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di, Un ballo in maschera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
Giuseppe Verdi
1813-1901
Gustavo: Plácido Domingo
Amelia: Josephine Barstow
Renato: Leo Nucci
Oscar: Sumi Jo
Ulrica: Florence Quivar
Konzertvereinigung Wiener Staatsopernchor
Wiener Philharmoniker
Conductor: Georg Solti
Salzburger Festspiele, 1990.07.28
Domingo/Barstow/Nucci/Sumi Jo/Georg Solti - Verdi's opera 'Un ballo in maschera'
이탈리아 비극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희생과 헌신이 그 특징입니다.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끝까지 사랑하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거나 변심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병들어 죽거나(<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라 보엠>의 미미),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치거나(<리골레토>의 질다, <일 트로바토레>의 레오노라), 구할 수 없을 때는 함께 죽는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아이다>, <토스카>). 이처럼 이탈리아 비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여주인공이 극의 핵심이 되는 ‘프리마 돈나(prima donna) 오페라’입니다.
그러나 베르디의 중기 오페라 가운데는 <시몬 보카네그라>나 <가면무도회>처럼 남자주인공이 여주인공보다 훨씬 중량감을 갖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면무도회>는 마침내 소프라노의 희생 행렬에 종지부를 찍고 테너 주인공에게 죽음을 선사한 전복적인 작품입니다. 넘치는 혈기와 질투심으로 결국 소프라노를 죽게 만드는 테너 주인공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가면무도회>의 남자주인공 구스타프 3세는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이며 연인을 배려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현실의 스웨덴 국왕 암살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주인공 구스타프 3세는 18세기에 스웨덴을 통치했던 계몽전제군주입니다. 이 오페라의 원작인 외젠 스크리브의 <구스타프 3세 또는 가면무도회>는 1792년에 실제로 일어난 국왕 시해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지요. 국왕 구스타프 3세는 귀족들의 횡포를 없애고 평화로운 국가를 만들려고 애썼던 인간적인 통치자였습니다. 형식에 매이는 것을 싫어했고 문화예술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귀족의 권한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불만을 사 앙커스트룀이라는 젊은 장교에게 가면무도회장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3세의 대관식을 묘사한 그림.
이처럼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소재를 취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베르디는 <가면무도회>에서도 정쟁보다 등장인물의 심리와 관계에 초점을 맞춰 극을 이끌어나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대본작가 안토니오 솜마에게 “애정과 우정을 둘러싼 갈등의 드라마”를 써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솜마는 베르디의 다른 어떤 대본작가보다도 열정적인 시구(詩句)를 짓는 데 능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멜로드라마의 전형을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애정과 우정을 둘러싼 갈등의 드라마
오페라의 첫 장면은 스웨덴 국왕의 넓은 접견실에서 시작됩니다. 귀족들이 모여 국왕 구스타프 3세의 덕성을 찬양하지만, 그 안에는 국왕을 증오하며 암살하려는 무리도 섞여 있습니다. 시동 오스카가 다음날 열릴 가면무도회의 초대손님 명단을 가져오자 왕은 그 명단에서 사랑하는 아멜리아의 이름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아리아 ‘아, 다시 한 번 그녀를 보게 되리’를 노래합니다. 그때 아멜리아의 남편인 충신 레나토가 다가와 국왕 시해 음모를 귀띔하며 왕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때 대법관이 나타나 ‘백성을 현혹시키는 울리카라는 점쟁이를 추방해야 한다’고 왕에게 알리지만, 시동 오스카는 ‘그녀가 빛나는 별을 바라볼 때’라는 아리아로 울리카를 변호합니다. 호기심을 느낀 왕은 뱃사람으로 변장하고 점쟁이를 찾아가기로 하지요.
아멜리아 역시 왕에 대한 사랑을 잠재울 치료법을 구하러 울리카를 찾아왔다가 비법을 얻어 돌아갑니다. 왕의 손금을 본 울리카는 그가 가까운 친구에게 살해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울리카가 시킨 대로 아멜리아는 음산한 곳을 찾아와 약초를 캐며, ‘풀을 뜯어 내 사랑을 잊을 수만 있다면’ 하는 아리아를 간절하게 부릅니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뒤를 따라온 왕이 나타나고,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의 이중창을 노래합니다. 그때 왕을 시해하려는 무리가 다가온다고 알리러 레나토가 그곳에 찾아옵니다. 왕에게 자기 망토를 입혀 도망시킨 뒤 레나토는 베일을 쓴 여인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려고 합니다. 레나토와 아멜리아를 포위한 암살자들은 여인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하고, 남편이 죽을 위험에 처하자 아멜리아는 스스로 베일을 벗어 던집니다. 레나토는 자기 아내의 얼굴을 보고 경악하며 극도의 배신감을 느낍니다.

집에 돌아온 레나토는 아멜리아에게 자결을 강요하며, 왕의 초상화를 향해 ‘너였구나, 내 영혼을 더럽힌 자가’를 분노에 차서 노래합니다. 반란을 꾀하는 이들은 레나토의 집에 모여 제비뽑기로 왕의 암살자를 정합니다. 뽑힌 사람은 바로 레나토입니다. 한편 왕은 사랑을 단념하고 레나토와 아멜리아 부부를 그들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전출 임명장에 서명합니다. 시동 오스카는 ‘가면무도회에 암살자들이 오니 무도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하지만, 왕은 아멜리아에게 작별을 고하러 무도회장으로 갑니다. 레나토는 칼로 구스타프를 찌르고 가면무도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죽어가면서 왕은 레나토에게 아멜리아의 순결을 보증한 뒤 암살자들 모두를 사면하고,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거듭 고백하며 세상을 떠납니다. ▶가면무도회장은 오페라의 결말을 장식하는 무대이다. 구스타프 왕이 무도회에서 암살당한 뒤 오페라의 막이 내린다.
Domingo/Ricciarelli/ Cappuccilli/Grist/Abbado - Verdi's opera 'Un ballo in maschera'
Riccardo: Plácido Domingo
Amelia: Katia Ricciarelli
Renato: Piero Cappuccilli
Oscar: Reri Grist
Ulrica: Elizabeth Bainbridge
The Royal Opera Chorus
Orchestra of the Royal Opera House
Conductor: Claudio Abbado
The Royal Opera House, 1975

절묘하게 배합된 긴장과 이완의 음악
<가면무도회>에는 두 가지 판본이 있습니다. 1859년 로마 아폴로 극장에서 초연된 원작판(스웨덴 스톡홀름 궁정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스톡홀름 판’이라고도 부릅니다)과 ‘국왕 시해’라는 소재가 검열에 걸려 부득이 미국 보스턴으로 배경을 옮겨야 했던 개정판(보스턴 판)입니다. 개정판에서는 국왕 구스타프 3세를 보스턴 총독 리카르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가면무도회> 개정판 장면으로 보스턴 총독 리카르도(라몬 바르가스)와 아멜리아(안젤라 바람비오)의 연기 장면.
국왕 구스타프와 아멜리아는 내면의 어린아이 같은 동경과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사회의 규율과 대립하는 행위를 하는 인물들입니다. 이들보다 훨씬 냉정하고 성숙한 레나토(바리톤)는 사회적 규율과 대의를 위해 왕에게 이성적이고 단호한 통치자의 길을 걷게 하려는 충신이죠. 궁정의 어릿광대 역할을 하면서 왕의 자유로운 감성을 부추기는 앳된 시동 오스카(소프라노)는 레나토의 정반대 지점에 위치합니다. 10대의 시동 역이 늘 그렇듯이. 오스카는 여성 가수가 남자 역할을 노래하는 ‘바지 역’(trouser role)입니다. 메조소프라노 또는 알토 가수가 맡게 되는 점쟁이 울리카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에 등장하는 발랄한 점쟁이 프레치오실라와는 다른 어둡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보여줍니다.
전체적인 음악의 구성은 베르디의 이전 어느 작품보다도 참신합니다. 억눌러 왔던 내면의 격정을 마침내 분출하는 남녀주인공의 이중창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오페라에서 가장 극적인 아리아는 배신당한 레나토가 부르는 ‘너였구나, 내 영혼을 더럽힌 자가’입니다. 도입부에서는 목관악기가 아멜리아의 주제를 연주하면서, 순결하고 행복했던 날들에 대한 레나토의 회상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아리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금관악기가 동반하는 셋잇단음표의 연속적인 리듬이 레나토의 강렬한 복수 의지를 표현합니다. 후반부에는 하프와 플루트가 다시 레나토를 부드러운 회상으로 이끄는 듯하다가 다시 셋잇단음표가 나타나며 현실의 절망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무도회 장면에서도 레나토와 암살자들의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극도의 긴장을 명랑한 오스카의 음악이 이완시키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베르디의 독창성과 음악적 실험정신이 각별히 빛난 작품입니다.
추천 음반 및 영상물 (구스타보/리카르도-아멜리아-레나토-오스카 순)
[음반] 주세페 디 스테파노/마리아 칼라스/티토 곱비/에우제니아 라티 등. 안토니오 보토 지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1956년 녹음, EMI
[음반] 플라시도 도밍고/카티아 리차렐리/레나토 브루손/에디타 그루베로바 등.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1980년 녹음, DG
[DVD] 플라시도 도밍고/조제핀 바스토우/레오 누치/조수미 등. 게오르크 솔티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및 빈 국립오페라합창단, 존 슐레징거 연출, 199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 실황. TDK
[DVD] 루치아노 파바로티/에이프릴 밀로/레오 누치/해롤린 블랙웰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피에로 파시오니 연출, 1991년 공연 실황, DG
글 이용숙(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