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포레, ‘달빛’(Fauré, Clair de Lune)

라라와복래 2014. 11. 7. 14:38

Fauré, Clair de Lune

포레, ‘달빛’

Gabriel Fauré

1845-1924

Véronique Gens, soprano

Roger Vignoles, piano

Metz, Arsenal

1998.11

 

Véronique Gens/Roger Vignoles - Fauré, Clair de Lune, Op.46 No.2

 

‘불행한 예술가’라는 소리를 곧잘 듣는 프랑스의 시인 폴 베를렌은 어쩌면 ‘행복한 예술가’이다. 그의 시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두 명의 음악 거장이 걸작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드뷔시와 포레다. 이들은 베를렌의 시집 <우아한 향연(Fêtes galantes)>의 시구 ‘달빛(Clair de Lune)에 매료되었고, 이런 교감을 동명의 제목으로 각자의 음악으로 탄생시켰다.

“포레는 독일 가곡으로부터 프랑스 가곡을 구원한 음악가다.”라는 라벨의 언급도 있듯이, 포레의 가곡들은 가장 프랑스적인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부드러운 선율과 풍부한 화성, 미묘한 감정 표현 등이 프랑스인이 지닌 감성의 맥락을 잘 짚어주며, 특히 전통 율격을 그대로 지키되 몽환적이며 섬세한 아름다움을 끌어내고 있어서 프랑스 가곡의 품격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포레는 피아노곡,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 4중주 등 실내악곡은 물론 협주곡, 교향곡, 레퀴엠, 오페라 등도 작곡했다. 그러나 그의 가곡 100여 편이 단연 백미(白眉)이다. 그중에서 특히나 사랑받으며 연주되는 곡이 <달빛>이다. ▶폴 베를렌(1844-1896)

그대의 영혼은 빼어난 풍경화

화폭 위를 멋지게 분장한 광대와 춤꾼들이

류트를 연주하며 춤추고 지나가지만

그들의 환상적인 가면 뒤로 슬픔 비치네

모두들 단조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네

쟁취한 사랑과 느닷없는 행복을

자신들의 행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들의 노래를 달빛과 섞네

슬프지만 아름다운 달빛은 조용히

새들을 나무에서 꿈꾸게 하고

대리석상들 한가운데 늘씬한 분수는

높다랗게 물 뿜으며 황홀함에 흐느끼네 ―라라와복래 역

곡은 비교적 긴 전주로 시작된다. 미뉴에트 풍의 여운을 밟으며 피아노 전주가 흐르고 나면 시를 읊듯 노래하듯 다가오는 독백 같은 성악 선율이 흐른다. 프랑스 가사의 몽환적 느낌이 더해지면서 ‘근대 프랑스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왜 포레 앞에 붙어 있는지도, 1924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국 프랑스가 국장으로 애도했던 이유도 이해된다. 예술가의 죽음을 국장으로 애도하는 경우가 이례적임을 감안하면 포레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 짐작이 간다.

앙투안 바토, <이탈리아 극장에서의 사랑>, 1716

환상과 낭만의 달빛을 타고 흐르는 비애

포레의 <달빛>은 1888년 작곡되었다. ‘미뉴에트(Menuet)’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악상 지시어는 안단티노 콰지 알레그레토(Andantino quasi Allegertto, 조금 느리되 약간 빠른 기분을 가지고). 피아노와 성악을 위한 작품인데, 특히 성악 선율과 피아노 반주는 각자 독립적으로 연주되어 미묘한 이중적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음악적 전개는 당시로선 새로운 시도였다. 곡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류트를 타며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 두 번째 부분에서는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에 달빛이 비치는 모습, 세 번째 부분에서는 달빛이 자아내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모습이 그려진다.

첫 번째 절에서는 가면을 쓴 사람들의 모습이 피아노 반주 미뉴에트로 표현되며, 이에 따라 연주되는 성악 선율은 어딘지 모를 슬픔이 서려 있다. 첫 번째 절이 끝나면 피아노 반주는 약간 상기된 음률로 뒤의 절을 이어준다.

두 번째 절의 “모두들 단조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네”에서는 가사와는 반대로 장조의 분위기이다. 반면 2행의 “쟁취한 사랑과 느닷없는 행복을”에서는 단조의 선법(旋法)이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가사와 반대되는 음악적 표현은 시의 내면적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행에서 달빛이 등장한다. 아르페지오의 피아노 반주가 에스프레시보 에 돌체(espressivo e dolce, 표정 있고 부드럽게)의 악상으로 달빛의 영상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나타낸다.

세 번째 절의 분위기는 앞의 두 절의 느낌과 확연히 다르다. 춤과 노래의 박자는 멈추고 선율과 리듬이 서정적으로 바뀌면서 이 시의 주된 정조인 ‘환영(幻影)으로 꾸며진 행복감’을 나타내고 있다. 피아노 반주는 지속음으로 강하고 길게 울리는데, 이는 “대리석상들 한가운데 늘씬한 커다란 분수는”에서 무생물인 대리석상을 표현하고자 한 작곡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가수와 피아노는 달빛과 함께 발걸음을 멈추고 고요히 숨을 멈춘다.

Young-ok Shin sings 'Clair de Lune' by Gabriel Fauré

오래전 공연인 것 같은데 언제 어디, 그리고 피아노가 누구인지 확인이 안 되어 아쉽습니다.

베를렌과 포레가 이 시와 음악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달빛’은 춤과 노래가 가득한 환상과 낭만의 달빛이다. 광대들이 몰려나오고 무희들이 춤을 춘다. 류트 연주자는 반주하고 사람들은 환호한다. 멋있고 화려한 밤의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 광경을 달빛이 오롯이 지켜보고 있다. 광대들의 춤과 노래는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 아우르고, 지켜보는 시적 화자의 내면 또한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가면 뒤에서 슬픔을 숨기는 광대들이나, 행복의 시절을 만났다고 흥겨워하는 춤꾼들은 기이하고 어색한 연희를 통해 달빛과 뒤범벅이 된다.  ◀호안 미로, <달빛 속 여인과 새(Femmes et Oiseau au Clair de Lune)>, 1949

달빛은 이 아름답고 기이한 밤을 지켜보면서 대리석상으로 둘러싸인 분수를 비춘다. 분출하였다가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순간에 따라 오고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달빛에 의해 반짝이는 물방울들로 대리석상은 생명을 얻어 옛 영광을 대화로 나눈다. 축제에 모인 사람들은 그 화려한 풍경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동경한다. 새들이 달빛을 희롱하며 공원의 나무에 날아든다. 그러나 죽은 과거가 되살아날 수 없듯이, 대리석상은 그대로 굳은 채 서 있고, 그들이 꿈꾸는 청춘의 나무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그들이 달빛에서 본 영상은 한때의 환상이다. 축제가 끝나고 분수가 멈추니 그와 함께 꿈도 사라진다. 주위는 고요하고 달빛만 교교하게 흐른다.

시인은 환영과 현실을 중첩되게 보여주며,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에게 행복했던 시절로의 비상을 꿈꾸게 한다. 그리고 그 매개체이자 안내자로 달빛을 끌어들인다. 인간이 불우한 현실을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꿈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그것을 달빛이 스크린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작곡가는 단조와 장조, 3박자와 4박자의 혼돈을 통해 인간의 희로애락을 교묘히 마블링하고 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슬픔과 즐거움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치열한 삶 속에서 비롯됨을 이 시와 노래가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시인과 작곡가는 가장 우울했던 시기에 이 작품을 썼다. 그래서일까, 포레의 <달빛>을 듣노라니, 조락(凋落)의 이 깊은 가을, 생의 비애를 더욱 느낀다.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