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필립 윌슨 스티어 - 그릴 만큼 충분히 그렸어!

라라와복래 2013. 12. 28. 14:45

필립 윌슨 스티어

그릴 만큼 충분히 그렸어!

_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202215518 2013.12.05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쥔장 선동기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2009)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오랜만에 그림 여행을 떠납니다. 다시 떠나는 여행 길. 어떤 화가의 작품으로 시작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평론가들의 집요한 공격 때문에 자신의 작품 스타일을 바꾼 화가가 떠올랐습니다. 꼭 비평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런 모습이 되고 말았던 영국의 필립 윌슨 스티어(Philip Wilson Steer, 1860-1942) 이야기입니다.

다리 The Bridge, 49.5x65.5cm, oil on canvas, 1887

해가 지고 있지만 사내의 말은 끝날 줄을 모릅니다. 한 발을 다리 난간에 걸치고 몸을 기댄 그의 몸짓에서는 반드시 결론을 내겠다는 결심도 보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보통은 나란히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기 때문이죠. 혹시 남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여인은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남자는 오른쪽으로 사라질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얼굴을 반쯤 돌려줄 만도 한데 여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강 위에 배, 어둠 속에 잠기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평론가들의 평은 대단했습니다. ‘고의적으로 못 그린 척하거나 광란의 몸짓’이라는 말을 듣고 스피어는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할까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절제된 색과 대기에 녹아든 빛이 훌륭하게 묘사되었지만 기존의 틀에 갇혀 있던 평론가들에게는 그저 그런 작품이었던 모양입니다.

스티어는 3남매의 막내로 리버풀 근처의 버컨헤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였고, 스티어가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그에게 확실한 미술 기초를 지도한 첫 선생님이었습니다. 스티어는 어려서 도록 한 권을 보게 되는데 자신이 태어나기 3년 전에 맨체스터에서 열린 그림 전시회의 것이었습니다. 꼼꼼하게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는 화가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어려서 읽은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꾸는 것,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전쟁은 어떻게 되었지? What of the War?, oil on canvas, 1881

요즘 전쟁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신문을 편 할아버지의 미간이 좁아졌습니다. 주름진 얼굴에 걱정이 내려앉았습니다. 전쟁에 대한 소식도 궁금하겠지만 전장에 나간 친지나 지인에 대한 안위를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총소리와 화약 냄새 그리고 단발마의 외침이 신문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지 할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신문에서 전쟁 이야기가 사라지는 날은 도대체 언제쯤일까요?

글로체스터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끝낸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사우스 캔싱턴 미술학교에 진학, 공부를 계속합니다. 2년간의 학업이 끝나고 로열 아카데미에 진학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그 후 그의 인생을 보면 시험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중간 중간 거쳐야 하는 그 관문 앞에서 좌절했던 분들께 스티어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타플 해변 Beach at Etaples, oil on canvas, 1887

해안으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는 흰 점으로 여기저기 남았고 색의 농담으로 묘사된 파도의 일렁임 속에 서 있는 사람들과 배를 모는 사람, 멀리 보이는 해안가 모두가 검은 실루엣으로 남았습니다. 간단해서 여백이 남았고 그래서인지 해변은 적막하게 다가옵니다. 생략이 차지한 자리는 늘 여운이 남는 법이죠. 그 여운 때문에 철이 조금 지난 바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 바다에 서면 선명하기보다는 모호하고 가슴이 뛰기보다는 숨을 고르게 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 바다, 지금도 잘 있겠지요.

입학시험에 실패한 스티어는 파리 유학으로 진로를 바꿉니다. 파리에 있는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한 그는 그 곳에 모인 영국과 미국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당시 유행했던 파리의 미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당대를 휩쓸던 인상파의 물결을 피하기는 어려웠겠지요. 그리고 다음 해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 카바넬의 지도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험이 문제였습니다. 불어 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만 실패하고 만 것이죠. 스승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받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수였겠지요.

해변의 젊은 여인 Young Woman on the Beach, 125.5x91.5cm, oil on canvas, c.1888

몇 년 전 인상파 전시회 때 한국에 왔던 작품입니다. 그림 속에서 뿜어 나오는 빛 때문에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잘려 나간 오른쪽의 태양은 바다 위에 반짝거리는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그 햇빛을 등지고 앉은, 모자를 쓴 여인 옆에는 꼭 그만한 길이의 그림자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인의 모습이 어찌나 날렵한지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빛도 좋고 바람도 좋은 해변, 모자챙을 가볍게 쥔 여인의 가슴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지난 여름도 저렇게 상큼했었을까요?

언어 시험에 실패한 스티어는 결국 영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첼시아에 화실을 마련한 그는 겨울에는 그림을 그리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여름에는 바닷가에 머물곤 했습니다. 그는 바다를 사랑했고 그가 가장 좋아했던 주제는 바닷가에 있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윌버스윅에서의 공기놀이 Knucklebones, Walberswick, oil on canvas, 1888~1889

공기놀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비슷한 모양입니다. 누워서 보는 아이도 있고 혼자서 딴 짓을 하는 아이도 보입니다. 여자들 사이에 앉은 검은 옷의 남자 아이를 보다가 예전 제 생각이 났습니다. 공기놀이에 끼고 싶었는데 여자 아이들 사이에 도저히 낄 용기가 안 나더군요. 그림 속 아이처럼 저도 한 발짝 떨어져서 구경을 했습니다. 물론 제가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여자 아이가 잘하면 나도 모르게 손을 불끈 쥐었죠. 해변의 자갈들이 마치 색종이를 뿌려 놓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도 해변의 색종이 속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1883년부터 로열 아카데미에 전시를 시작한 스티어는 1886년에 설립된 신영국미술협회(New English Art Club)의 창립 멤버가 됩니다. 이 단체는 자신들의 작품이 로열 아카데미에서 거부되었다고 느낀 젊은 화가들의 모임으로 대부분 프랑스에서 공부를 한 젊은 화가들이었습니다. 일상생활을 작품 주제로 가져온 그들의 첫 전시회에 50명의 화가가 참여했다고 하니까 당시 영국 미술계에 상당한 파워를 보여준 것이지요.

달려가는 소녀들, 윌버스윅 항구 Girls Running, Walberswick Pier, 62.9x92.7cm, oil on canvas, c.1890

저녁 해가 지는 항구 선착장. 소녀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눈부시지 않은 햇빛이 그녀들의 몸을 감싸는 동안 그림자는 아직 선착장 끝에 머물러 있습니다. 푸른 바다 위의 흰 돛은 명징하고 어스름 저녁 햇살은 부드럽습니다. 생각해보니까 뛰고 싶은 나이입니다. 마음을 흔드는 한 가지만 있어도 온 몸에 열이 일어나는 시기이거든요.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평론가들의 평은 한마디로 ‘죄악’이었습니다. 두 소녀의 팔을 보면 원래는 서로 손을 잡고 있었는데 나중에 손을 다시 그린 흔적이 보입니다. 그림자는 아직 손을 잡고 있습니다. 세간의 시선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아방가르드의 정형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의 단발마가 들리는 듯합니다.

1887년을 프랑스 에타플 예술촌에서 보낸 스티어는 안개에 젖은 인상파 화풍의 풍경화들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곧 월터 시커트와 함께 영국 인상파 화가의 선두 주자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후 무르익은 화풍으로 그는 5년 정도 영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윌버스윅. 조심스레 걷는 아이들 Walberswick. Children Padding, oil on canvas, 1891

발목도 잠기지 않을 것 같은 얕은 물인데도 아이들의 걸음이 조심스럽습니다. 아직도 물이 무서운 저는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낯설다는 말은 내 몸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머리는 분명히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요. 보는 것이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기는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을 먼저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바닷가의 어린 소녀들, 용기를 내보고 있습니다.

티어는 윌버스윅에서 인상파 화풍으로 수많은 해변 풍경화를 그렸었지요. 1890년대, 인상파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스티어의 작품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끝없이 그의 작품을 비판하는 비평가들 때문에 그는 점차 종래의 영국 스타일 화풍으로 변화를 꾀합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싫은 이야기가 자꾸 들리면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내가 보여주지!’라는 오기가 생길 수도 있는데 혹시 스티어도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수국 hydrangeas, oil on canvas, 1901

활짝 핀 수국을 옆에 두고 여인은 고양이와 놀이에 빠졌습니다. 흔들리는 것을 눈앞에 두면 정신없이 그것을 잡으려고 좌우로 움직이는 고양이가 생각납니다. 소파도 근사하고 여인의 옷도 화려합니다. 그런데 붉게 달아 오른 여인의 뺨을 보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내에 있을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면 좋을 것 같은데 고양이하고 노는 것이 답답하게 보이거든요. 혹시 검은 고양이가 여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속에서 끓고 있는 열정을 간신히 참는 듯한 여인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그림 한 구석에 서 있는 수국 몇 송이를 제목으로 삼은 화가의 마음도 궁금합니다. 그림을 보다가 묘한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스티어 작품을 비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존 싱어 서전트는 비평가들이 무슨 말을 해도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1893년부터 스티어는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합니다. 1930년까지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을 학생 지도에 참여 했으니까 선생님으로도 훌륭한 역할을 했겠다 싶습니다.

거울 앞에 앉은 모델 Model Seated before a Mirror, oil on canvas, 1894

간혹 거울 앞에 선 여인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납니다. 선명하게 거울에 얼굴이 담긴 경우가 있고 이 작품처럼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모호한 거울 속의 얼굴이 좋습니다.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여러 번 거울 속의 저를 만납니다. 분명한 것은 그때마다 제 얼굴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제 얼굴이 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호한 얼굴은 그 변화를 알 수가 없어서 좋습니다. 얼굴이 변하지 않는 거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거울 앞에 서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밝은 얼굴이 하루 종일 떠 있는 거울 같은 것 말입니다. 마음이 보이는 거울이면 더욱 좋겠지요.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정보국에서 영국 해군을 그리는 작업을 했던 스티어는 전쟁이 끝나고 수채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불필요한 것과 구체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빛을 잘게 부수는 그의 실험은 모네와 컨스터블의 작품과 닮기 시작합니다. 1930년 학교를 그만둔 그는 다음 해 영국 정부로부터 메리트 작위를 받습니다.

검은 모자의 앉아 있는 누드 Seated Nude, The Black Hat, oil on canvas, c.1900

여인의 나신이 당당해 보입니다. 빛이 부서지는 흰 피부와 검은 색 모자, 배경이 대비되면서 여인의 선이 선명해졌습니다. 꽃을 든 여인의 자세에서는 묘한 에로티시즘도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이 여인의 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가슴과 엉덩이가 없었다면 여인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이 말이 어느 나이 때의 여인에게까지 유효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만들어지지 않은 선이라면 저는 위의 말에 동의합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몸 위에 남겨 놓은 선은 더욱 아름답지요.

1894년 단독 전시회를 처음 개최한 스티어는 1929년 회고전이 열릴 때까지 많은 전시회에 참석했습니다. 그의 작품 내용은 즐거움이 가득한 것들이었지만, 그러나 처음 얻었던 관심으로부터는 멀어졌습니다. 1935년부터 시력이 나빠져 1940년에는 더 이상 작품을 제작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1942년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남긴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그릴만큼 충분히 그렸어.” 화가가 남길 수 있는 최고의 말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