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루이스 리카르도 팔레로 - 그림에 천문학 지식을 담다

라라와복래 2015. 7. 23. 15:09

루이스 리카르도 팔레로

그림에 천문학 지식을 담다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220422355668     2015.07.16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 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2009)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극사실에 가까운 누드화를 만나면 여전히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여인의 몸이고, 그래서 미술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라는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지만, 아주 오래전에 머리에 입력되어 있는 이상한 정보로 인해 지금도 여인의 누드화를 샅샅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아예 작정하고 누드화를 정면으로 만나기로 했습니다. ​일러스트 같기도 하고 회화 같기도 한 루이스 리카르도 팔레로(Luis Ricardo Falero,1851-1896)의 작품은 언제 봐도 매력적입니다.

님프 Nymph, 115.6x185.6cm, oil on canvas, 1892

수영을 하는 님프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유쾌한 성격의 아가씨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예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수영을 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다고 했더니 님프는 인간과 다르니까 문제 삼지 말라고 합니다. ​님프의 몸과 긴 머리가 만들어 낸 잔물결을 묘사한 기법에 잠시 숨을 죽였습니다.

팔레로는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태어났습니다 (톨레도라고 표기된 자료도 있는데 그라나다라는 자료가 더 많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을 스페인 해군으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열다섯 살에 해군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팔레로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길을 포기합니다. 팔레로의 생각은 다른 데 있었던 모양입니다.

밤의 뮤즈 Muse of the Night

밤에만 움직이는 박쥐가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고 있는데, 붉은 천을 두른 빗자루를 타고 밤의 뮤즈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손에 든 작은 횃불은 밤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빗자루는 마녀들이 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뮤즈 중에는 천문을 관장하는 뮤즈가 있고 보통 지팡이를 들고 등장하는데 혹시 그 지팡이를 타고 있는 것 아닐까요? ​밤에 두 눈 크게 뜨고 있으면 밤의 뮤즈를 만날 수 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해군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동안에 수채화를 배웠던 팔레로는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파리로 건너가 예술과 화학, 기계공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화학과 기계공학은 그에게 너무 위험했습니다. 요즘도 화학 실험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번에는 화학과 기계공학을 포기하고 덜 위험한 미술만 공부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부모는 너무 화가 나서 생활비를 끊고 말았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겠지요.

사바스에 가는 마녀들 Witches going to their Sabbath, 145.5x118.2cm, oil on canvas, 1878

사바스가 안식일을 뜻하기도 하지만 마녀와 연결이 되면 악마가 주최하는 모임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겠지만 사바스에 참석할 때 마녀들은 빗자루나 동물을 타고 간다고 합니다. ​그림 속 마녀들의 모습을 보면 사바스가 어떤 모임인지 짐작이 됩니다. ​내용은 어둡고 불편하지만 작품에서는 관능이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원작 앞에서면 어떤 느낌일지 무척 궁금합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을 위해 팔레로는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수채화도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흥미를 가지고 있던 천문학과 연금술에 대한 주제로 자주 작품을 제작합니다. ​훗날 그의 작품 속 배경이 되는 하늘은 천문학적인 지식이 바탕이 된 것이었고 그것도 꽤 깊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천문학을 사랑한 화가 ― 멋진 이름입니다.

매혹적인 여인 The Enchantress, 27.3x19.5cm, oil on canvas, 1878

여자 마법사라는 제목도 가능하지만 매혹적인 여인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여인의 의상이나 배경에 쓰인 글씨를 보면 무대는 중동 어디쯤이겠지요. 19세기 유럽을 휩쓴 열풍 중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었습니다. ​새로운 문화나 모습을 소개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이국적인 장면 속에 여인들의 뇌쇄적인 모습이 더해지면서 왜곡된 이미지를 담기도 했지요. 그나저나 여인의 눈에 담긴 애수, 설명할 길이 없군요.

팔레로가 누구에게서 그림을 배웠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아직 인상파가 파리의 미술계의 주류가 되기 전이니까 당시 주류였던 아카데미즘 화풍을 따른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30대 중반, 팔레로는 런던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합니다.

누워 있는 누드 Reclining Nude, 1879

여인은 지금 꿈의 한 자락을 잡고 있습니다. ​꿈의 내용이야 개인의 것이니까 뭐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꿈속에서 느끼는 열락이 잠이 든 여인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한 손에 쥐고 있는 담뱃대와 뒤틀린 몸, 그리고 여인의 몸에 쏟아지는 빛이 어우러지면서 매력적이면서도 선정적인 장면이 만들어졌습니다. 행복한 꿈이었는지 여인이 잠에서 깨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마리아라는 이탈리아 여인과 결혼한 팔레로는 런던의 햄스테드라는 곳에 정착을 했는데 그곳은 화가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았다는 뜻도 됩니다. 서른여덟 살이 되던 1889년부터 5년간 팔레로는 로열 아카데미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런던에서도 화가로서 확실한 위치를 쌓았던 모양입니다.

선술집에서의 파티 The party at the tavern, oil on canvas, 1880

선술집에서 파티가 열렸습니다. 연극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앙에 있는 남자가 앉아 있는 여인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고 행복한 표정의 여인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그 옆에 북을 치는 피에로까지가 한 팀이겠지요. ​뒤의 관객들은 흥미진진하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술에 취한 사람들끼리의 장난도 시작되었습니다. ​매일 이런 시간을 즐기기는 어렵겠지만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몸과 마음을 가끔 풀어 놓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슬쩍 끼어들고 싶습니다.

로열 아카데미에 참가하기 2년 전, 팔레로는 자신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당시 신문은 팔레로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 이상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받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뜻이겠지요. 실제로 팔레로의 작품은 초기 작품부터 복제품이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공급될 정도였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여인의 누드라는 것이 더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달의 요정 Moon Nymph, 76x51cm, oil on canvas laid on board, 1883

달의 요정이라는 표현을 보는 순간 연상되는 단어는 ‘세일러 문’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좋아했던 만화영화 제목이지요. ​그러나 저는 항아(姮娥)가 더 친숙합니다. 늙지 않는 약을 훔쳐 먹고 달에서 살고 있다는 여인인데 예쁜 여인을 대표하는 이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검은 하늘과 별을 배경으로 달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요정의 자세가 날렵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모습에서 경쾌함도 느껴집니다. 이제 초승달에 올라앉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팔레로의 작품은 거의 완벽한 사실적인 묘사 기법으로 신화와 요정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은 어느 정도 성적인 매력을 담고 있고 팔레로 역시 이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두고 훗날 핀업 걸(pin-up girl)을 그린 그림 같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정통 화가로서 그가 보여준 재능에 흠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빛나는 하늘 아래의 요정 A Fairy Under Starry Skies, 59.1x103.5cm, oil on canvas

요정이 있는 곳 위로 햇빛이 찾아들었습니다. 커다란 날개를 펴서 햇빛을 가렸지만 그래도 눈이 부셨는지 한 손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표정을 보니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렸습니다. 나쁜 일을 하다가 들켰을 때 아이들이 짓는 미소와 닮았습니다. ​오른쪽 구석에 무엇인가 보이는데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요정의 미소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의 상상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팔레로가 가장 좋아했던 주제는 하늘이었습니다. ​작품 속 배경은 과학적인 지식이 담긴 것이었고 실제로 그는 천문학자 카미유 플라마리옹이 펴낸 책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가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요정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상상과 연결되면서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작품들이 제작된 것이지요. 한편으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종교적인 주제에도 눈길을 주곤 했습니다.

동방의 미녀 An Oriental Beauty, 73.6x41cm, oil on canvas

가끔 미술 작품을 보다가 소름이 돋을 때가 있습니다. ​주제가 주는 파격이나 저의 기분을 알고 바로 위로를 주는 경우, 그리고 이 작품처럼 사진보다 더 정교하게 묘사된 작품을 만날 때입니다. ​여인의 몸을 장식하고 있는 장신구는 말할 것도 없고 입고 있는 나삼의 질감 표현이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나올 것 같은 사실감이 느껴집니다.

1896년, 마흔다섯 살이 된 팔레로는 메리 하비라는 여인으로부터 고소를 당합니다. 메리는 열일곱 살 때 팔레로 집안의 가정부로 일했고 그의 모델로도 활동했던 여인이었습니다. ​팔레로가 그녀를 유혹했고 그녀가 아이를 갖게 되자 그녀를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재판 결과는 메리의 승리였고 팔레로는 양육비로 매주 5실링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화가와 모델과의 관계가 그렇고 그런 시대였다고는 해도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나 몰라라 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달빛 받은 미녀들 Moonlit beauties, 104.8x52.7cm, oil on canvas

검지를 쳐들자 손가락 위에 작은 등이 켜졌습니다. 그 빛으로 여인들의 몸이 캄캄한 하늘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치는 심해어처럼 여인들의 몸짓은 부드럽고 고요합니다. ​멀리 또 다른 여인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는 별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하늘에 올라 별이 되는 것일까요? 상상이 끝없이 이어지는 몽환의 세계입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팔레로는 재판이 있었던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겨우 마흔다섯이었습니다. ​그가 아내에게 남긴 돈은 1,139파운드 10실링이었는데 양육비는 그가 죽고 나자 더 이상 지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담긴 작품을 그렸지만 참 각박한 인심이었습니다. ​팔레로의 작품이 그렇지 않아도 더운 체온을 조금 더 올려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