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21세기, 왜 논어에 주목하는가?

라라와복래 2015. 1. 7. 11:28

[논어 명언명구]

21세기, 왜 논어에 주목하는가?

<논어(論語)>(출처: 문경새재박물관)

 

<논어>, 2500년 전의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문명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책을 꼽으라면 그중에 <논어(論語)>가 빠질 수 없다. <논어>는 공자(BC 551-479)가 제자와 학인 그리고 정치인 등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자체는 공자가 직접 쓰지 않았고,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기록한 자료들을 묶은 편집본이다.

공자의 활동 기간으로 따져보면 <논어>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0년 전에 쓰여진 셈이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다니고, 심지어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여행하고, 천동설이 거짓이고 지동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들도 빤히 알고 있으며, 여름에 겨울 과일을 먹고 겨울에 여름 과일을 먹는다. 공자는 지금과 같은 문명 생활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21세기의 우리가 왜 2500여 년 전의 <논어>를 읽고 있는 것일까? 자연 과학처럼 이론의 생명 주기가 짧은 학문이라면, 2500년 전의 책은 역사적 가치를 가질 순 있지만 이론으로서는 폐기 처분의 대상이 된다. 인문학에 속하는 <논어>는 여전히 각광을 받고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2500년 전의 공자와 그의 대화자는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이기 때문이다. 2500년 전의 사람도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화를 내는데, 오늘날의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2500년 전의 사람도 불의를 보면 공분을 하고, 전쟁보다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아름다운 예술을 보고 들으면 즐거워했는데, 오늘날의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공자 초상화

2500년의 시간으로 인해 달라진 점도 많고 시대와 문화에 따라 “사람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돌도 아니고 개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라 여전히 사람일 뿐이다. 즉 현재 인간이 과거보다 자연의 위력에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인간적 약점을 극복하고 신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논어>의 일부는 여성과 아동, 이민족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편견을 드러내고 있어 폐기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논어>의 ‘나머지’를 읽을 수밖에 없다. 그 나머지는 인간다움을 찾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논어>는 ‘오래된 미래’로서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논어>, 학(學)으로 시작해서 명(命)으로 끝나다

<논어>를 제대로 한번 읽어 보겠다고 마음먹지만 진입 장벽이 높다. 일단 <논어>는 한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문을 모르면 감당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문으로 된 <논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된 <논어>와 그 해설을 함께 읽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들추면 마음이 달라진다. 읽으면 이해될 줄 알았는데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모르는 곳을 찾아갈 때 우리는 지도를 살피고 내비게이션을 켠다. 내용 파악이 잘 되지 않는 <논어>를 읽는데도 길잡이 역할을 하는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다.

<논어집주> 중 논어 첫 구절

첫 장 첫 구절과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을 살피면 <논어>를 읽을 수 있는 ‘지도’를 갖춘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문화에는 유일신이 없다. 사람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기를 겪을 때 기도하여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힘에 의존해서 위기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기 극복의 매뉴얼이랄까 집단 지혜의 결실이 전통이고 문화이고 경전이다. 후대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닥친 문제나 앞으로 겪을 문제를 풀려면 결국 전통과 문화와 경전을 배워서 구체적인 답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논어>의 첫 장 첫 구절이 ‘학(學)’ 자로 시작되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과거의 지혜를 배우고 ‘시습(時習’)을 통해 나의 것으로 만들면, 어떠한 상황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된다. 그러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논어집주> 중 논어 마지막 구절

명(命)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바뀌지 않고 그냥 사람에게 주어진 측면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명(命)은 한계이다. 사람은 노력에 따라 다양한 실력(성적)의 차이를 보이는데, 명은 한계 중에서 가장 최고의 상태에 이른 측면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명(命)은 최대치이다. 만약 한 사람이 개인과 공동체의 한계와 최대치를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축구를 좋아하지만 재능도 떨어지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메시와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고 한다면, 되고 싶은 욕망과 되지 못하는 현실의 사이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다.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목표를 너무 높게 책정하면, 노동자들은 일 년 내내 달성하지 못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질책을 당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명(命)을 모르면, 사람들이 끊임없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과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군자라면 반드시 명(命)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논어>의 첫 장 첫 구절은 사람에게 ‘지금의 나’와 다른 나를 꿈꾸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길을 찾으라는 격려를 하고 있고,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은 사람이 ‘지금의 나’와 다른 ‘미래의 나’를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직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논어> 제18편의 미스터리, 공자의 적대자의 발언을 싣다

공자성적도(공자 일생의 행적을 도해한 그림) 중 자로문진(子路問津).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에게 "나루터가 어딘지 물어오라"며 한 말로 미자편(微子篇) 6장에 나옴.

<논어>는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제18편 ‘미자(微子)’는 내용면에서 자못 독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18편은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펼칠 기회를 찾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는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과 대화를 담고 있다. 그들은 개인의 노력으로 시대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연의 산림에 숨어서 사는 은둔자들이었다.

제18편은 공자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은둔자들이 공자의 노력이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은둔자들은 자신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이고, 공자는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가리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은둔자들은 공자가 시대의 흐름을 바로잡기 위해 광분하고 있지만 언젠가 공자가 그러한 시대의 역풍을 맞아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들은 시대를 바꾸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서 한 발짝 비켜나서 개인의 삶에 집중하라고 제안한다. 제18편은 분명 <논어>에 들어 있는 한 편이지만 공자의 주장보다 은둔자들의 육성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제18편의 주인공은 공자가 아니라 은둔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공자를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이 담긴 18편이 <논어> 속에 들어가 있을까? 그 이외의 편들이 공자라는 사람을 직접적으로 알리고 있다면 제18편은 은둔자와 공자의 차이를 통해 공자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까닭이다. 즉 은둔자와의 비교를 통해 공자의 삶과 가치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자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제18편은 잘못된 편집이 아니라 참으로 제대로 된 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 실패의 존재론

<논어>와 <사기(史記)>에 나오는 공자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후대에 만들어진 ‘성인 공자’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공자는 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시절부터 ‘소년 가장’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훗날 공자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공자가 왜 생업의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의문을 나타냈을 정도이다.

공자는 학문적 성취를 거둔 뒤 노나라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칠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는 50대에 시작해서 15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았다. 이 과정에서 공자는 “상갓집의 개”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불가능한 줄 알면서 애쓰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좌절하거나 자신의 길을 회의하지 않았다. 그는 한 곳에서 실패하더라도 곧 다른 나라를 찾아서 다시 시작했다. 실패를 되풀이했지만 공자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공자를 보면 시시포스 신화가 떠오른다. 시시포스는 제우스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 벌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만 했다. 그런데 정상에 바위를 올리자마자 바위는 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시시포스는 바위를 다시 정상으로 올리는 일을 끝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산 정상까지 바위를 무한 반복하여 밀어 올려야만 했던 시시프스

공자도 산과 들의 짐승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며 인간미가 넘치는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던 만큼 현실에서 맛보는 한 번의 실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늘 실패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며 성공의 씨앗을 일구려고 했다. 그렇게 찾아낸 사유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읽는 <논어>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다.

실패는 공자를 좌절하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더 분명하게 만나게 하고 더 뚜렷하게 자각하는 장이었다. 따라서 공자는 가문과 신분의 축복이 아니라 냉대와 박대의 실패에서 사유를 일구어낸 것이다. 역설적으로 실패가 그냥 실패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체를 더 벼리게 만드는 인간화의 길이었던 것이다.

<논어>를 왜 읽어야 하는가?

공자처럼 실패를 많이 겪은 사람이라면 왠지 차갑고 우울하고 거친 성격을 가지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하지만 <논어>의 첫 장 첫 구절에서 ‘즐겁다’, ‘기뻐하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만나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공자가 실패로 인해 무너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개인적으로 가난하고 불우한 삶을 살면서도 참으로 단단한 인품의 소유자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편안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는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이 초월할 수 있는 최고 경계에 도달했다. 즉 인간의 한계 안에서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최고치에 이르려고 했다는 점에서 위대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사람이 서로 어울려서 살아가려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건사하고 주위를 편안하게 하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의 자세를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오늘날의 자유주의만이 아니라 신분 사회 또는 특권 사회에서 더 큰 울림을 갖는 말이다. 신분이 지위를 결정할 경우 자격 없고 자기 조절력이 없는 사람이 의사결정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공동체는 재앙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런 사람이 정치 지도자가 되면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고 공정과 신뢰의 가치를 저버려서 공동체가 멸망의 길로 치달을 수도 있다. 이렇게 수기치인을 강조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사회는 어떤 공동체보다 내부적으로 전쟁의 충돌보다 평화의 공존이라는 장기적인 안정을 누렸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공자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공자 사상의 영향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수기치인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중국 고대의 성왕 요임금의 초상화

우리는 지금 공자로부터 2500년이 지난 시간대를 살고 있다. 공자 시대에 비해 문명과 정의 그리고 평등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공자 시대처럼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이후의 삶을 결정하지 않고, 소수의 특권층이 권력을 독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의 개성과 이상을 맘껏 발휘하고, 사람과 사람이 공통의 규범을 준수하여 인간미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국가와 국가가 호혜성에 따라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여전히 “아직 완전하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 시대의 “아직 아니다”가 공자 시대의 “아직 아니다”와 다르다. 하지만 “아직 아니다(not yet)”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논어>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모든 ‘사상 자원’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옛날처럼 공자 <논어>의 위상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논어>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1.0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886&contents_id=78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