내 앞에 3학년생이 제1회가 되었지. 학교 교사(校舍) 한 채의 네 교실로 그중 하나는 교장과 교사가 함께 쓰고 있었지. 내가 들어가면서 교실이 두 개 더 늘어났어.


김형수 방죽가에서 소를 몰 나이에 신식학교에 들어가셨네요. 그 격렬한 루소의 자식에게 페스탈로치의 세례가 시작된 것은 시련인지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고은 내가 그 국민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때까지 연명하고 있던 조선어 시간이 없어지고 일본어로만 수업을 하기 시작했어. 몇 해 전부터 중등과정에서는 이미 조선어 시간이 없어졌으나 국민학교는 내가 1학년이 되었을 때부터였지. 장차 이 조선어로 한평생의 문자생활을 할 사람에게 그 문자가 금지당하는 사건으로부터 타자의 문자 체제에 편입된 것은 ‘태생의 상처’에 해당되지 않는가.


김형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셈입니다. 저 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도 하나의 언어권에 속해 있었는데…. 삼국이 다른 언어를 썼으면 지금도 남북의 언어가 달랐을 거예요.


고은 그런데 이 조선어 말살정책은 조선인의 성명 개조와의 동시진행과는 별도로 일본제국주의의 경험칙이기도 하지. 20세기 세계 식민지 체제에서 어문정책까지 이토록 야만적으로 강제한 곳은 일본밖에 없어.


김형수 중국이 소수민족을 지배하는 방식과도 다르죠? 여기저기에 민족 자치구가 있고 저마다 고유문자를 써도 되니까요.


고은 1950년대 이래의 중국의 티베트 지배도 행태적으로는 티베트 문자를 아직껏 허용하고 지배문자인 한자의 현실적 군림을 도모하는 중이지. 그런데 이러한 조선어, 조선 문자 강제폐지는 세 가지의 원점을 가지고 있어. 그 하나는 애초에 한일합방과 함께 성급한 언어 강제를 구상한 것과 조선인의 자발적인 일본어, 일본 문자 제창이 있었지. 그러나 그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를 무너뜨릴 가능성에 대한 신중한 구별 정책으로 나아갔어. 그래서 조선어 수업이 가능했지. 저 조선 후기 북경 천주교에 초기의 맹신으로 치달은 황사영이 조선이라는 국가조차 부정한 천주교 세상으로 만들어버리라는 청원을 보낸 것처럼 말이네.


김형수 어족의 불행이 모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괴롭습니다.


고은 그런데 그 당시의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의 서구문명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것을 많이 채택하지. 역사학도 독일의 실증사학 랑케 사관을 받아들여 랑케의 제자를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 영입하지. 그 랑케 제자의 제자에 의해 경성제대 사학과에서 현재 한국사의 제1세대가 가능했던 것 아닌가. 사학뿐 아니지. 헤겔 철학이 일본의 니시다(西田) 철학과 무관한 것이 아니겠지. 또 의사들의 진단서도 전부 독일어였어. 그 때문에 한국의 모든 병원에서도 1970년대까지는 진단서가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였지. 아마 법률도 영미법보다 대륙법의 영향이 농후하겠지.


김형수 일본은 독일과 왜 그리 친했을까요?


고은 제2차 세계대전 앞뒤로 일본과 독일 나치 정권은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함께 3국 추축동맹을 체결했어. 그러므로 일본은 독일과의 소통과 제휴를 확대하지. 독일 나치 지식인들이 일본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규모는 엄청난 것이라네. 먼저 조선총독부는 조선어 수업 폐지 이전에 조선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해달라는 호소문을 제출하게 하지. 거기에 딱 맞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현영섭(玄永燮)이었어. 나중에 영남(永男)으로 개명하지. 1906년생인데 식민지의 참의 현헌(玄獻)의 아들이지. 오늘의 경기고인 경성 제1고보를 나와 1926년 경성제대 문과를 나왔지. 1960년대 <한국인>을 간행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원로 심리학자 윤태림이 바로 그의 동기이고 친일 평론가 최재서도 그렇지. 재미있는 것은 좌익 문학이론가 김태준도 그렇다는 것이네. 바로 그 현영섭을 비롯해서 몇 사람이 총독부에 조선어 폐지 청원을 하지. 총독 각하! 내선일체 동조동근 그리고 대동아공영을 위하여 낡은 조선어를 폐지하고 문명의 국어시대를 열어주소서 운운이야. 옛 조선 선비들이 조선 언문을 내치고 문명의 한자를 숭앙한 그 사대주의보다 더한 것 아닌가.


김형수 안타까운 풍경입니다. 제가 수첩에 적어가지고 다니는 구절 중에 호주 작가 데이비드 말로프의 말이 있습니다. “내 모어가 더 이상 사람들의 입속에서 살아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 나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 깊은 전율이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 내 종족의 죽음을 모두 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은 그런데 이런 청원 책략 배경에는 또 하나의 원점이 있어. 그것이 바로 1938~1939년 일본 체류 독일 철학자 에두아르트 슈프랑거의 식민지 정책강화 권유였어. 그 사람은 19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1960년대 초까지 생존했는데 생(生) 철학자 딜타이의 제자였지. 그런데 이 사람을 일본의 각 제국대학 순회강연에 초청했는데 그는 조선에 건너와 경성제대에서도 강연했어. 그런데 그는 조선에 와서 식민지 언어를 그대로 허용한 사실을 목격하고 이런 식민지 통치로는 본격적인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충고하지. 아니 구두 충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본 정부 문부성 총서 시리즈 <문화철학의 문제>로 저술서적을 내게 되지. ‘한 나라는 그 정치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서는 새로이 획득한 영토에 대하여 거주민의 언어통일을 신속히 그리고 강제적으로라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했어. 통일된 언어 없이는 독립된 문명을 해체할 수 없다는 말도 하지.


김형수 어떠한 언어든 사라진다는 것은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의미하는데 인문학을 전공하는 자가 그런 글을 쓰다니!


고은 이 책이 일본 굴지의 출판사 이와나미(岩波)에서 나와. 일본의 근대는 이와나미와 아까몽(赤門-동경제대) 그리고 아사히(朝日) 신문, 셋이 이루었다는 속담도 있는 그런 출판사야. 지금은 일본 진보 진영도 아우르는 출판문화센터인데, 나도 가깝게 지내는 노포(老鋪)에 속하지. 바로 이 나치의 철학자 슈프랑거의 충고에 옳다, 좋다 하고 총독 미나미의 결단이 있게 되었어. 여기에 총독부 어용의 충성을 바친 현영섭은 끝내 일본으로 건너가 하오리를 입고 세상 떠났지. 이런 조선어 수업 폐지로 내 국민학교 1학년부터 전 과목 일본어 수업이 시작되었다네. 교장 아베 아쓰시(安部敦)는 일본 재향군인 특무상사였고 1학년 담임은 일본 처녀 나카무라(中村) 요네였지. 둘 다 일본 규슈 출신이었어. 여선생은 썩 미인이었어. 어여쁜 얼굴에는 분 내음이 그윽했지.


김형수 그 순간에도 어여쁜 여자 선생님의 분 냄새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숨 쉬는 세계를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인가 봐요. 또한, 그 연세에도 언어 문제만큼은 미루지 않고 발 벗고 나서는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민족문학 운동이 온통 그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황토 담벼락에 뛰노는 역사의 물고기여 뛰노는 시여

펄펄 살아서 뛰노는 염통의 고동소리 우리 여기에 있다

오오 두근거림으로 그리움으로 오랜 세월 흘린 눈 원한으로

우리가 모두 거짓과 깡패 쫓아낸 자리에

아픔의 시여 아픔으로 읽는 시여 진리의 울음이여

어떤 신놈도 어떤 우상놈도 지우지 못하는 민중의 시가 되자

시인이여 마지막 진실이여

오오 어이할 수 없이 열렬한 향기의 인내인 밤이 가면 새벽인 담벼락이여

(1980년 ‘서울의 봄’ 시절, 계엄 당국의 검열로 삭제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