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io Abbado - Opening Concert of Lucerne Festival 2013
Brahms, Tragic Overture, Op.81
Schoenberg, Orchestral Interlude and "Song of the Wood Dove"
Beethoven, Symphony No.3 in E flat major "Eroica", Op.55
Claudio Abbado, conductor
Lucerne Festival Orchestra
Mihoko Fujimura, mezzo-soprano
Culture and Convention Centre, Lucerne
2013.08.16
지난 2014년 1월 20일에 타계한 이탈리아의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우리 시대 최고의 거장이었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에서 ‘최고의 거장’으로 불리는 지휘자는 여럿 있지만, 아바도는 그들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 이후 최고의 스타 지휘자였고, 특유의 ‘민주적 리더십’으로 지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었다.
어느 엘리트 지휘자의 거침없는 여정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1933년 6월 26일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유능한 음악가 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최고의 명문들인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과 빈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유수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데뷔했다. 피아노 연주 실력도 뛰어났고 작곡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한때 진로를 놓고 고민도 했지만, 1963년 미국에서 열린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 뉴욕 필에서 번스타인의 조수로 일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1980년)
이후 아바도의 성공가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1964년에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눈여겨 본 카라얀이 그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초대했고, 거기서 그는 빈 필을 이끌고 말러의 ‘부활 교향곡’을 지휘하여 대호평을 받았다. 빈 필은 곧바로 그를 무지크페라인 황금홀(빈 필의 홈그라운드)로 초청했고, 루체른, 에든버러 등 유수의 페스티벌들과 베를린 필을 포함한 정상급 악단들도 그를 원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시간은 흘러갔고, 독일의 유력 평론가 요아힘 카이저는 40세의 그를 “우리 시대의 품위 있고 영향력 있는 몇 안 되는 지휘자”로 지목했다.
아바도는 30대 중반부터 최정상의 포스트들을 두루 섭렵했다. 1968년에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 자리에 오른 이래, 1979년 런던 심포니(수석지휘자/음악감독), 1982년 시카고 심포니(수석 객원지휘자), 1986년 빈 국립 오페라(음악감독)를 차례로 맡았다. 또 관행상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는 빈 필은 1970년대부터 그를 ‘주(主) 지휘자’로 부르며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1989년, 56세의 아바도는 카라얀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12월 16일 베를린의 필하모니에서 열린 취임 기념 공연에서 말러의 ‘교향곡 1번’ 등을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둔 그의 앞날은 마냥 밝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바야흐로 ‘세계 최강의 권력을 쥔 지휘자’(슈피겔)였고,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떠난 클래식 음악계의 주인공 자리는 온전히 그의 몫이 되는 듯싶었다.
1977년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와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최고의 자리에서 시련에 직면하다
그러나 ‘제왕’ 카라얀의 그림자가 채 걷히지 않았던 베를린 필에서의 임기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는 악단의 체질을 바꾸고 프로그램에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편성하는 등 혁신을 감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인 저항에 부닥쳤던 것이다. 처음에 단원들은 ‘마에스트로’가 아니라 ‘클라우디오’로 불리기를 원하는 탈권위적인 신임 음악감독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가 악단이 가진 고유의 음향적 특성을 토대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가 하면 아바도는 오케스트라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진정한 파트너로 간주하고 상호 책임 하에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주기를 희망했다.▶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보수적이었던 카라얀과는 달리 아바도는 아방가르드 음악, 아직 주목받지 못한 음악들에 적극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전적인 레퍼토리들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다. 일련의 ‘테마 음악회’ 시리즈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익숙한 명작들과 낯선 수작들을 나란히 무대에 올렸고, 작품들 간에 문학적ㆍ역사적 연결성을 견지한 지적인 공연 프로그램을 꾸준히 관철시켰다.
아울러 악단의 체질도 꾸준히 변화시켜 나갔다. 콜야 블라허(악장), 알브레히트 마이어(오보에), 에마뉘엘 파위(플루트) 등 젊은 단원들이 속속 합류했고, 카라얀 시절의 단원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몇 년이 지나자 절반 이상의 자리가 새 얼굴들로 채워졌다. 또 카라얀이 거부했던 피에르 불레즈,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같은 ‘이질적인’ 지휘자들을 초빙하여 레퍼토리와 연주 스타일의 양면에서 새로운 실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임기 중에는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 했다. 베를린의 청중들은 아직 현대음악에 익숙하지 않았고, 예의 지적인 공연 프로그램들은 너무 교육적이거나 너무 복잡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베테랑 단원들과 아직 적응이 덜 된 신참 단원들이 공존하는 악단의 앙상블은 종종 귀에 거슬릴 정도로 거칠고 조화롭지 못하게 들렸다. 이제 ‘아바도의 베를린 필’은 언론의 표적이 되었고, 관객들의 지지도 갈수록 약화되었다. 한 비평가의 말처럼, 당시 아바도는 악보에 관한 한 ‘모든 면에서 충실’했지만, 다수의 청중을 ‘매료시키지 못하는 고고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지휘자였다. 사람들은 어느새 ‘카라얀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1997년 지휘 도중 단원들과 교감하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실 그때까지 아바도의 지휘는 ‘탁월한 모범생’을 연상시켰다.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명석하게 다루는 그의 음악은 언제나 반듯하고 견실하며 치열했지만, 한편으로는 유연함과 자연스러움, 심오함이 부족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카라얀을 위시한 과거의 거장들이 지녔던 ‘카리스마’가 그에게는 없었다. 독설가로 유명했던 거장 세르주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는 그런 그를 가리켜 “세 시간만 듣고 있으면 심근 경색이 올 지경”이라며 폄하하기도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시행착오의 과정으로 간주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진짜 문제는 아바도와 단원들 간의 신뢰가 깨지면서 불거졌다. 1997년 말, 독일의 한 신문에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리허설 과정을 스케치한 기사가 실렸다.
‘리허설 시간은 지지부진 연장되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는다. 한 시간쯤 지나자 성악 솔로 가수들이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한다. … 이윽고 3막을 연습하던 중 수석 트럼펫 주자가 벌떡 일어나 전체를 대신해서 묻는다. “클라우디오,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나요?” … 한 번은 제2바이올린 주자 가운데 한 명이 일어나 트럼펫 소리가 ‘너무 크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악장 콜야 블라허는 몸을 굽히고 아바도의 발치에서 첼로 수석 게오르크 파우스트와 한 파트의 연주 방향을 놓고 논의를 벌이기도 한다.’
‘지휘’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엎는 이 보도는 큰 파문을 일으켰는데, 가장 경악한 것은 다름 아닌 아바도였다. 악단의 내부 사정을 노출한 일부 단원들의 행태에 배신감마저 느꼈던 것이다. 결국 1998년 2월, 그는 ‘스키, 요트, 독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서’ 2002년에 베를린 필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종신’을 전제로 취임한 음악감독이 중도 하차를 선언한 것은 베를린 필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기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지없이 경건한 모습으로 지휘하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그러던 와중에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2000년 여름, 샤르데냐 섬의 별장에서 쓰러진 아바도가 위암 수술 후 투병생활에 들어갔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그대로 비극적 최후를 맞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부쩍 수척해지긴 했어도 기적적으로 부활했고, 이후 자신의 인생과 예술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 나갔다.
베를린 필에서의 그의 노력은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사선에서 돌아온 지휘자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집중력과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고, 악단은 변화된 체질에 적응을 마치면서 풍만하고 윤기 넘치던 ‘카라얀 사운드’는 완전히 다른, 한결 담백하고 투명하며 근육질적인 ‘아바도 사운드’를 뿜어냈던 것이다. 2001년에 진행된 로마 투어 공연 실황을 담은 그들의 두 번째 ‘베토벤 교향곡 전집’(영상물, 음반)은 그 흐뭇했던 피날레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Mahler, Symphony No.1 in D major 'Titan'
Claudio Abbado, coductor
Lucerne Festival Orchesta
Lucerne Festival 2009
Culture and Convention Centre, Lucerne
2009.08.12
만년의 경지, 오케스트라의 이상향
베를린 필에서 물러난 이듬해부터 아바도는 스위스의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만년의 고고한 경지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매년 여름, 그의 부름에 응하여 휴가도 기꺼이 희생하고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뛰어난 연주자들과 더불어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청중에게 ‘다 함께 만들어 가는 음악’의 진수를 선사했던 것이다.
아바도가 말년을 보낸 스위스의 아름다운 호수 도시, 루체른.
사실 아바도의 지휘 스타일은 ‘지시’보다는 ‘조율’에 가까웠다. 리허설에서 그는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주관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들의 역량과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되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연주하도록 유도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정도 덜 다듬어진 앙상블이 빚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 모든 굴곡을 거친 지휘자와 단원들이 진정한 신뢰와 공감 속에서 어우러지면, 여타의 공연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동적인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역시 영상물로 발매된 루체른 페스티벌 공연 실황 가운데, 말러의 교향곡 2번, 3번, 9번과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런 일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루체른에서 아바도와 함께 호흡했던 한 연주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음악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이 있습니다. 묘한 모순이지만 정말로 그래요. 제가 경험했으니까요. 오케스트라에 있으면 그가 음악이 알아서 연주되도록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앞에 서서 벌어지는 일을 조율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나 이것이 당연히 벌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을 머릿속에 몸속에 완전히 담아 두고 있지요. 이런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은 행운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 연주하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연주합니다. 그가 그렇게 만드는 거죠. 그런데도 그가 소리를 책임집니다. 강력한 개성으로 상황을 이끌어 가는 겁니다.”
사실 이런 ‘민주적 리더십’을 통한 성취가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단 웬만큼 어려운 작품도 ‘알아서’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연주자들이 모여야 하고, 그들이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탁월한 지휘자가 지휘대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음악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능력, 소통, 신뢰, 희생, 헌신 등 모든 여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그의 동료들이 루체른에서 펼쳐 보였던 것은 모든 음악인이 꿈꾸는 이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2008년 5월 베를린 발트뷔네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
아바도가 2003년 이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진행한 일련의 공연들은 영상물로도 발매되어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그의 원숙한 음악세계를 전파했다. 그중에서도 이제 미완으로 남게 된(2012년 여름으로 예정되었던 8번 공연은 취소되었고, 10번의 아다지오 악장은 발매되지 않았다) ‘말러 교향곡 사이클’은 현대 연주사의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을 담은 감동적인 기록이다. 그것은 아마도 첼리비다케의 마음마저 움직였을 진실의 음악, 영혼의 음악이었다. 만년에 아바도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뒤를 이은 사이먼 래틀에게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내 병은 끔찍했어. 그러나 결과가 꼭 나쁘지만은 않았지. 내 안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말이야. 마치 위를 잃은 대신 내면의 귀를 갖게 된 것 같았다네. 그 느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설명할 순 없지만. 난 아직도 그때 음악이 내 삶을 구했다고 느낀다네.”
이제 그는 떠났지만, 그의 진실과 영혼이 담긴 유산들은 우리 곁에 남아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고 진한 울림과 여운을 안겨줄 것이다.
2014년 1월 21일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장례식장에서 줄을 잇는 추모 행렬.
“Abbado Forever” - Concert in memory of Claudio Abbado
Funeral March from Beethoven's Eroica
Daniel Barenboim, conductor
La Scala Philharmonic Orchestra
아바도의 주요 경력
1968~1986 밀라노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
1979~1987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음악감독
1982~1986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객원 지휘자
1986~1991 빈 국립 오페라 음악감독
1989~2002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음악감독
2003~2014 루체른 페스티벌 음악감독
2004~2014 오케스트라 모차르트(볼로냐) 예술감독
추천음반 10선(협연 제외, 무순)
멘델스존: 교향곡 3번 & 4번 - 런던 심포니 Decca
말러: 교향곡 제2번 - 시카고 심포니 외 DG
쇤베르크, 바르샤바의 생존자 외 - 빈 필 외 DG
말러: 교향곡 1번 - 베를린 필 DG
브람스: 교향곡 전집 - 베를린 필 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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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모차르트, 마술피리 -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외 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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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베를린 필 신년음악회 실황: 카르멘에게 바침 Arthaus
1999년 잘츠부르크 대성당 카라얀 추모 콘서트 실황: 모차르트, 레퀴엠 Arthaus
베를린 필 2002년 유러피언 콘서트 실황: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자크 외 EuroArts
말러, 교향곡 2번 -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 EuroArts
말러, 교향곡 9번 -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 Accen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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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 밀라노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외 DG
[오페라] 로시니, 체네렌톨라 - 밀라노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외 DG
[오페라] 베르크, 보체크 - 빈 국립 오페라 실황 Kultur
글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 감상실 ‘무지크바움’ 실장과 한국바그너협회 사무간사를 역임하였다. 무지크바움, 부천필 아카데미, 성남아트센터, 풍월당에서 클래식음악 교양강좌를 맡고 있다. <객석>, <스테레오뮤직>, <그라모폰>, <라무지카> 등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 노트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