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위산일궤(爲山一簣) - 산을 만드는 일도 한 삼태기의 흙부터

라라와복래 2015. 3. 24. 09:51

[논어 명언명구]

위산일궤(爲山一簣)

산을 만드는 일도 한 삼태기의 흙부터

대박을 권하며 동전을 버리는 사회에 살고 있다.

동전 모으는 손의 꾸준함과 아름다움을 살펴보자.

 

일을 하면 1일, 1주일, 분기, 1년 등 일정한 시간 단위로 결산을 한다. 실적에 따라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높게 쌓인 실적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야트막한 높이는 사람을 왜소하게 만들 수 있다. 뒤처진 사람은 이러한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자극으로 여길 수 있다. 다른 방향도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격차를 좁혀야 하는 중압감에 사로잡혀서 결과를 수긍하지 못하고 격차를 한꺼번에 뒤집으려고 몸부림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요즘 ‘대박’, ‘한방에’, ‘한 큐에’ ‘단 한 번에’ ‘인생역전’ 등의 말처럼 소의 걸음으로 착실하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가는 것보다 성큼성큼 뛰어가는 것을 권하고 있다. TV의 대출 광고에서조차 ‘전화 한 통화로 담박 대출’을 선전하고 있다. ‘대박’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아니 그것은 치명적이다. 순간을 이어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대박은 되풀이되는 일상을 팽개치도록 권유한다. 위산일궤(爲山一簣)는 하나씩 조금씩 쌓아 가는 ‘반복된 일상’의 의미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돌아보게 만든다.

<논어> 자한(子罕)편 19장

— 229번째 원문

예컨대 흙을 쌓아 산 모양을 만들 때

겨우 한 삼태기 분량의 흙을 채우지 못한 채

일을 그만둔다면,

다름 아니라 바로 내가 그만둔 것이다.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할 때

겨우 한 삼태기 분량의 흙을 갖다 부었을 뿐이라도

일을 진척시켰다면,

다름 아니라 바로 내가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譬 : 비(譬)는 비유하다, 예를 들다, 깨우치다는 뜻이다.

如 : 여(如)는 무엇과 같다, 비슷하다는 뜻이다.

爲, 爲山 : 위(爲)는 보통 하다, 되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지만 여기서 쌓다, 만들다는 뜻이다. 위산(爲山)은 흙을 쌓아서 산 모양으로 만들다는 뜻이다.

簣 : 궤(簣)는 물건을 담는 도구로 삼태기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흙을 퍼다 나르는 도구이다.

平, 平地 : 평(平)은 평평하다, 고르다의 뜻이다. 평지(平地)는 위산(爲山)과 같은 문법 구조로 평평한 땅이 아니라 땅을 평평하게 고르다는 뜻이다.

覆 : 복(覆)은 엎다, 뒤집다는 뜻이지만 여기서 먼저 흙을 삼태기에 담아다 다른 곳에 가서 삼태기를 엎어서 그 속의 흙을 붓다는 뜻이다.

다재다능했던 공자

<논어>를 읽다보면 산을 만드는 조경과 땅을 평평하게 만든 건설 공사처럼 생업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또 다른 곳에서는 뿔이나 나무를 가지고 공예품을 만드는 이야기도 나온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공자가 서재에 앉아서 사색을 하고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샌님’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만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도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기술을 가진 공자의 다재다능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노나라의 태재(太宰)가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에게 공자는 “뛰어난 성인인데 여러 가지 분야에 재주가 뛰어난가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자공은 나름대로 추측해서 태재에게 대답을 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공자는 아주 쿨하게 대답했다. “나는 어렸을 적에 가난해서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일이라도 닥치는 대로 해서 재능이 많다.”(<논어> ‘자한’편 6장) 공자는 자신의 성장기를 부끄러워하며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공자의 말을 오늘날 인생 대담에서 편하게 하는 말투로 바꾸어서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집이 못살아서 안 해본 일이 없어요. 가죽을 돌보는 일이나 창고를 지키는 일이랑. 당시 돈이 된다면 뭐든 다 했어요!”

공자는 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학자로서 고상한 척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밝혔다. 공자가 보통 사람이 아닌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공자는 학문적 성취를 이룬 뒤에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시키지 않았다. 사람은 성장 배경이 각각 다르므로 “꼭 비천한 일을 해야 학문적으로 뛰어날 수 있다”라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이 젊어서 한 고생을 자신의 삶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다. 간혹 우리 주위의 자수성가한 사람을 보면 “자기처럼 고생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이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아서 문제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한 분야에 성취를 거두는 길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공자도 학문적 성취에 이르는 길이 자신의 길만이 아니라 다른 길도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일의 성패와 주체적인 결단

이제 우리는 공자가 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가면서 직업과 관련된 비유를 사용하게 되는지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살려서 듣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학문이 아닌 직업의 세계를 실례로 들었던 것이다.

공자는 왜 인공 산을 만들고 땅을 평탄하게 하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을까? 사실 인공 산을 만들고 땅을 평탄하게 하는 일은 한 삼태기의 흙을 옮기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삼태기로 흙을 수없이 많이 퍼다 날라야 한다. 여기서 공자는 수없이 많이 흙을 옮기는 작업의 과정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삼태기로 흙을 옮기는 마지막 단계와 첫 단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인공 산의 경우 수없이 많은 흙을 갖다 나른 끝에 완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 과정에 그만두고 싶거나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지만 이겨냈던 것이다. 최후로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옮기면 인공 산이 완성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때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남겨두고 공사를 중단했다고 해보자.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너무 힘들어 마지막 단계에서 포기한다면, 인공 산 쌓는 일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그만둔 것이다.

또 사람들이 울퉁불퉁한 길을 다니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길을 평평하게 하는 공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였다. 하지만 누구도 흙을 옮겨서 길을 평평하게 하려고 하지 않고 말만 늘어놓는다면 길이 저절로 평평해질 리가 없다. 이때 ‘내’가 삼태기에 흙을 담아서 파인 곳에 그 흙을 옮긴다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일을 진척시킨 것이다.

여기서 공자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기만 하거나 시작한 일을 관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물음을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마지막 삼태기와 첫 삼태기에 주목하게 했다. 공자는 일의 성공과 실패가 외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결국 주체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 공자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더라면 사회적 조건보다 주체적 노력을 강조하는 주장이 다소 가진 자의 여유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공자는 탄생에서부터 성장까지 실패와 결핍의 삶을 살았던 만큼 주체적 노력의 강조가 설득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기만 하거나 시작한 일을 관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일의 성공과 실패가 외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결국 주체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

대박은 시한폭탄이다

우리도 새해나 변화의 전기에 그럴 듯한 목표를 세운다. 그 목표를 도달했다 싶으면 금세 또 다른 목표가 생겨난다. 그렇게 목표가 또 다른 목표를 낳는다. 이렇게 우리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결코 목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고 그 위에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결국 새로운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근대 이래로 사람은 노동하는 삶을 피할 수 없다. 대박 신드롬은 피할 수 없는 노동을 끝장낼 수 있다는 탈출의 초대장으로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대박은 소수에게만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가능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지금의 고통을 미래의 희망과 교환하려는 가정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 그 믿음이 유효한 힘으로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잠시나마 행복에 젖을 수 있다. 다수가 이 행복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는 만큼 대박을 쫓는 사회는 위험해진다.

사실 대박의 꿈은 상상의 세계에만 존재하므로 현실 세계에서 끊임없이 떠다닐 뿐이다. 따라서 대박의 시한폭탄이 터진다면, 사회는 집단적인 우울증을 겪게 된다. 일의 고통은 여전하고 일의 고통을 끝낼 대박이 허상으로 드러나면서 탈출구 없는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위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이다.

강 위에 떠다니는 부유물을 건져내려고 했던 사람은 안다. 처음에 부유물을 쉽게 손을 쥘 수 있으리라 상상하지만 우리가 부유물에 다가가면 다가가는 만큼 부유물도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멀어지는 만큼 앞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세차게 일어난다. 이렇게 대박은 다가가려는 우리와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을 때 효력을 발휘한다. 거리가 좁혀지거나 대박을 손에 쥐면 모든 것이 화려하게 바뀔 것이라 상상한다. 갑작스레 바뀐 환경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흥청망청하다가 대박은 쪽박으로 바뀌게 된다.

공자는 우리가 인공 산을 그냥 쌓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한 삼태기를 옮기는 순간까지 생각해야 하고, 땅을 평평하게 고를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첫 삼태기를 옮기는 순간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내’가 마지막까지 그리고 처음을 옮겨야 하는 운명을 자각함으로써 인공 산은 산으로 완성되고 울퉁불퉁한 길은 평평한 길로 바뀌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작업으로 땅을 고르는 허황된 대박을 꿈꾸면서, 꿈에서 이루어진 대박에 기대어 자신의 인생을 온갖 행복으로 장식하겠지만, 그 꿈은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것이지 현실과 맞서려는 용기가 아닌 것이다. 행복을 향한 용기는 대박을 꿈꾸는 곳이 아니라 일상을 만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대박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이루면 뭔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지리라 상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사람인 한 늘 하던 일상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행복한 삶은 늘 되풀이되는 단조로운 일상을 완전히 그만두고 화려하고 품위 있는 삶만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삶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상을 벗어나 하고 싶어서 하는 유쾌한 삶을 사는 것이다. 행복은 또 다른 삶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신세계가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삶을 만족과 쾌활한 방식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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