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라벨 ‘스페인 광시곡’(Ravel, Rapsodie espagnole)

라라와복래 2015. 2. 9. 10:37

Ravel, Rapsodie espagnole

라벨 ‘스페인 광시곡’

Maurice Ravel

1875-1937

Daniel Barenboim, conductor

West–Eastern Divan Orchestra

BBC Proms 2014 Prom 46

Royal Albert Hall, London

2014.08.20

 

Daniel Barenboim/West–Eastern Divan Orchestra - Ravel, Rapsodie espagnole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을 가리켜 ‘스위스의 시계 장인’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첫째는 라벨의 부친이 스위스 출신이라는 점, 둘째는 라벨의 음악 다루는 솜씨가 정밀하기로 이름난 스위스 시계 장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라벨은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법)의 명수로 유명했는데, 그의 관현악 기법과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대표 사례로 무소륵스키의 피아노 모음곡을 편곡한 <전람회의 그림>을 들 수 있다. <스페인 광시곡>은 그러한 라벨의 첫 번째 본격 관현악 작품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프랑스 작곡가들의 스페인 선호 경향

제목에도 드러나 있지만, 이 곡은 여러 모로 스페인과 관련이 있다. 곡 전체에서 스페인 특유의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오며, 중간 두 곡에 붙어 있는 ‘말라게냐’와 ‘하바네라’라는 제목도 스페인에서 유래했다. 또 라벨의 어머니는 바스크 출신이었고, 라벨 또한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령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어떤 이는 라벨의 출생 성분에서부터 이 곡의 유래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라벨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바스크 지방을 떠나 파리로 이주했고, 더욱이 바스크 지방을 스페인이라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차라리 그보다는 19세기 이래 프랑스 작곡가들의 이국 취향과 스페인 선호 경향을 돌아보는 편이 나을 듯싶다. 그 유명한 사례들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랄로의 바이올린 협주곡인 <스페인 교향곡>, 드뷔시의 <이베리아> 등을 들 수 있겠다. 라벨도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하바네라 형식의 보칼리즈(에튀드)>, 오페라 <스페인의 한때> 등을 이 곡과 비슷한 시기에 작곡하며 스페인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또 이 곡을 구상하고 작곡하는 과정에서 그가 좋아했던 샤브리에의 광시곡 <에스파냐>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라벨은 이 <스페인 광시곡>에서 스페인 민속음악을 직접 차용하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라벨과 친분을 나누었던 스페인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의 말을 귀담아 들어둘 필요가 있다. “(라벨의) 광시곡은 나(파야)의 의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스페인 기상곡>을 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즉, 그의 스페인 색채는 민중의 자료를 그저 이용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것이 ―‘축제’ 속의 ‘호타’는 예외지만― 우리 민요의 리듬, 선법적인 가락, 장식 음형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작곡가 고유의 방식을 조금도 변질시키지 않음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스페인 광시곡>의 유래는 1895년에 작곡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하바네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에 라벨이 다른 세 곡을 덧붙여 전곡의 형태를 정리한 것은 1907년 10월의 일, 2대의 피아노를 위한 그 원고를 관현악용으로 고쳐 써서 완성한 것은 1908년 2월의 일이었다. 전곡은 ‘밤의 전주곡’, ‘말라게냐’, ‘하바네라’, ‘축제’ 등 네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곡: 밤의 전주곡

'밤의 전주곡(Prelude à la nuit)‘은 보통 빠르기로 진행되는 3/4박자의 곡으로, 관능적인 색채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호젓한 밤의 정취 속에 아련한 향수의 느낌이 담겨 있는 야상곡 풍의 음악이다. 처음에 바이올린 파트가 연주하는 동기와 잠시 후 그 위에서 클라리넷이 꺼내놓는 악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의 동기는 순차 하행하는 네 개의 음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곡뿐만 아니라 두 번째 곡과 네 번째 곡에서도 나타난다. 클라리넷은 주요 악상 외에도 화려한 카덴차도 이끌어내며 이국적인 색채를 주도한다.

제2곡: 말라게냐

생기 있는 3/4박자의 곡으로 앞 곡에서 중단 없이 이어진다. 말라게냐(Malaguena)는 스페인 말라가 지방의 민속무곡인데, 곡의 전반부와 말미에 말라게냐 리듬이 활용되고 있다. 전반부는 트럼펫의 취주와 캐스터네츠 리듬이 돋보이는 가운데 활기차게 지나가고, 후반부에서는 템포가 뚝 떨어져 잉글리시 호른이 투나딜랴(작은 노래) 풍의 고즈넉한 선율을 연주한다. ▶말라게냐를 추는 여인

제3곡: 하바네라

아주 천천히 느긋한 리듬으로 진행되는 2/4박자의 곡으로, 두 가지 하바네라(Habanera) 리듬에 기초하고 있다. 2/4박자이면서도 3박자와 2박자가 결합되어 있는 리듬 전개, 일견 모호한 듯하면서도 정밀한 짜임새가 돋보인다. 라벨의 섬세하고 교묘한 기법이 가장 잘 부각된 곡이라 하겠다.

제4곡: 축제

6/8박자로 진행되는 일종의 디베르티멘토로서, 주부에는 5개의 민요 가락이 사용되었다. 전체적으로 스페인 서민들의 축제(Feria)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열기와 활력, 떠들썩함이 생생하게 분출되지만, 한편으론 잉글리시 호른이 탄식의 노래를 들려주는 중간부를 중심으로 섬세하고 관능적인 분위기도 충분히 드러난다. 라벨의 정열적인 기질과 절묘한 균형 감각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곡이라 하겠다.

Juanjo Mena/BBC Philharmonic - Ravel, Rapsodie espagnole

Juanjo Mena, conductor

BBC Philharmonic

BBC Proms 2011 Prom 10

Royal Albert Hall, London

2011.07.22

추천음반

연주시간 15분 안팎의 비교적 짧은 곡인만큼 '라벨 관현악 선집'류의 음반들에는 대개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중 라벨 연주로 유명한 지휘자들의 음반을 위주로 넉 장을 골라 보았다.

1. 먼저 아날로그 시절의 명반들 중에서는 에르네스트 앙세르메(Decca)와 앙드레 클뤼탕스(EMI)를 골라보았다. 두 지휘자의 성향은 상당히 대조적인데, 앙세르메가 지휘한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정밀한 균형감과 조형미가, 클뤼탕스가 지휘한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다채로운 표현력과 즉흥성이 돋보인다.

2. 디지털 시대의 음반들 중에서는 피에르 불레즈(DG)와 파스칼 토르틀리에(Chandos)를 언급해야겠다. 불레즈가 지휘한 베를린 필의 연주는 정교한 해석과 기능미의 극치를 보여주며, 토르틀리에가 지휘한 얼스터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는 충실한 해석과 풍부한 공감이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 감상실 ‘무지크바움’ 실장과 한국바그너협회 사무간사를 역임하였다. 무지크바움, 부천필 아카데미, 성남아트센터, 풍월당에서 클래식음악 교양강좌를 맡고 있다. <객석>, <스테레오뮤직>, <그라모폰>, <라무지카> 등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 노트를 담당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문화예술>음악>기악합주>관현악  201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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