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화군생(接化群生), 장르와 신분의 경계를 넘어서
풍류, 음악을 말하다
풍류의 미스터리 - 긍정 혹은 부정
바람 ‘풍(風)’자와 물 흐를 ‘유(流)’자로 이루어진 풍류(風流)라는 말은 얼핏 바람과 물의 흐름 정도로 뜻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상당히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풍류도(風流道)라 하여 유(儒)ㆍ불(佛)ㆍ선(仙) 3교를 포함한 한국 고유의 정신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사실 풍류는 일상 속의 쓰임새만 보더라도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 또는 ‘운치가 있는 일’처럼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고, 바람기가 있고 돈 잘 쓰며, 멋 부리고 타락한 사람을 나타내는 ‘풍류남아(風流男兒)’처럼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국악에서 풍류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주로 음악과 관련되어 쓰였다.
국악에서 풍류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주로 음악과 관련되어 쓰였다. 예를 들면 줄풍류ㆍ대풍류ㆍ사관풍류ㆍ풍류방ㆍ풍류객 등이 그것이다. 줄풍류ㆍ대풍류는 악기 편성을 뜻하고, 사관풍류는 악곡을 가리키며, 풍류방ㆍ풍류객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 모이는 곳, 음악을 하는 사람 등을 뜻하게 된다.1) 풍류는 이렇게 다양한 뜻으로 쓰였기에, 본래 뜻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역사적으로 쓰인 맥락을 살피면 대략의 의미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역사 속의 풍류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풍류를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최치원이 말한 ‘풍류’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郎碑序)에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이른다. 그 가르침(敎)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불교ㆍ도교ㆍ유교)를 포함하며 접화군생(接化群生)한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풍류’라는 말이 있으며, 이 뜻은 대체로 유불선 삼교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포함’이라는 말에 주목을 해야 한다. 자칫 풍류를 단순히 유교ㆍ불교ㆍ도교 세 가지 사상을 합친 것에 불과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치원
이러한 의문에 대해 범부 김정설(凡夫 金鼎卨)2)은 이 ‘포함’을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풍류의 의미를 ‘멋과 조화의 정신’으로 이해하면서 단순히 세 가지 사상을 합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었던 풍류 사상 자체에 이들 사상과 유사한 측면이 있어서 포함이라는 말을 썼을 뿐이라고 보았다.3)
‘포함삼교’는 다른 사상에 빗대어 설명한 말이지만, ‘접화군생’은 그야말로 풍류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천천히 풀어보면, “군생(群生)에 접(接)하여 화(化)한다.” 다시 말해, “만물과 접하면서 교화한다(조화된다)”는 뜻이다. 교화는 인간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지만, 결국 만물과의 관계로 확대하면 조화로움을 뜻하는 말이다. 필자는 풍류가 이후에 유독 음악과 관련 지어 언급되는 이유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음악의 목적은 인격의 완성인 동시에 만물과의 조화로움, 곧 어우러짐과 닮아 있다. 풍류라는 말에는 이러한 어우러짐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 있다.
최치원이 화랑의 역사를 말하면서 풍류를 언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를 살펴보면 대략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는 신라의 쇠퇴기였다. 당나라의 문화가 크게 유행했던 분위기와 이런 외래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큰 틀로서 풍류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나타난 다양한 의미들은 바로 이러한 풍류의 뜻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유교의 음악
‘樂’은 한자로 ‘즐거울 락 , 좋을 요, 음악 악’을 뜻한다. 음과 뜻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악(樂)은 독립적으로도 말할 수 있겠지만, 유학에서는 보통 예(禮)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공자가 음악의 중요성을 언급한 이후로 다시 그 본질을 지적한 사람은 바로 맹자였다. 먼저 맹자와 양혜왕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맹자가 왕을 뵙고 말하였다. “왕께서 일찍이 장포에게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였다 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습니까?” 왕이 정색하며 대답하였다. “과인(寡人)은 선왕(先王)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세속의 음악을 좋아할 뿐입니다.” ― <孟子>, “他日見於王曰, 王嘗語莊子以好樂, 有諸. 王變乎色曰寡人非能好先王之樂也. 直好世俗之樂耳.”
맹자가 말하였다. “왕께서 음악을 매우 좋아하신다면 제(齊)나라는 거의 다스려질 것입니다. 지금 음악이 옛 음악과 같습니다.” ― <孟子>, “曰王之好樂甚則齊其庶幾乎. 今之樂由(猶)古之樂也.”
맹자가 물었다. “적은 사람과 음악을 즐김과 많은 사람과 음악을 즐김이 어느 것이 더 즐겁습니까?” 왕이 답하였다. “많은 사람과 더불어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 <孟子>, “曰可得聞與. 獨樂樂與人樂樂孰樂. 曰不若與人. 曰與少樂樂與衆樂樂孰樂. 曰不若與衆.”
맹자는 적극적으로 왕과 직접 대화를 하며 설득한다. 여기에는 음악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왕이 세속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는데도, 맹자는 주저 없이 세속의 음악을 좋아해도 상관없다고 받아친다. 어째서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맹자는 철저하게 왕 노릇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음악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속세의 음악을 좋아해도 좋으니 백성과 함께 좋아하고 즐기라는 말이다. 왕이 ‘어떤 음악을 듣고 즐겨야 하는지’는 별 상관없다. 단지 ‘음악을 누구와 함께 들으며 즐기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왕에게는 백성들을 잘 다스릴 의무가 있지만 그 시작과 완성은 바로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거워하는 데 있음을 지적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굳이 음악을 예로 든 이유는 계층에 상관없이 함께 즐기기에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조선시대의 음악
조선의 경우는 어떨까? 건국이념이었던 주자학(朱子學)에 있어서도 음악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그의 <조선경국전>에서 종묘의 악, 조정의 악, 민간의 악을 나누어서 말하지만, 결국 이 모든 음악은 올바른 성정에서 근원하여 표현된 것으로, 서로를 화합하게 하고 교화를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음악의 효과라는 것이다. ◀정도전
이런 생각은 세종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음악을 정리하고 백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음악을 짓게 되었다. ‘보태평(保太平)’, ‘여민락(與民樂)’이 이때 지어진다. 특히 ‘여민락’은 제목 자체가 ‘백성과 함께 즐기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사실상 이때 정비된 음악은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때 말하는 음악은 정치를 담당하는 통치자가 마땅히 지키고 실현해야 할 음악이었다. 정치적인 의미가 강하기는 했지만, 교화와 조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음악은 넓은 의미에서 풍류와 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종대를 정점으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궁중음악 곧 정악(正樂)은 점차 쇠퇴를 거듭한다. 당시 선비들의 기록을 보면 음악이 점차 번잡하고 본뜻을 잃어 가고 있다는 지적이 줄을 잇는다.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던 궁중음악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음악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 후기는 음악사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 시기였다. 18세기는 음악의 수용층이 점차 넓어지면서 다소 정치적이고 관념적인 음악보다는 ‘감성적인’ 음악이 좋다는 음악관이 싹트는 시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음악의 주체가 확대된 것이다. 궁중음악에 머물지 않고, 가객ㆍ기생ㆍ광대ㆍ무당ㆍ사당패 등 전문 예능인 집단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전통음악이 생성된다. 각종 문헌들에서 ‘신성(新聲)’, ‘신조(新調)’, ‘신곡(新曲)’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애호가들이 직접 노래책을 만들어 즐겼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4)

쌍검대무(雙劍對舞). <혜원풍속도첩(蕙園風俗圖帖)> 중에서, 간송미술관 소장

음악의 아름다움을 음식의 맛에 비유했던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대동풍요(大東風謠)> 서문에서 노래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당시 사대부의 행태를 비판한다.
소위 노래란 것은 모두 항간에 퍼져 있는 상스러운 말로 엮었는데, 간혹 문자가 섞여 있다. 옛것을 좋아하는 사대부로서는 가끔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그 말이 얕고 속되다 하여 군자(君子)는 모두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경(詩經)>에 이른 풍(風)이란 것도 본디 풍속을 노래한 보통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노래를 듣던 자들이 지금 사람이 노래를 듣는 것과 같지 않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오직 그 입에서 나오는 대로 노래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혹 곡조에 알맞게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천진(天眞)이 드러나면 나무하는 아이나 농부의 노래라 할지라도 또한 자연에서 나온 것이니, 여기저기서 뜯어 모아 다듬어 놓고는 말끝마다 옛것을 들먹이면서 천기(天機)를 손상시킨 사대부들이 지은 것보다는 도리어 나을 것이다. ▶청나라의 문인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
홍대용은 민간에서 지어진 노래도 올바른 성정이 깃든 음악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노래들을 모아 정리한다. 그 책이 바로 <대동풍요>(책은 전하지 않고 서문만이 홍대용의 〈담헌서〉에 남아 있다)였다. 이전에는 주로 중앙에서 노래를 만들고 연주하여 교화를 하고자 했는데, 홍대용은 민간에 전해지는 노래들 역시 옛 성인들이 말한 뜻과 일치하는 음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천진(天眞)이나 천기(天機) 같은 말은 모두 타고난 자연의 성정을 가리킨다. 타고난 성정을 깎아 내린 사대부의 노래보다 차라리 농부나 나무하는 아이의 노래가 낫다는 신랄한 비판이다. 먼 옛날 공자가 민간의 가요들을 모아 <시경>을 정리한 이유나 맹자가 왕에게 세속의 음악을 즐겨도 괜찮다고 답한 맥락과 같은 말이다.
홍대용은 이 시기의 인물 가운데에서도 특출했다. 음악 이론은 물론 악기 연주에도 매우 능하여, 특히 가야금 연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연행(燕行) 길에 양금을 사 와서 최초로 연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별장(別章) ‘봄이 머무는 언덕(유춘오留春塢)’에서는 가끔 줄풍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지우들은 한자리에 모이고는 했다. 홍대용은 가야금, 홍경성은 거문고, 이한진은 퉁소, 김억은 양금, 장악원 악공 보안은 생황을 연주했다. 연장자인 김용겸은 흥을 돋우고 홍원섭은 조용히 감상을 한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한 장면이다.5) 여기에는 중인층의 가객들도 함께 어울렸다.
장르와 신분의 경계를 넘어서 - 접화군생(接化群生), 풍류 정신의 재현
처음부터 우리는 ‘풍류’라는 말뜻에 너무 거창한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뭔가 있기는 있는데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너무 본래 뜻에 집착하지는 말자. 통일신라 말기의 최치원이나 일제시기를 경험한 김범부의 입장에서 볼 때 ‘풍류’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찬란한 무언가가 아니라 위기와 냉혹한 현실에서 구현해야 할 가치였다. 현재 쓰이는 풍류의 의미가 매우 다양한 까닭도 사실 본래 풍류가 가지고 있었던 뜻이 때에 따라 확대되거나 축소되고 또 덧붙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은 풍류의 ‘접화군생(接化群生)’ 정신을 구현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음악이 포함된 뮤지컬, 오페라는 물론 각종 페스티벌, 홍대 부근의 작은 공연장과 길거리 공연에서도 우리는 처음 만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함께 전율하고 감동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음악을 즐길수록 신비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여러 소리가 분명 따로 연주가 되고 있음에도 듣는 이들에게는 조화로운 하나의 작품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거기에 듣는 사람 역시 음악의 일부가 되는 듯한 묘한 일체감을 불러일으킨다. 풍류가 음악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풍류의 핵심을 구현하기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연장에서 처음 만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함께 전율하고 감동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음악이라는 한정된 의미를 벗어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되살려야 할 혹은 재해석되어야 할 풍류의 정신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나와 타자,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분야와 분야 사이의 경계를 나누는 데 매우 익숙하다. 이런 우리에게 ‘접화군생’의 풍류 정신은 음악을 통해 ‘경계 짓기’를 넘어서 각자의 자리에서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
주석
1) 이상의 뜻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풍류’ 항목 참조.
2) 본명 정설(鼎卨). 경북 경주(慶州) 출생. 1915년 도일하여 도요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이어 서양철학 연구를 위하여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수학하였다. 그 후 도쿄 대학과 교토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동서양의 철학을 비교 연구하고 귀국, 8·15광복까지 산사(山寺)를 역방하면서 불교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화랑외사(花郞外史)>가 있다. 소설가 김동리의 형이다.
3) 이태우, ‘일제강점기 한국철학자 연구 - 범부 김정설의 풍류도론’, <인문과학연구> 12권, 대구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9 참조.
4) 백대웅의 책
5) 송지원, <한국음악의 거장들>, 태학사, 2012, 371~372쪽 참조.
참고문헌
1. <孟子>
2. 홍대용, 『湛軒書』, 「大東風謠序」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풍류’ 항목
4. 김해숙, 백대웅, 최태현 공저, <전통음악개론>, 어울림, 1999
5. 송지원, <한국음악의 거장들>, 태학사, 2012
6. 이태우, <일제강점기 한국철학자 연구-범부 김정설의 풍류도론>, <인문과학연구> 12권, 대구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9
글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숭실대학교 사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하였으며, 한국고전번역원 연수부를 수료하였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에 있다. 논문으로는 <남계 박세채의 심설에 관한 연구>, 저서로는 <철학자의 서재> 1, 2(공저)가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철학일반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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