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라는 잉여물 통해 걸러낸 진실
지젝의 ‘예’. ‘예’를 넘어서는 ‘예’. 기존 지식을 공고히 하기 위한 예증이 아니라 지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 “미친 시늉으로 군복무를 피해보려는 신병이 자기 눈에 띄는 종이를 모두 점검하면서 ‘이게 아니야’라고 외친다.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진 그는 의사 앞에서도 쓰레기통의 휴지들까지도 점검하며 ‘이게 아니야’라고 되풀이한다. 그가 정말로 미쳤다고 확신한 의사가 군복무를 면제해주는 허가서를 주는 순간 그는 기쁨에 넘쳐 이렇게 말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 지젝의 말대로 ‘이게 아니야’라는 반복된 실패를 통해 그는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 ‘기표’로 설명될 수 없는 ‘대상’. 그러나 기표 체계 자체를 통해 산출된 잉여물을 이야기하기 위해 지젝이 들고 있는 예. 그러나 이 ‘예’는 지젝(의 이론)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이기도 하다.
지젝이라는 ‘예’. ‘예’는 하나의 ‘전체’로서 이미 주어져 있는 정신분석학적 진실을 지지하고 보충하는 ‘부분’이 아니라 재현될 수 없는 전체를 창조하는 ‘전체보다 더 큰 부분’이다.
<도그빌>의 톰은 이방인에 대한 환대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그레이스를 ‘예’로 사용한다. 환대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한 예로 환원될 때 그레이스는 노동이나 성적 만족을 위해 교환되는 유용한 대상이 되어버린다. 환대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톰이 그레이스라는 잉여물, ‘그녀 속에 있는 그녀 이상의 것’을 폭력적으로 배제해버릴 때 예증은 권력이 된다. 반면 지젝의 ‘예’는 총체적 진실을 위해 희생될 수 없는 그 진실의 잉여물이다. 더 나아가 지젝은 정신분석의 진실 자체가 ‘예’라는 잉여물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젝의 텍스트가 온통 혼돈스러운 예들로 얼룩져 있다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혼돈스러운 얼룩이 정신분석의 진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지울 수 없는 얼룩들을 반복하는 ‘예’ 속에서만 혼돈이라는 진실이 드러날 수 (또는 감추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그 예들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모스크바의 미술 전시회에 레닌의 부인이 공산청년동맹의 단원과 침대에 함께 있는 그림이 전시되었다. 그림의 표제는 ‘바르샤바에 있는 레닌’이었고 그림 속에서 레닌을 찾지 못해 황망해하던 관람객이 묻는다. 레닌은 어디 있지요? 레닌은 바르샤바에 있습니다.” 지젝의 말대로 레닌은 또 다른 곳에 있는 기표가 아니라 ‘바르샤바에 있는 레닌’이 완성되기 위해 그림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 대상이다. 기표 체계를 완결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잉여물, 기표의 눈에 보이지 않아 의미화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레닌. 앞의 예에서 보았듯 정신분석의 대상은 기표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의미 체계를 넘어서 있는 초월적 대상이 아니라 의미가 낳은, 그러나 의미가 눈을 감아버리는 괴물로 존재한다. 재현될 수 없는 대상은 그러나 재현 속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으로 ‘있다’. 현전/부재의 재현 체계 속에 기입될 수 없는 ‘있음’. 의미화할 수 없는 편린들을 찾아나서는 것이 정신분석이다.
서술할 수 없는 ‘있음’은 긍정과 부정의 동시적 발현 또는 이중 부정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숨긴다). 부정 판단과 무한 판단의 간극 속에서 정신분석이 탄생하는 것도, 칸트가 정신분석의 기원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죽었어’(I am dead)의 서술어를 부정하면 ‘나는 죽지 않았어’(I am not dead)라는 부정 판단이 되지만 서술할 수 없음을 긍정하게 되면 무한 판단에 이르게 된다. ‘나는 죽어 있기도 하고 살아 있기도 해’(I am undead) 또는 ‘나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야’. ‘나는 죽었어’라고 말하는 ‘살아 있는 나’.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규정할 수 없는 무한 판단 속에서 칸트는 뱀파이어가 된다. 그는 대립 구조로 사유될 수 없는 ‘사이’. 의미 체계가 사유할 수 없는 의미의 ‘틈’. 유령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라캉의 실재가 거기에 화답한다.
의미가 만들어낸 그러나 의미를 넘어서는 대상은 ‘대상 속의 대상 이상의 것’으로 존재한다. “유대인은 교활하고 탐욕스럽고…”와 같은 묘사가 “그들은 탐욕적이고 교활해. 왜냐하면 유대인이니까”로 바뀔 때 기표에서 대상, 의미에서 존재로의 전환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니까’에서 드러나는 유대인은 교활하거나 탐욕스러운 특성을 통해 규정될 수 없는 ‘유대인 속에서 유대인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지시한다. 대상은 ‘기표 속에서 기표를 넘어서는’ 동시에 스스로도 분열되어 자신의 잉여물로 존재한다.
기표를 넘어서지만 스스로 분열되어 초월적 기표가 될 수 없는 대상을 정신분석은 ‘대상 소타자’(objet a)라 부른다. 유대인이란 집합은 ‘유대인 속에서 유대인을 넘어서는’ 대상 소타자를 포함할 때 비로소 닫힐 수 있다. 대상 소타자는 기표가 설명할 수 없는 텅 빈 공간이기 때문에 이것을 포함했을 경우에도 내용상의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수로 삼킨 호루라기가 예측할 수 없는 소리를 발생시켜 주체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처럼 대상 소타자라는 빈 공간이 포함되는 순간 기표 체계 자체의 빈 공간이 드러난다. 잉여가 결핍과 같아지는 이상한 결합. 텅 빔은 잉여이자 결핍으로 작용해 기표의 집합을 닫는 동시에 연다.
안이자 바깥, 닫히면서 열리는 이중 운동을 포착할 수 없는 기표 체계는 안이자 바깥인 텅 빈 형식을 예외적 공간으로 물신화함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한다. 대상 소타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 대상으로 승화되거나 항상 접근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된다.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구분함으로써 불가해한 여성의 욕망을 피해갈 때 남성 판타지가 작동한다.
뉴올리언스의 카트리나 사태에서 ‘강간했다고 가정되는 주체’로 흑인들이 지목되었다. 곧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인종주의적 판타지가 보여주는 것은 미국 사회 자체의 결핍이다. 흑인들은 자신들을 규정하는 상징적 자질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판타지 대상, 즉 강간했다고 ‘가정’되는 주체가 된다. 백인들의 결핍을 지시할 수 있는 ‘틈’으로서의 흑인을 견디지 못하고 흑인이란 원래 폭력적이고 문명인처럼 행동할 수 없다는 판타지를 가동시켜 그들을 예외적인 공간 속에 가두게 될 때 인종차별주의라는 판타지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이미 대상 소타자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표적 다양성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는 ‘정체성의 정치학’에 개입한다. 다문화주의자 역시 타자의 특수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차별주의자일 수 있다. 다문화주의자는 자신의 모든 실정적 내용을 지움으로써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주체가 되어 다른 특수한 주체성들을 평가할 수 있는 위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중립적 관찰과 판단이 가능한 지점이 ‘예외적 초월성’이라는 판타지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도그빌>의 톰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 타자에 대한 존중이 타자에 대한 우월성과 같아지는 지점. 중립적 관찰을 통해 그레이스라는 잉여물을 자신의 이론을 예증하는 유용한 대상으로 바꾸어버릴 때 톰은 갱스터 아버지와 같아진다. 중립성이라는 이데올로기.
예외적 공간의 초월성 또는 물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상 소타자가 결코 획득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그런 불가능성 자체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부분대상임을 지적해야 한다. 왕이 되고 싶어 하던 거지가 정작 왕이 된 후 다시 쫓겨나게 되어 왕의 옷을 입은 채 자신이 거지였을 때 늘 머무르던 곳에 앉아 있을 때 생겨나는 ‘감지할 수 없는 차이’가 문제이다. 예외적 초월성이 스스로 분열되어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초월적 예외로서의 대상 소타자가 현실 속의 틈으로 하강할 때 우리는 판타지를 횡단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예외를 피해 고통을 피해가려는 모든 움직임을 중지시키는 윤리적 행위이다. 카페인 없는 커피는 커피를 커피로 만들어주는 카페인(이란 고통)과 마주하지 않으려는, 사상자 없는 전쟁은 전쟁이 정당화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잉여물을 피해가려는 움직임일 뿐이다. 예외를 횡단하여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대상 소타자와 만날 때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