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46) “그해 어느 밤 아버지와 대숲으로 숨었지… 이틀 후 마을로 내려오니 시체가 널렸더군”

라라와복래 2012. 8. 27. 22:40

[고은과의 대화](46) 양 세기의 달빛

“그해 어느 밤 아버지와 대숲으로 숨었지… 이틀 후 마을로 내려오니 시체가 널렸더군”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6·25를 말할 때 언급되는 시들이 있습니다. 부서진 세계, 파괴된 공동체, 불신과 증오를 감춘 꽃을 한탄하며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라 외치는 박봉우의 ‘휴전선’, 장대하고 원시적인 토착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동엽의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전후문학은 교과서의 사조 하나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우리에게 ‘문명’을 ‘좀비들의 영토’로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엄청난 사유의 크기를 제공했어요. 저는 이번에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대안 문명이 아니라 아예 그것조차 넘어서는 바깥을 향한 발자국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원점이라 할 6·25의 속살에서 소년 고은이 확인한 ‘폐허’의 요체가 무엇이었는지 여쭤도 될까요?

고은 그토록 전투적인 거대 명제에 부응할 바에는 의미의 깊이가 더해야겠네. 다만 내가 6·25 사변의 후방 사회에서 체험한 사실의 하나는 인류사의 토대를 이루어 준 핏줄, 탯줄에 의한 생명의 기본형식인 씨족이나 그 뒤에 만들어지는 민족이라는 오랜 경험의 유산이 볼품없이 망가지는 일이었어. 근대 한반도의 자아상실을 통해서 열렬히 내걸린 명분인 반외세, 반봉건에 이어서 그것의 귀결이기도 한 반독재라는 새 명제 가운데에서 그 최우선의 정치노선이 항일, 반일이라는 외세 배격 아니었던가. 요컨대 민족으로서의 자아 말일세.

김형수 ‘민족으로서의 자아’라 하실 때 일시적 혼동이 발생합니다. 그런 거대 단위의 자의식도 진정성을 가질 수 있을까? 김수영 시인이 ‘소련도 가시오 미국도 가시오’ 할 때, 신동엽 시인이 ‘껍데기는 가라’ 할 때도 그래요. 시적 자아, 창조적 자아에게 내재된, 이를테면 한 개체가 떠안은 비극성의 크기가 전체의 것과 맞먹을 만큼 치열한 제3의 자아일지라도 거기에 단일한 의지가 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신채호적 의지가 불가능해지는 건 그 이후일 것 같기도 하고요.

고은 얘기를 좁혀보면 근대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에의 열망이 담겨 있는 민족적 단일주의는 거의 신성한 것이었지. 그런데 그것이 깊어질수록 부정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고식화(固息化)되기 십상이었어. 마당을 잃고 뒷골목을 얻는 셈이란 말이네. 현실의 커다란 모순에 맞서 그것을 부정할 때는 부정의 부정까지도 아우르는 자기 쇄신 없이는 그 부정의 굴레를 무릅쓰는 일!

김형수 언제나 지나간 세계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 눈앞에 펼쳐질 세계, 반드시 진행되는 세계를 천착하는 정신은 선생님만의 개성이 아닌가 합니다.

고은 한말의 지사들이 ‘이천만 동포’ 운운 내세울 때의 그 동포란 바로 정치용어로서의 민족을 포함하는 오랜 육친성을 발휘했지. 그런데 이런 피가 도는 일반용어로서의 동포 따위의 낱말이 인공이나 반공이라는 적대적인 정치용어 앞에서 기화(氣化)되고 말았네. 이후 한반도는 항일과 반일이라는 극복되지 못한 식민지 잔재의 명제는 남한의 경우 반공이라는 ‘국시(國是)’ 앞에서 철저하게 약화되거나 진부한 넋두리로 치부되기 시작하지. 반면 북한 쪽의 경직된 민족 제일주의는 끝내는 유일사상의 기반으로 역할을 하는데 이 같은 남과 북의 양극화야말로 바로 ‘6·25 생산성’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다네.

김형수 지금도 민족, 동포, 인공, 반공, 유일(사상), 독재 등 근대사회에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명사형의 개념어들이 ‘기화’ 즉 증발되는 경험을 술회합니다. 그랬을 때 뒤에 남겨진 날것, 생명의 알몸이 겪는 고통이 선명해지는 것 같아요. 다만, 그걸 ‘6·25 생산성’이라는, 숙제를 담은 낱말로 사유하려면 시적 역설에 많이 훈련되어야 할 것 같아요.

고은 그러니까 피붙이나 겨레붙이나 반만년 배달민족이라는 것들은 사실상 반공산주의냐 공산주의냐라는 정치이념 앞에서 헛것이고 남의 전주이씨 가문이나 북의 전주김씨 후예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백년 원수일 뿐이라네. 실제로 이승만은 전주이씨 양녕대군의 자손이고 김일성 가계는 전주김씨 삼대 이전 대동강을 건넌 핏줄이지. 그 조상의 무덤이 모악산 어느 기슭에 있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핏줄 본위나 본관(本貫) 중시의 전통사회 종친적 통합이란 근대 이데올로기로 급무장한 분단 모순에서는 어떤 기능도 당해낼 싹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림 | 임옥상 화백

 

김형수 그 같은 사회적 변동이 선생님의 일상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고은 고향 마을에서의 핏줄 같은 ‘이웃’이나 유서 깊은 ‘두레’와 심지어는 사촌이나 육촌 사이의 혈족조차도 ‘빨갱이’냐 아니냐, ‘반동’이냐 아니냐로 흡수되어 버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오열(五列)’이냐 아니냐와 ‘회색분자’냐 아니냐도 집요하게 구별해야 하는 상호 적대사회로 일변했어. 내 당숙들은 어느새 인공체제에 기울어졌고 내 재당숙 쪽은 반동으로 낙인찍혀서 감히 집안끼리의 호칭으로 부르기도 어렵게 되었지.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촌 아우를 보면 이쪽에서 재빨리 다른 길로 걸음을 틀어 버리지. 이런 마을 분위기에서 한 달 이상 내무서에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풀려나온 아버지의 입이 언제나 굳게 닫혀 있는 것이 내 입에도 전염되었어. 해방 직후 마을의 친일파에 대한 일시적인 규탄과 호열자로 인한 마을 전체의 적대적인 환자격리 이후에 다시 복원된 마을의 평온한 일상은 인공의 일상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네.

김형수 마음이 아파요. 전쟁 상을 개괄하고 요약, 정돈하실 때는 추상적 공분만 솟더니 거기에 개인적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사적 시간들로 대체되는 순간 가슴이 먼저 반응합니다. 삶의 현실이란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 아니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요?

고은 그 무렵 나는 지주계층의 청년 김기호와 친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크게 꾸짖기도 했어. 그 누구하고도 만나지 말고 집 안에 있으라는 것이었지. 물론 마을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하는 집회나 비행장 야간노역 따위에는 빠지면 안 되므로 그런 외출 말고는 집 안과 앞산 비탈의 수박밭이나 콩밭의 일에 몰두할 때에만 아버지는 나에게 부드러웠지.

김형수 천황 모독으로 퇴학 처분을 당해도 꾸짖지 않던 분인데요. 그런 상황은 어떻게 견뎠습니까?

고은 나는 일제 말기에 파 놓은 우리 집의 방공호에 들어앉아서 기호한테 빌린 미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통해서 ‘맥아더 원수(元帥)’ 명의의 한국어 번안 연설을 들으며 전쟁의 실제 상황을 조금씩 알 수 있었네. 1950년 8월은 북에는 절호의 기회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인공체제는 무엇 하나 낮은 목소리가 없었어. 입에서 나오는 소리마다 큰 소리였어. 당시 김일성은 8월 15일을 통일의 날, 승전의 날로 정하고 부산 점령을 인민군 각 전선에 지상명령으로 고취하고 있었지. 그 독전(督戰)으로 각 전선에 시체가 쌓여갔지.

김형수 인공이 속삭이는 법 없이 큰 소리만 냈다는 시적인 진술과 소중한 이웃들이 죽은 자리도 날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현실이 매우 그로테스크한 대비감을 줍니다. 객관 정세가 그랬던 거지요? 당시 최전선은 어디였습니까?

고은 경북 포항과 영천, 대구 외곽과 경남 마산 일대만이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 관할이 되어서 그 포위된 전선을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 부산을 지켜내기 위한 교두보 작전이었지. 이 무렵 북의 남진통일의 현실성 때문에 인민군의 괴멸적인 희생이 앞당겨졌어. 특히 포항 전투에서 남의 학도병과 북의 인민군이 자신들의 생애를 폐기당한 10대 청춘을 산화시킨 혈전을 벌였고 대구 쪽의 견고한 방어 능력에 비해서 마산 쪽의 취약한 전선에서는 한국군과 미군의 병력 소모 이상으로 북의 청소년 병력 소모는 엄청났어. 마산 쪽이 뚫리면 아무리 대구, 영천을 막는다 한들 부산에의 진로는 가장 손쉬운 노릇이므로 마산 일대에서 치러진 크고 작은 백병전과 포격전도 격렬했어. 더구나 이에 앞선 개전 초기의 하동 전투에서 6·25를 38선에서 막지도 못하고 그 전쟁 이전의 경계 태세에도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인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이 백의종군의 처지로 싱겁게 전사한 사례도 있었어. 이와 함께 대구 사수를 위한 다부동 전투에서의 양쪽 격전은 그야말로 시체의 산더미를 이루고 총탄 포탄의 탄피가 산더미를 이루었어. 이때가 북으로서는 그들의 말대로라면 ‘통일전쟁’의 완수이고 ‘남조선 해방전쟁’이었지. 최전방의 보병이 조금만 머뭇거려도 뒤에서 분대장, 소대장이 즉결 처분해버리는 죽음의 전선이었어.

김형수 아, 두꺼운 땅을 뚫고 나온 애기상추가 뽑히듯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귀한 목숨들이 너무도 쉽게 희생됐어요. 그걸 몇 십 년을 되새김질한 기억처럼 줄줄이 꿰시는 것만으로도 1950년대 정신의 생채기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고은 그러나 이 부산 교두보는 곧 그 극한에서 추락하고 말았지. 인천 상륙작전의 커다란 충격으로 각 전선의 사기는 바로 풀어졌어. 북의 시인 조기천이 종군작가로 파견되었다가 죽은 곳도 낙동강 전투였지. 이런 북의 기회 상실은 2개월 뒤에는 남의 기회 상실로 상쇄되는 형국이었어. 인천상륙작전 직후 바로 서울이 수복되지. 그때 경인가도를 공습을 피해가던 시인 김영랑이 포탄 파편을 맞아 죽고 국방부 군 보도기관의 종군기자가 된 시인 구상은 민간인 신분으로는 최전방에서 아직 수복되지 않은 지역에 신문 전단을 뿌리는 선무공작에 나섰어.

김형수 꽤 상징적입니다. 어떤 칼럼에선가 오르한 파묵 같은 작가가 다섯만 있어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수 없다는 글을 읽은 것 같은데요. 북의 전투적 서정과 남의 순수 미학이 파리채 밑에서 죽는 듯한 상황이야말로 분단 미학의 운명을 은유하는 게 아닌가 해요.

고은 1950년 10월 하순 국군의 일부 전선은 압록강과 초산 땅에 한동안 발을 디딜 수 있었지. 그때 압록강의 강물을 보병 물통에 담아다가 대통령에게 헌상했는데 그 물이 사실은 압록강 물이 아니라 청천강인가 대동강인가 하는 강에서 떠온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어.

김형수 그 때문은 아니겠지요? 남북 작가대회 때 묘향산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청천강에서 기어이 소변을 보는 시간을 가졌던 게요. 우리나라는 평화로운 에피소드조차 전시체제의 긴장을 배경으로 깔고 있어요.

고은 동부전선 역시 백두산 입구라는 혜산에 닿았으니 조금 더 분발했으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뻔했는데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을 만나서 고립된 나머지 그 처절한 혹한 속의 장진호 혈전이 있게 되지. 그 직후 흥남철수가 있었어. 그러니까 남의 북진통일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였어. 만약 중공군의 인산인해 작전의 참전이 아니고 맥아더 구상의 만주 폭격이 실현되었다면 남한 주도의 무력통일은 하나의 반전으로 이루어졌겠지.

김형수 전쟁은 민족사를 깊은 트라우마에 파묻었어요. 외세의 압박과 내부의 폭력 아래 누구라 할 것 없이 죽음 앞에 내몰렸던 기억이 저 많은 고유명사를 보통명사로 바꾸어 놓기도 하고.

고은 인공 3개월은 그대로 북의 인공체제 확대였으나 가을의 평양 탈환이나 원산 탈환의 북한 지역은 이승만이 임명한 현직 관리자와 미군 쪽이 임명한 전시 작전구역 행정책임자 사이의 갈등까지 보였어. 특히 평양역전에 이승만이 나타나 이로부터 북한은 자유의 땅이라는 그 떨리는 목청의 연설 이후 미군 쪽과 한국 정부 쪽의 성급한 평양 주도권 싸움이 마치 16세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횡포와 조선 정부의 대응 비슷한 모양새였어. 요컨대 이 두 가능성, 8월의 인공 남진과 10월의 국군 북진은 더 이상 무력통일의 유일성이나 어느 쪽의 흡수통일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교훈으로 남긴 것이 6·25이기도 하지 않은가.

김형수 그럼 무력통일 시대와 평화통일 시대가 6·25를 기점으로 나뉘는 겁니까? 평화통일 구호는 더 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고은 사실 6·25를 앞뒤로 한반도에서는 무력통일 이외에는 어떤 통일도 싹트지 않았어. 한동안 6·25 이전 1~2년 동안 북에서 평화적 통일 운운의 입이 열린 적은 있지만 그것은 헛소리였어. 6·25 직전 북은 이런 평화 운운의 짤막한 공세를 내보냈고 또 전쟁을 만반으로 준비 완료한 상태에서 그 사실을 호도하느라고 남쪽에 잔류한 남로당의 이주하 등과 자신들이 연금시키고 있는 조만식과 그의 자제를 서로 개성 근처의 어느 지점에서 맞교환하자는 제안을 되풀이했지만 속임수였지. 그러니까 남은 남대로 ‘평양 오찬 신의주 만찬’이라는 북진통일론이나 북의 ‘남조선 해방’론이 다 무력을 의미하지 평화 계획일 수 없었지. 바로 이 무력 지상주의가 평화통일론의 실마리를 열게 하는 6·25 이후의 시련이 있게 되는 것이네.

김형수 결국 온 나라가 ‘상이군인’의 것이 된 거예요. <만인보>에 나오는 그 전쟁 괴물 ‘상이군인’ 말이에요. 고향붙이들이 그렇게 변하는 게 얼마나 환멸스러웠을까요?

고은 그해 9월 고향마을 분위기는 갑작스럽게 살벌해졌어. 야간의 방공호 작업이다 비행장 작업이다 해서 그동안 십여 명씩 동원하던 것이 백 명 규모로 노인도 아이들도 동원되기 시작했어. 마을 인민위나 민청 인원만으로 인솔자가 부족할 경우 다른 부락이나 군 인민위 파견 인원이 나서기도 했어.

김형수 그 같은 상황이 펼쳐질 때 선생님 개인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고은 9월 하순의 동원은 특히 삼엄했는데 대체로 우익 계열의 남녀노소를 한꺼번에 망라하는 규모였어. 이 동원 직전에 당숙인 인민위원장이 사촌형인 아버지에게 은밀히 피신을 알림으로써 아버지와 나는 저녁밥상도 거른 채 눈에 띄지 않게 대숲 안에 스며들었다가 그길로 뒷산 잡목숲 속으로 들어갔어. 한밤중 마을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기저기서 살기등등한 소리들이 들렸으므로 나는 아버지와 헤어져 잿정지 논의 벼 속으로 스며들었지. 벼 속에는 온갖 벌레들이 살아서 그 벌레 물것에 무척이나 시달리며 하룻밤을 견디어냈어.

김형수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던 겁니까?

고은 잿정지 마을 몇 가호 일대에서도 술 취한 좌익 패거리들의 소리가 들리고 있다가 새벽녘에야 잠잠해지더군. 다음날 인적이 뚝 끊긴 정적뿐인 숲길과 언덕길을 지나 집 뒤의 숲에 이르러 텅 빈 마을을 확인했어.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저녁때까지 빈속으로 숨어 있다가 어스름 속으로 돌아왔지. 인공의 완전 철수였지. 동원된 일백여 명은 이웃 부락인 미제 뒷산의 방공호와 폐정(廢井)에 죽창으로 찔러 죽인 시체들을 차곡차곡 던져 넣은 미면 일대의 학살이 밝혀진 것은 이삼 일 뒤였어.

김형수 세상에! 현대문학사의 가운데 토막이 못 먹게 된 샘물에 잠길 뻔했습니다.

고은 나는 며칠 동안 그 부패한 시신 발굴 작업의 생존자였지. 전쟁 직전 경찰이 보도연맹 등 인사를 학살한 보복극으로는 그 정도가 잔악무도였는데 바로 이에 대한 보복학살이 남은 우익 유가족에 의한 좌익 색출 학살로 연속된 비극이 내 고향의 것이었네.

김형수 최근에 어떤 책에서 “앎의 불가능성과의 접촉을 통해 비로소 열리는 어떤 사유의 가능성”이라는 문구를 보고 마치 ‘고은 문학세계’를 정의한 것 같았는데, 오늘은 그와는 또 다른 한 편의 명징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어요. 엔딩 자막이 아직 오르지 않았으니 다음 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해설 : 경향신문 2012.08.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032014145&code=210100&s_code=af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