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물은 ‘대안연구공동체’가 2011년 11월 5일부터 6개월 연속 특강으로 매주 토요일 경향신문에 <20세기 사상지도>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는 기획물입니다. 현대 인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획이라 생각되어 전재합니다. 비제도권의 소장·중견 학자들이 장기 기획의 핵심 필자로 참여하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연재는, 제도권에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인문학의 새로운 기운을 알리는 것이자 시민 인문학 운동의 전망을 가늠하는 시금석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가장 유명한 현대 철학자 중 한 명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저작이 꽤 난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국내에는 <글쓰기와 차이>로 번역돼 있다) 같은 그의 저작들은 상당히 난해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로고스 중심주의의 해체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존(presence)의 형이상학의 역사였다. 이 점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는 서양의 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로 규정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들이 남긴 단편들에서는 존재가 ‘현존’으로, 곧 현존하는 것을 현존하게 해주는 운동 내지 사건으로서 이해되었으나, 플라톤 이후에는 존재가 실체로 이해되어 존재가 지닌 사건의 성격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형이상학은 그리스 초기 사상가들에게서 나타났던 증여의 사건으로서 존재 의미가 점차로 망각되어온 역사이며, 이는 니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데리다는 현존의 형이상학에 관한 하이데거의 관점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수정한다. 첫째, 하이데거와 달리 데리다는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원초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다고 보지 않으며, 철학자들의 저작 속에서만 서양 형이상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 및 인문과학에서도 나타난다. 둘째, 더 나아가 데리다는 하이데거도 역시 현존의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가 여전히 로고스 중심주의적 편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로고스 중심주의 또는 음성 중심주의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의미나 진리의 생생한 현존으로서 로고스를 추구해왔으며, 이러한 로고스는 음성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현존하는 그대로 드러난다고 간주해왔다. 이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오래된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루소나 후설, 하이데거 같은 근대 철학자, 그리고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20세기 인문과학자들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음성을, 로고스를 생생하게 구현해주는 본래적인 매체로 특권화하고 대신 문자나 기록 일반은 이러한 음성을 보조하는 데 불과한 부차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론에서는 어디서든 현존의 형이상학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에게 현존의 형이상학은 ‘로고스 중심주의’이자 ‘음성 중심주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존재의 부름’이나 ‘존재의 목소리’ 같이 음성 중심주의가 깃들인 은유들을 자주 사용하고, 또 진정한 존재의 의미는 기호들의 연관망에서 벗어나 있다고 간주하는 한에서 그는 여전히 서양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존의 형이상학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타자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ecriture), 곧 기록이다. 서양 형이상학은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존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의 정치학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존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존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존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과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인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19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론의 원리에 충실하다. 더 나아가 유령은, 살아 있으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 곧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시대의 수많은 약소자들을 나타나기에 적합한 명칭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소자들에서 유령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19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 사상의 영향과 현재성
데리다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그는 현대 문학이론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람 중 하나로, 해체, 텍스트, 산종(散種), 은유, 장르, 수행성에 관한 그의 이론은 문학연구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또한 가야트리 스피박이나 호미 바바 같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의 작업에서도 해체론은 핵심적인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데리다의 사상은 법학,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정전(正典)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은 고전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기 위해 데리다 사상을 원용한 바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영미권에서 전개된 비판법학운동은 해체론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나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 같은 정치철학자들의 작업에 미친 데리다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발리바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고 현대 민주주의 이론을 재구성하는 데 데리다의 작업에서 여러 가지 이론적 자원을 빌려오고 있으며, 랑시에르와 아감벤은 데리다의 해체론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축하고 있다. 데모스에 대한 랑시에르의 재해석이나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 등에서 그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데리다를 더 알고 싶다면
국내에는 데리다에 관한 여러 개론서가 나와 있는데,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책들이 도움이 될 만하다. 데리다를 처음 접하는 독자는 페넬로페 도이처의 <HOW TO READ 데리다>(변성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를 읽는 게 좋다. 도이처는 쉬운 어법으로 데리다의 핵심 사상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고등학생 정도의 독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이슨 포웰의 <데리다 평전>(박현정 옮김, 인간사랑)은 데리다에 관한 지적 평전이다. 학부 상급 학년 정도의 독자들이라면 도전해 볼 만한 책이다.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데리다 사상의 원천 중 하나인 니체와 데리다의 관계를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두 사상가를 연결하고 있다. 학부 상급 학년 이상 수준의 독자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국내 연구자의 저서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과 뉴턴 가버와 이승종 교수가 공동으로 저술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민음사)이 추천할 만하다. 김 교수의 책은 데리다 사상을 폭넓은 철학사적·문학사적 맥락에서 고찰하고 있고, 가버와 이 교수의 책은 현대 영미철학의 원천인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의 사상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유럽철학과 영미철학의 접근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 두 책 모두 대학원생 수준의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