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폰) 뷜로는 다섯 명의 작곡가에게 음악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라프, 브람스, 생상스, 라인베르거, 그리고 저를 지목한 것입니다.“ ―차이콥스키
요제프 요하임 라프는 1822년 5월 27일 스위스 취리히 호반의 작은 마을 라헨(Lachen)에서 태어났다. 혈통을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인의 피가 절반 섞인 스위스인이다. 독일인 아버지는 오르가니스트이자 학교 교사였다. 집안은 몹시 가난했고 아버지는 엄했다. 아들에게 조기교육을 시킨답시고 수시로 회초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안목이 맞긴 맞았다. 어린 라프는 라틴어를 읽고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연주하였다. 열 살부터는 아버지를 대신해 교회 오르간 주자로 일했다. 열두 살에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포기하고 예수회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840년 18살에 교사로 채용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라프는 취직되자마자 어린 시절의 관심사였던 음악으로 눈을 돌렸다.
멘델스존과 슈만에게 인정받고 리스트의 조수가 되다
1843년 독학으로 쓴 피아노곡을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에게 보내 고견을 청하였다. 멘델스존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당시 최고의 음악 출판사인 브라이트 코프 운트 헤르텔에 소개해주었고 출판이 성사되었다. 슈만은 자신이 발행하는 <음악신보>에서 “장래가 촉망된다.”고 라프를 평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전업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 라프는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를 사직하였다. 고난의 시작이었다. 두 차례 연주회를 열었으나 커리어는 더 진전되지 못했고 쌓인 빚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 선고를 받은 라프는 취리히에 일자리를 구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잘 곳도 없어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요아힘 라프
1844년 6월,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한 리스트가 바젤에서 연주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폭우를 맞으며 75km를 걸어갔다. 차비가 없어서였다. 티켓이 전석 매진되었지만, 리스트의 비서는 비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된 청년을 연주회장에 들어가게 했을 뿐 아니라 리스트에게 인사를 시켰다. “나와 함께 있지 않겠나? 독일로 가게 해주지.” 리스트는 라프를 나머지 연주여행에 데리고 다니며 잡무를 맡겼으며 쾰른에 있는 악보 가게에 취직까지 알선해주었다.

1847년 멘델스존에게 작곡을 공부하기 위하여 라이프치히에 갔으나 그의 우상은 그해 11월 타계한 뒤였다. 라프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작곡 활동을 하면서 평생 지기가 된 당대의 마에스트로 한스 폰 뷜로를 만났다. 바이마르의 궁정악장으로 부임한 리스트는 1849년 라프를 불러들여 조수로 고용하였다. 그는 하루에 11시간씩 일하며 리스트의 악보 사보나 교향시의 오케스트레이션 편곡 작업을 도왔다. ◀요아힘 라프와 평생 지기로 지낸 한스 폰 뷜로
1851년 라프는 오페라 <알프레드 왕>을 작곡하여 리스트의 도움으로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두 차례 공연하였다. 반응은 좋았지만 다른 도시에서 공연될 정도는 아니었다. 경제 형편도 나아지지 않았다. 스위스에 남아 있던 채무 문제로 몇 주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해가 지나면서 라프는 리스트에 음악적 자아가 종속되어 있는 자신과, 과중한 일을 시키는 리스트에게 환멸을 느꼈다. 게다가 라프는 리스트의 사위인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에세이를 발표하여 물의를 빚었다. 라프는 리스트와 일군의 바그너 추종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1856년 라프는 ‘이 저주받을 도시’ 바이마르를 떠나 비스바덴에서 피아노 교사를 일하며 독립했다. 1859년에 결혼한 아내가 지혜로워 살림이 안정되었다. <알프레드 왕>의 재공연도 성공을 거두었다. 1861년 라프는 빈 악우협회가 주최하는 작곡 콩쿠르에 교향곡 1번 ‘아버지의 땅으로’를 제출하여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등을 차지하였다. 이듬해 빈 무지크페라인 잘에서 열린 교향곡 1번 초연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청중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박수가 그칠 줄 몰랐다.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비로소 실력 있는 작곡가로 인정받은 라프는 작곡에 전념, 속필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엄청난 수의 작품을 양산하였다. 그의 명성은 브람스와 바그너에 필적할 만큼 높아졌다.
1877년 라프는 비스바덴 시대를 정리하고 프랑크푸르트로 거주지를 옮겨 새로 개교한 호흐 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음악원을 관리하느라고 작곡의 펜은 무뎌졌지만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을 피아노 교수로 초빙하여 독일 최초로 여성 작곡가 클래스를 여는 업적을 세웠다. 1882년 6월 21일 아침, 라프는 숨진 채로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다. 의사는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진단하였다. 예순 살에 맞이한 죽음이었다.
라프는 멘델스존, 슈만, 리스트 등 1810년대 출생한 대가들과 차이콥스키, 브람스 등 1830-40년대 출생한 대가들 사이에 위치하는 작곡가이다. 시대적으로 또 내용적으로 그의 음악은 중기 낭만파 음악이라 말한다면 그럴싸할 것이다. 라프는 피아노 소품에서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작품을 남겨 놓았는데, 이들 중 핵심을 이루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11편에 달하는 교향곡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교향곡 1번 ‘아버지의 땅으로’를 쓴 해는 1861년이고, 교향곡 11번 ‘겨울’을 쓴 해는 1876년경이다. 슈만의 교향곡 3번 ‘라인’이 1851년,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과 ‘단테 교향곡’이 1857년에 초연되었고,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이 1876년,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이 1878년에 초연되었으니, 대작 교향곡의 공백기에 라프의 주요 교향곡이 출현한 셈이다.
작곡 측면에서도 라프는 리스트와 바그너로 대표되는 표제음악 양식과 2관 편성의 고전적 교향곡 스타일을 종합하고자 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부 비평가들이 라프를 가리켜 이도저도 아닌 절충주의자라고 혹평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작곡 연대를 꼼꼼히 쫓아가면, 라프의 음악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은 부당하다. 오히려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를 후대 작곡가들이 작품에 활용함으로써 나중에는 보편적 또는 상투적인 정석 서법으로 굳어져 절충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닐까. 라프의 작품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드보르자크,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부소니 등 매우 넓은 범위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상은 <마이너리티 클래식>(이영진 지음, 현암사 2013) “곤궁을 딛고 삶과 항쟁한 소리의 풍경화가 요하임 라프”에서 부분 발췌한 것이며 문장도 조금 수정했습니다.
죽음 속에서 재회하는 비극적 사랑을 그린 교향곡 5번 ‘레노레’
라프의 교향곡은 암시적인 표제가 붙은 4악장 형식의 곡들이 대부분으로, 완성도가 뛰어난 최고 걸작은 1872년 작곡된 교향곡 5번 ‘레노레’로 의견이 일치한다. 질풍노도 시대의 독일 시인 고트프리트 뷔르거(Gottfried August Bürger, 1747-1794)가 쓴 동명의 고딕 발라드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으로, 한 편의 비극 오페라처럼 여자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3악장을 행진곡으로, 4악장을 승천하듯 고요히 끝내는 구성이 차이콥스키나 말러의 작품과 유사하다.
라프의 교향곡 5번 ‘레노레’는 그의 11개 교향곡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널드 엘먼은 “낭만주의 초기와 후기의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음악사적 의미를 부여했지만, 대중적으로 작곡가에 대한 인식이 덜 되어서인지 이제까지 나온 리코딩은 5종이 넘지 않는다. 교향곡 ‘레노레’에는 전통 교향곡 구조와 낭만적 영상을 결합시키고자 한 라프의 의도가 담겨 있다. 라프로서는 ‘레오노레’가 음악에 문학을 투사한 드문 작품이다. 라프는 이 작품을 1870년에 착상하여 1872년 여름에 완성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의 초연은 대성공이었고 이어서 영국과 미국 연주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고트프리트 뷔르거의 이 서사시는, 18세기 중반 30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레노레가 전장에 나간 약혼자를 애타게 그리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끝내 기다리던 약혼자가 돌아오지 않자 레노레는 그가 죽었으리라 믿고 체념하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다른 여자와 사귀는 바람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어머니의 잘못된 암시에 레노레는 신에게 거칠게 욕하며 대들고 그 존재를 부정한다. 그날 밤 약혼자 빌헬름이 나타나 자고 있는 그녀를 깨워 함께 말을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빌헬름은 레노레에게 죽음이 두렵냐고 거듭 묻는다. 말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이윽고 멈춘 곳은 한 무덤가. 그제야 빌헬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는 바로 죽음의 신이었던 것. 둘은 미친 듯이 망혼의 춤을 추다 이윽고 레노레는 빌헬름의 무덤 옆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고트프리트 뷔르거
라프는 이 교향곡을 3파트 4악장으로 구성하였다. 첫 번째 파트는 1, 2악장으로 ‘사랑의 행복(Love's Happiness )’을, 두 번째 파트는 3악장으로 ‘작별(Parting)’을, 세 번째 파트는 4악장으로 ‘죽음 속에서의 재회(Reunited in Death)’를 노래한다.
Neeme Järvi/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 Raff, Symphony No.5 'Lenore'
Neeme Järvi, conductor
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Victoria Hall, Genève
2013.07.09
1악장: 알레그로
라프는 1익장에 대해 “사랑의 행복 뒤 그리움과 애타는 마음”을 그렸다고 썼다. 소나타 형식. ‘그리움‘의 모티프가 당당하게 문을 연 다음 줄곧 밝고 열정적으로 진행되나, 트롬본이 이따금 앞날의 비극을 예고라도 하는 듯 짧게 울려 퍼진다.
2악장: 안단테 콰시 라르게토
2악장은 A플랫장조이며 ABA 구조로 되어 있다. 라프는 “사랑의 기쁨을 그린 러브 신”이라고 묘사했다. 어둠이 찾아들자 두 연인은 입을 맞추며 밀어를 속삭인다. 이어 격정적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선율이 풍부한 서정적인 악장이다.
3악장: 마르슈 템포. 아지타토
라프의 곡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악장이다. ‘음의 풍경화가’라는 말을 듣는 라프는 “두 연인에게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다. 두 연인은 작별을 나눈다. 그리고 병사들은 사라져 간다”라고 이 악장을 설명했다. 비통한 ‘작별’의 삽화가 두 행진곡 사이에 들어가 있는 ABA 구조이다. 트리오 다음 첫 번째 행진곡은 크레셴도로 점증하고, 두 번째 행진곡은 디미니누엔도로 감소한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두 연인의 고통스러운 작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4악장: 알레그로
이 악장의 제목은 ‘죽음 속에서의 재회’이다. 뷔르거의 서사시에 따른 도입부는 리스트의 교향시와 흡사하다. 1~3악장의 주제가 변형되어 되풀이된다. 무궁동(無窮動, perpetuum mobile. 짧은 음표에 의한 빠른 음형이나 악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같은 길이의 빠른 속도로 연주되는 것)으로 진행되는 말이 달려가는 장면 묘사는 말이 달릴수록 속도와 리듬이 강해진다. 고조되어 가던 곡은 무덤가에 말이 멈추어 서면 잠시 침묵에 빠졌다가 대단원에 들어간다. 라프는 이 클라이맥스 대목을 장엄한 E장조 코랄 형식으로 마무리하는데, 처음에는 조용히 시작해서 찬란한 정점에 이르고 이어 승천하듯 고요히 마친다.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
라프가 작곡한 11편의 교향곡은 브루크너나 말러의 교향곡 같은 심오한 곡은 아니다. 오케스트레이션도 악장 구성도 심플하다. 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음의 풍경화가’다운 전원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다음은 라프의 교향곡 11곡 곡명이다.
Symphony No.1 in D major, Op.96 "An das Vaterland(아버지의 땅으로)"
Symphony No.2 in C major, Op.140
Symphony No.3 in F major, Op.153 "Im Walde(숲속에서)"
Symphony No.4 in G minor, Op.167
Symphony No.5 in E major, Op.177 "Lenore(레노레)"
Symphony No.6 in D minor, Op.189 "Gelebt, Gestrebt, Gelitten, Gestritten, Gestorben, Umworben(생존, 투쟁, 고통, 전투, 죽음, 영광)"
Symphony No.7 in B flat major, Op.201 "In den Alpen(알프스에서)"
Symphony No.8 in A major, Op.205 "Frühlingsklänge(봄의 음향)"
Symphony No.9 in E minor, Op.208 "Im Sommer(여름에)"
Symphony No.10 in F minor, Op.213 "Zur Herbstzeit(가을의 시간을 위하여)"
Symphony No.11 in A minor, Op.214 "Der Winter(겨울)"
정리 : 라라와복래 2014.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