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즈 아베마
여기 재주 많은 여자 화가도 있습니다!
_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197131330 2013.09.13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쥔장 선동기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2009)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재주 많은 화가 이야기를 시작했으니까 한 사람을 더 만나보고 가겠습니다. 프랑스의 여류 화가 루이즈 아베마(Louise Abbema, 1853-1927)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지만 19세기만 하더라도 여류화가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소개한 여류 화가도 최초의 근대 여류 화가라고 불리는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부터 안나 앙카와 마리 카셋에 이르기까지 10명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여인들에게 화가의 길은 어려웠던 것이지요. 아베마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낸, 성공한 인상파 여류 화가였습니다.

티타임 Tea Time, 32.5x41cm, oil on canvas
일본풍 천으로 가구를 감싼 테이블 위에는 화병마다 담긴 꽃들이 가득합니다. 잠시 여유를 주는 티타임인데 생각 많은 표정의 여인은 혼자 찻잔을 들었습니다. 다탁을 보니 더 올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 여인, 지금 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밤에 혼자 마시는 커피는 복잡했던 마음을 다독거리는 힘이 있지만 낮에 혼자 마시는 차는 자신을 초라하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인의 시선이 옆에 앉은 개에게 닿아 있군요. 개는 충실함의 상징이죠. 지금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득하게 들어 줄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베마는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탕페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역장이었다고 하니까 가정 형편이 중류층은 되었겠지요.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10대 초반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부모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간혹 지나치게 아들 편을 든다고 싫은 소리를 하는 제게 아내는 제가 딸에게 너무 관대하다고 반론을 펴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딸에게는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빠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크로케 게임 A Game of Croquet, oil on canvas, 1872
바닷가 모래밭에서 크로케 게임이 열리고 있습니다. 요즘 어르신들이 즐겨 하는 게이트볼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크로케는 여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크로케 게임은 19세기 화가들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주제였는데 그만큼 사람들에게 친숙했다는 뜻이겠지요. 아베마가 열아홉 살 때 그린 작품으로 이미 그림에 대한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베마를 지도한 선생님 중에는 카롤루스 뒤랑과 샤를 샤플린도 있었습니다. 뒤랑은 많은 화가들의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다음에 다룰 계획입니다. 타고난 재능과 좋은 선생님을 만난 그녀의 솜씨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상당 수준에 올랐던 모양입니다.

사라 베르나르트의 초상화 Portrait of Sarah Bernhardt, 31.5x20.5cm, oil on canvas
초상화라고 하지만 아주 빠른 붓 터치와 함께 과감한 생략 그리고 단순하게 배경이 처리되면서 사라 베르나르트의 특징만 남은 듯합니다. 초상화는 사진처럼 정교한 맛도 있어야겠지만 이렇게 느낌만으로 남는 것도 매력 있습니다. 치마를 잡고 고개를 살짝 숙여 올려보는 듯한 눈매에는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동시에 만만치 않은 카리스마도 보입니다. 관상을 볼 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상 이런 사람은 보통 내공을 가지고 대하기 어렵습니다. 카리스마는 어떻게든 버텨 보는데 천진난만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거든요.
아베마가 대중들의 시선을 끈 것은 그녀가 스물세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 작품은 훗날 프랑스 연극의 여신으로 추앙받았던 사라 베르나르트의 초상화였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아베마와 사라 베르나르트는 평생 친구가 됩니다. 나이는 베르나르트가 아홉 살 많았습니다.

천사들이 노는 곳 Where Angels Play, 81.9x170.2cm, oil on canvas, 1878
천사들이 머무는 곳이 어떤가 늘 궁금했는데 이런 곳이었군요. 역시 우리 사는 세상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가운데 앉은 천사는 아주 여유로운 자세로 ‘한잔’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 옆의 천사는 빨대를 이용해서 주스 같은 것을 마시는 것 같은데, 왼쪽에서 등장하고 있는 천사는 커다란 접시에 안주를 들고 ‘서빙’하는 자세입니다. 천사들 사이에도 놀고 마시는 역할이 있고 일하는 역할이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잔’하거나 ‘서빙’을 하기에는 어린 나이인데, 내용은 고약하지만 표현은 유쾌합니다. 제 세례명이 라파엘입니다. 천사 중 한 명이죠. 제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사라 베르나르트 역시 수많은 전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여인이어서 언제고 그녀 이야기를 차분하게 써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베마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베르나르트와 동성연애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요즘 논란에서 벗어나기 힘든 주제 중 하나가 성 정체성에 관한 것인데 그 시절이라고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꽃과 함께 있는 여인 The Lady with the Flowers, 97.8x130.3cm, oil on canvas, 1883
이 작품에도 꽃과 여인이 함께 등장했습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은 여인이 몸을 기울인 만큼 꽃들도 몸을 기울인 모습입니다. 꽃들도 예쁜 여인을 향하는구나 싶습니다. 여인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사라 베르나르트의 사진을 죽 모아 놓고 비교해보니 그림 속 여인이 사라를 닮았습니다. 혹시 사라가 모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라의 노년 사진을 떠올렸다가 젊음보다 더 예쁜 것은 없다는 것을 또 확인하게 됩니다.
꽃 또한 아베마의 주요 주제였는데 구아슈, 파스텔, 수채화 그리고 에칭 기법을 이용하여 다양하게 묘사했지요. 물론 그중에서도 유화 초상화와 수채화에 더욱 집중했는데 당대의 대가 마네처럼 그녀의 작품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회화 영향이 보이는 것을 보면 19세기 유럽을 휩쓴 자포니슴(일본 미술품 애호 취향)에 대한 화가들의 호기심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후의 노래 An Afternoon Song, oil on canvas, 1885
일본풍 장식물이 곳곳에 등장하는 실내에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악보를 든 남자는 기침을 한 번 크게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잘 알고 지내는 얼굴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죠. 긴장감 때문인지 남자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기대감이 서렸습니다. 나른한 오후, 남자의 목소리가 곧 작은 홀을 가득 채우겠군요. 이왕이면 가을 향기 가득 담긴 노래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베마는 1878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 꾸준하게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대표하는 주제는 당대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이 초상화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리 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해 수많은 파리 시내 극장의 벽화가 그녀의 손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피아노에서 At the Piano, 50.2x40.6cm, oil on canvas
피아노를 치는 여인의 뒷모습은 늘 초등학생 시절로 저를 데려갑니다. 피아노가 있는 집이 한 반에 한 명이나 있을까 하던 시절이었죠. 학교 근처에 있는 골목길을 지날 때면 아침이지만 간혹 피아노 소리가 들렸습니다. 길가로 난 창을 통해 들려오는 그 소리는 마치 물이 흐르는 듯했고 그 소리가 들리면 발걸음을 아주 천천히 해서 그 창문 앞을 지나가곤 했습니다. 어린 상상이었지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은 여자일 것이고 무척 예쁠 것 같았습니다. 제게 피아노 앞에 앉은 여인은 늘 골목길에서 들리던 그 피아노 소리와 상상 속 여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갈색이 주를 이루고 있는 그림 속 여인, 이 여인도 가을을 연주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베마는 다양한 분야에서 그녀의 재능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녀는 초상화가이자 조각가였고 디자이너였습니다. 또한 판화 제작자이자 몇몇 책에는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때때로 광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정기적으로 미술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였습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 길이 명성을 남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넓은 분야를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재능이 다양하고 풍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겨울 산책 중인 우아한 여인 Elegant Woman on winter’s Walk, 41.2x31.3cm, oil on canvas
바람에 날리는 눈처럼 거친 붓 자국이 그림을 훑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눈이 쌓인 나뭇가지 건너로 보이는 건물들은 추위에 푸른색으로 물들었습니다. 강 위를 맴도는 새 몇 마리, 어두운 하늘에 걸린 모빌처럼 보입니다. 인적 없는 겨울 강가에서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강을 내려다보는 여인이 있습니다. 쉽지 않은 걸음이었을 것 같은데 여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정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렇게 서 있다가 혹시 마음마저 얼어버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1881년,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 대중들로부터 확실하게 관심을 받은 아베마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콜롬비안 엑스포의 여성관에 작품이 전시된 여류 화가 중 한 명이 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습니다. 1870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제3공화정의 공식 화가라는 영예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1900년 만국박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하고 1906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수상하게 됩니다.

플로라 Flora, 156.2x167cm, oil on canvas, 1913
꽃의 여신 플로라가 팔을 활짝 폈습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꽃들도 여신의 몸짓에 반응하는 분위기입니다. “이제부터 나의 세상이 열릴 것이니”, 여신의 이런 주문은 언제 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책장에는 계절별로 꽃을 소개하는 책이 4권이나 있습니다. 시험 문제를 풀 듯 책 속의 꽃 이름을 외우지만, 막상 길에서 숲에서 꽃을 만나면 외웠던 그 이름들은 모두 사라지고 ‘꽃’만 떠오릅니다. 저는 꽃 이름을 많아 아는 사람을 보면 저와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며칠 계속 내리는 비가 멈추면 ‘가을꽃’들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아베마는 일흔 네 살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독특한 그녀의 작품만큼 인생도 그랬을 것이라고 상상을 해보지만 그녀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얼마 안 되는 자료 속에서 읽은 아베마에 대한 인상은 평생을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에너지 많은 여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