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 12번 ‘라 폴리아’(Corelli, Violin Sonata Op.5 No.12 in D minor, 'La Follia')
라라와복래2014. 11. 10. 13:20
Corelli, Violin Sonata Op.5 No.12 in D minor, 'La Follia'
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 12번 ‘라 폴리아’
Arcangelo Corelli
1653–1713
Nathan Milstein, violin
Leon Pommers, piano
Studio A, 46th Street Studio, New York
1959.01.28
Nathan Milstein/Leon Pommers - Corelli, Violin Sonata Op.5 No.12 in D minor, 'La Follia'
“이 곡(‘라 폴리아’)을 들으면 영혼에 쓰나미가 밀려오는 느낌을 받아요. 삶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떠안고 가는 모습이랄까, 슬픈데 내색하지 않고 그것조차 동반자인 듯 말이죠.” 리처드 용재 오닐이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말이다.
아르칸젤로 코렐리는 볼로냐와 라벤나의 중간쯤에 위치한 작은 마을 푸시냐노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5주 전에 아버지가 별세해서, 그는 네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대를 이은 지주 집안이라 생활은 풍족했다. 주로 로마에서 활동을 했다는 것 말고는 그가 음악가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13살 때부터 볼로냐의 음악을 이끌던 조반니 벤베누티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이 악기의 매력에 사로잡혔다고 하는데 이 또한 불분명하다.
1687년 코렐리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주최한 로마 음악축제의 감독을 맡으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몇몇 군주와 귀족들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가장 큰 후원자는 추기경 피에트로 오토보니였다. 그는 1689년에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8세의 조카아들이다. 오토보니 추기경은 코렐리와 친교를 맺고 자신이 만든 악단의 감독으로 그를 임명했다. 코렐리는 추기경의 궁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작곡을 하거나 로마 사교계의 명사 모임인 ‘월요 콘서트’에 나가 연주를 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1632년에서 1654년까지 재위한 스웨덴의 여왕으로 문예를 장려하는 등 계몽 군주로 유명했다 코렐리가 여왕을 만났을 때는 스스로 퇴위한 뒤였다.
코렐리는 근면하고 겸손했다. 옷장에는 불과 몇 벌의 옷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권해도 마차를 타는 법이 없었다. 헨델은 “그가 좋아하는 취미란 돈이 안 드는 그림 감상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그는 대단한 그림 콜렉터였고 미술품 감식의 권위자로도 평가를 받았다. 코렐리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연주 요청을 쉴 새 없이 받았다. 그는 언제나 그들에게 공손했다. 어느 날 오토보니의 궁에서 조촐한 연주회를 가졌을 때였다. 한 손님이 옆 사람과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코렐리는 바이올린을 놓고 청중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까닭을 물으니 “제 연주가 저분의 대화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바이올린 역사에 금자탑을 세운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
코렐리는 명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근대적인 보잉 테크닉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2개의 현을 동시에 눌러 바이올린 연주에서 화음 효과를 사용한 최초의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의 핵심은 아름다운 음색, 운궁의 다양함과 우아함, 느린 움직임 속에 담은 풍부한 표정, 그리고 잘 발달된 왼손의 기교 등이었다. 그는 노래하는 악기로서의 바이올린의 특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서정성과 우아한 기품으로 넘치는 걸작들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작곡가 코렐리의 이름을 드높인 작품은 <12개의 합주 협주곡(12 Concerti Grossi)>과 12곡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한 소나타(Sonatas for Violin and Basso continuo)>(이하 바이올린 소나타)이다.
코렐리의 손으로 비로소 형식상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은 이 분야의 기초를 다져 놓음으로써 바흐와 헨델의 걸작으로 이어졌다. 명연주가로서의 풍부한 경험과 다채로운 기교를 쏟아 부은 바이올린 소나타 12곡은 바이올린 음악 역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운 명곡들이다. 코렐리는 바이올린 교사로서도 눈부신 업적을 남겨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거두었는데 비발디도 그중의 한 제자였다. ◀비발디도 코렐리의 제자였다.
12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1700년에 작품번호 5로 로마에서 출판되었다. 마지막 12번(Op.5 No.12) 곡은 다른 곡처럼 실내 소나타 형식을 택하지 않고, 처음 아다지오로 시작하는 16소절의 주제를 따른 변주곡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춤곡 폴리아(follia)를 주제로 삼았기 때문에 ’라 폴리아(La Follia)'라는 이름이 붙었다. 폴리아는 파사칼리아나 샤콘과 같이 하나의 아리아 선율을 주제로 삼아 이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주시켜 만드는 변주곡 양식의 느린 3박자 춤곡이다. 원래 중세 포르투갈의 춤곡으로 이것이 스페인으로 건너가고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전파되었는데, 프랑스인들이 이것을 ‘에스파냐의 폴리아(Folie d’Espagne, 스페인의 미친 춤곡)’라고 불러서 스페인의 춤곡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폴리아의 기본 멜로디와 화성은 2개의 짧고 동일한 악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곡이 큰 인기를 모으고 많은 변주곡과 즉흥곡을 낳은 것은 매력적인 화음 시퀀스와 함께 이러한 단순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곡은 아다지오로 시작하여 비바체로 박자가 변하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표현도 강렬해졌다가 잠잠해진다. 이 곡에서 반주는 멜로디만큼이나 중요하다. 베이스 라인에서도 주 멜로디가 이따금 나타나고 바이올린이 아르페지오(arpeggio, 펼침화음, 화음의 각 음을 동시에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차례로 연주하는 주법)로 화음을 넣기도 한다. 때로는 화성의 구조도 수정된다. 코렐리는 곡 속에 폴리아를 주제로 하여 22개의 변주곡을 만들었다. 바이올린 E선의 제3포지션 이상의 높은 음을 쓰지 않고, 느린 부분에서 깊은 명상을 표현하는 방법과 빠른 부분에서 눈부신 기교를 발휘하는 수법 등은 코렐리 음악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비르투오소로서 코렐리는 현란한 패시지워크(passagework, 작품의 주제와 관계없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부차적 부분) 연주와 아르페지오 기법부터 메사 디 보체(messa di voce, 일정한 음을 길게 끌면서 천천히 음량을 크게 했다가 다시 음량을 줄여 끝내는 방법)까지 수많은 테크닉을 통합했다. 그리고 악보에 표기된 꾸밈음(ornament) 외에 연주자 개개인을 위하여 즉흥 연주의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었다. 사실 몇몇 개정판에서는 코렐리가 연주에서 사용한 꾸밈음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코렐리는 모든 연주가 작곡가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독주자 고유의 영감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리코더와 하프를 위해 편곡한 곡을 포함하여 많은 ‘라 폴리아’ 소나타 개정판들이 그의 생전에 출판되었다.
Corelli, Violin Sonata Op.5 No.12 in D minor, 'La Fol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