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장미의 기사'(Richard Strauss, Der Rosenkavalier)
라라와복래2014. 3. 8. 13:36
Richard Strauss, Der Rosenkavalier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장미의 기사'
Richard Strauss
1864-1949
Princesse Werdenberg: Felicity Lott
Octavian: Anne Sofie von Otter
Sophie: Barbara Bonney
Baron Ochs: Kurt Moll
Herr von Faninal: Gottfried Hornik
Chor und Orchester der Wiener Staatsoper
Conductor: Carlos Kleiber
Wien, 1994.03
Carlos Kleiber/Wiener Staatsoper 1994 - Richard Strauss, Der Rosenkavalier
오페라 작곡가와 대본가로 환상의 콤비를 이뤘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은 1900년경에 서로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이 협업을 시작한 것은 1909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오페라 <엘렉트라>부터였습니다. 이 작업이 끝나고 나자 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 희극 같은 오페라를 만들고 싶으니 적당한 소재를 골라 대본을 써 달라.”고 호프만스탈에게 부탁했고, 한동안 고심한 호프만스탈은 드디어 작곡가의 마음에 꼭 드는 스토리를 구상해냈답니다. 이렇게 해서 1911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작품이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가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정 시대의 빈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장미의 기사>입니다.
‘장미의 기사’라는 제목을 보고 상상하게 되는 모습은 아마도 ‘장미 문장(紋章)이 새겨진 방패를 든 기사(騎士)’ 같은 낭만적인 그림일 것입니다. 그러나 ‘장미의 기사’란 우리말로 옮기면 '함진아비’쯤 되는, 청혼의 전령을 뜻합니다. 18세기 빈의 귀족사회에서는 양가의 혼담이 이루어진 뒤에 신랑 쪽 친척 한 사람이 신부 될 처녀에게 은으로 만든 장미를 예물로 전달해 정식 청혼의 예를 갖추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사실 이런 ‘은장미 전달식’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고, 그저 <장미의 기사>를 쓴 작가가 지어낸 전통이라고도 합니다). 그때 은장미를 들고 오는 친척 청년을 ‘장미의 기사’라고 불렀다는 것이죠.
모차르트를 모방한 20세기 오페라
1막
1막은 베르덴베르크 후작부인(군사령관 부인)의 화려한 침실에서 시작됩니다. 서른두 살의 후작부인(소프라노)과 부인의 정부(情夫)인 열일곱 살의 옥타비안 백작(메조소프라노)이 은밀한 사랑의 밤을 보내고 난 침대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둘이 정답게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부인의 친척인 옥스 남작(베이스)이 들어오지요. 도망갈 곳이 없어 옷장 속에 숨었던 옥타비안은 옷장 속에서 하녀로 꾸미고 남작 앞에 나타나는데, 바람둥이 옥스 남작은 옥타비안이 진짜 여자인 줄 알고 옥타비안에게 집적댑니다. ▶침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후작부인과 그녀의 정부 미소년 옥타비안.
슈트라우스는 이 옥타비안 역을 원래 소프라노 배역으로 작곡했지만, 후작부인과 음색을 달리 하기 위해 대부분의 경우 메조소프라노가 이 역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성 가수가 남장을 하고 남자 역할을 하다가 극중에서 다시 여장을 한다는 설정은 물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모방한 것입니다. 메조소프라노가 분장한 미소년 옥타비안의 모습에서 관객은 누구나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10대 바람둥이 케루비노를 연상하게 되지요.
옥스 남작이 후작부인에게 자신의 결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그 사이에 다양한 사람들이 부인을 찾아와 인사를 하고, 유명한 테너 가수가 와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후작부인은 장난으로 옥타비안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그를 옥스의 결혼을 위한 ‘장미의 기사’로 추천합니다.
옥스 남작의 신붓감은 수도원에서 자랐고 열다섯 살이 채 안 된 처녀로, 신부의 아버지 파니날(바리톤)은 작위를 돈 주고 사서 이제 막 귀족이 된 부호였습니다. 후작부인은 호색한에다 책임감 없는 옥스 남작을 경멸하지만, 어린 애인과 밀회하는 자신도 별로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회의에 빠집니다. 자신이 늙어 간다는 생각에 서글퍼진 부인은 “시간이 흐르는 걸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시간은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리지. 때로 한밤중에 그 소리를 듣고 시계란 시계는 모조리 멈춰 놓지만 소용없는 일”이라고 노래합니다. 옥타비안이 머지않아 젊은 연인을 사귀고 자신을 떠나 갈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워진 후작부인은 옥타비안에게 맘에 없이 냉랭한 태도를 보입니다. 옥타비안은 부인이 자신을 멀리하려 한다며 화가 나 가버리고, 부인은 곧 후회합니다.
2막
2막은 장미의 기사를 맞이할 준비로 온통 들떠 있는 파니날의 저택에서 시작됩니다. 수도원에서 자란 딸 조피(소프라노)는 결혼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들떠 있습니다. 마침내 장미의 기사 옥타비안이 찾아와 조피에게 신랑감 옥스가 보낸 은장미를 건넵니다. 슈트라우스의 영롱하고 환상적인 음악이 무대를 채우는 순간 옥타비안과 조피는 첫눈에 반해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제가 이 영예로운 임무를 맡았습니다.”로 시작되는 두 사람의 듀엣에 작곡가는 천상의 행복을 실감하게 하는 음악을 썼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함진아비와 신붓감이 첫눈에 반해 주위를 잊고 꿈속을 헤매는 이런 장면은 상당히 희극적이죠.
옥타비안보다 조금 뒤에 옥스 남작이 도착해 조피를 예의 없이 희롱하자 격분한 옥타비안은 칼로 남작에게 상처를 입히고, 파니날의 집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조피가 남작과 결혼 안 하겠다고 버티자 아버지 파니날은 다시 수도원으로 보내버리겠다고 딸을 위협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옥타비안은 사람을 시켜 옥스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죠. 남작이 눈독 들인 그 하녀(옥타비안 자신)가 내일 밤 남작을 몰래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는 내용입니다. 신이 난 옥스는 “내가 없으면 그대는 날마다 슬픔에 싸여 살겠지. 하지만 나와 함께라면 어떤 밤도 길지 않을 걸...”이라는 자신의 왈츠 주제 선율을 되풀이하며 즐거워합니다.
대본가 호프만스탈은 몰리에르의 희극에서 이 호색한의 캐릭터를 얻어 왔지만 슈트라우스는 옥스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면서 베르디 최후의 작품 <팔스타프>의 음악을 모방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 재위 기간(1745-1765)의 빈 궁정에는 왈츠가 없었다고 합니다. 왈츠가 궁정에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끈 건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죠.
조피에게 은장미 장식을 전달하는 ‘장미의 기사’ 옥타비안. 이 순간 옥타비안과 조피는 첫눈에 반하게 된다.
시간과 노쇠와 죽음에 대한 성찰
3막
3막은 빈 근교의 조용한 레스토랑입니다. 옥스 남작은 이 음식점에 방을 잡아 놓고 후작부인의 하녀를 기다립니다. 옥타비안은 다시 여장을 하고 나타나 옥스를 유혹하는데, 옥스는 하녀를 포옹하려 할 때마다 자기를 찌른 옥타비안의 얼굴이 그 하녀 얼굴에 오버랩되어 두려움에 떨죠. 그때 옥타비안이 밖에 대기시켰던 하녀와 고아들이 나타나 옥스를 남편, 아빠라 부르며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자 경찰이 출동해 ‘풍속을 해친 죄’로 옥스 남작을 체포하려 하죠. 옥타비안의 전갈을 받고 현장에 들이닥친 파니날은 사윗감의 형편없는 행태를 보고 파혼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나타난 후작부인은 다 장난이라며 경찰을 돌려보내 남작을 궁지에서 구해줍니다. 옥스 남작은 후작부인과 옥타비안의 은밀한 관계를 눈치 채지만, 조피 앞에서 침묵을 지킨 채 그 자리를 떠납니다.
옥타비안과 후작부인, 그리고 조피만 남게 되자 부인은 옥타비안이 새로운 사랑에 빠졌음을 알아차리고, 옥타비안을 조피에게 양보하기로 합니다. 부인이 먼저 떠나자 조피와 옥타비안은 뜨겁게 포옹하며 ‘이건 꿈일 거야’, 하는 아름다운 듀엣으로 극을 마무리합니다.
Herbert von Karajan/Wiener Philharmoniker 1960 - Richard Strauss, Der Rosenkavalier
Princesse Werdenberg: Elisabeth Schwarzkopf
Octavian: Sena Jurinac
Sophie: Anneliese Rothenberger
Baron Ochs: Otto Edelmann
Herr von Faninal: Erich Kunz
Chor der Wiener Staatsoper
Salzburg Mozarteum Orchestra
Wiener Philharmoniker
Conductor: Herbert von Karajan
Salzburger Festspielhaus
1960.08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돈 후안> 등의 교향시로 유명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다음으로 비중이 큰 독일어 오페라 작곡가입니다. 궁정음악가인 아버지 덕분에 뮌헨 궁정악장에게 음악 수업을 받았고,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전공하며 쇼펜하우어를 탐독했다고 합니다. 바그너와 리스트에 심취해 초기에는 그들의 아류로 평가되는 작품들을 작곡했지만, 차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내 매끄럽고 감각적인 선율의 오페라들을 남겼습니다.
초기 오페라인 <살로메>와 <엘렉트라>에서 음악적으로 아방가르드의 최첨단으로 치달았던 슈트라우스는 <장미의 기사>에서 다시 조성음악과 ‘멜로디 오페라’로 복귀했고, 이후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그림자 없는 여인>, <아라벨라> 등 최고의 소프라노 배역을 위한 작품들을 썼습니다. 뮌헨, 바이마르, 베를린, 빈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역임하며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펼친 그는 말년에 나치 정권에 동조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장미의 기사>의 성악부 형식은 가벼운 레치타티보와 아리오소(arioso.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중간 형태)를 오가다가 차츰 고조되는 감정을 이따금 풍성한 멜로디로 폭발시킵니다. ‘시간과 노쇠와 죽음에 대한 성찰’을 주제로 택한 이 오페라의 대본가는 “행복하고 황홀한 한 순간에 영원한 시간이 깃들어 있는가?”라고 관객에게 묻고 있는 듯합니다.
추천 음반 및 영상물(후작부인-옥타비안-옥스 남작-조피 순)
[음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크리스타 루트비히, 오토 에델만 등.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1956년 녹음
[음반] 레지느 크레스팽, 이본느 민튼, 만프레트 융비르트 등. 게오르크 솔티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1968년 녹음
[DVD] 르네 플레밍, 조피 코흐, 프란츠 하블라타, 디아나 담라우 등.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니아 합창단, 헤르베르트 베르니케 연출, 2009년 바덴바덴 페스티벌 극장 실황(한글 자막)
[DVD] 펠리시티 로트, 안네 소피 폰 오터, 쿠르트 몰, 바바라 보니 등.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오토 쉥크 연출, 1994년 빈 공연 실황
글 이용숙(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