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20세기 포토저널리즘의 빅 포

라라와복래 2015. 8. 4. 23:04

20세기 포토저널리즘의 빅 포

한 장의 사진이 때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진이 현장을 가장 가감 없이 증거하고, 말과 활자보다 단박에 상황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그 객관성에 대한 믿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진실성을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진이 사건의 거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때로는 특정 관점에서 사건을 조작하기도 합니다. 과거 ‘대한늬우스’처럼. 그리고 그러한 '조작'은 지금도 국가기관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진이 ‘현실’을 포착한다고 믿는다면 순진한 것입니다. 그 사진이 왜 찍혔는지, 누가 그것을 유포했는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아무튼 19세기에 개발된 사진은 20세기 초부터 보도와 기록의 현장에는 빠질 수 없는 매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새롭게 세상을 접했고 그것을 역사의 기억으로 새겼습니다. 사진작가들은 충실한 현장 보도자이자 역사 기록자, 에세이스트이자 예술가, 그리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합니다. 책이나 TV, 광고물을 보다가 “아, 저 사진” 하고 반가워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리 찍었을까, 전설이 된 사진작가들과 작품을 만나봅니다.

소개하는 알프레드 아이젠슈테인, 마거릿 버크화이트,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다큐멘터리 포토저널리스트로서 동시대에 살면서 역사를 사진으로 증언한 ‘20세기 포토저널리즘의 빅 포’입니다. 물론 이 네 사람을 뽑아 ‘빅 포’라 한 것은 전적으로 저의 주관적 기준일 뿐입니다.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 Alfred Eisenstaedt 1898-1995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는 로버트 카파와 카르티에 브레송을 제치고 ‘세기의 보도사진 기자’로 뽑힌 바 있습니다. 아이젠슈테트가 카파나 브레송보다 잘 했던 것은 ‘엮음사진’(photo story)으로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이었습니다. <라이프>의 창간(1936)부터 종간(1972)까지 함께한 그는 이야기로서의 사진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잡지의 품격을 높였으며 ‘포토저널리즘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들었습니다.

아이젠슈테트는 35mm 라이카 사진기를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인간의 감정을 극적 순간을 넘어서 포착하는 착안력이 뛰어난 작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아이젠슈테트의 눈>(1969)에서 그는 “모든 포토저널리스트들은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을 발견하고 포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V-J Day in Times Square, 1945

일명 ‘세기의 키스’로 유명한 사진입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과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뉴욕 타임스 스퀘어 광장으로 몰려 나와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던 시민들의 물결 속에서 뜨겁게 포옹하며 키스하는 수병과 젊은 간호사. 근데 이들은 연인 사이가 아니라 생판 모르는 사이였다죠. 가두행진을 하던 수병이 느닷없이 간호사를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던 것. 영화 <박물관이 살아 있다> 2편에서 주인공 래리가 이 흑백사진 속으로 들어가 여인과 키스하는 패러디 장면이 나옵니다. V-J Day는 Victory over Japan Day라고 합니다.

Violinist N. Milstein, pianist V. Horowitz, and cellist G. Piatigorsky, Berlin 1932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1903-1992),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1903-1976)가 1932년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에서 협연을 하며 막간에 백스테이지에서 환담하며 쉬고 있는 모습입니다. 러시아 태생의 이들 천재들은 유럽에서 활동하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각기 분야에서 20세기 거장이 됩니다. 이날 협연한 곡이 무엇인지는 사진 설명에 없어 모르겠으나 이후 세 사람이 협연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George Bernard Shaw, 1932

영국의 극작가이자 독설과 명언으로 유명한 조지 버나드 쇼(1856-1950)의 집을 찾아가 찍은 사진입니다. 아이지(아이젠슈타트의 애칭)의 후일담. “1932년 버나드 쇼를 찍고자 런던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그 양반 괴팍해서 만나기 어려울 걸세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양반 채식주의자라며 하고는 바나나 한 다발과 사진 포트폴리오를 집으로 보냈지. 이틀 후 방문 허락을 받고 그의 집에 가자 쇼는 내 사진을 죽 훑어보더니만 이러는 거야. 나보고 포즈를 취해 달라고는 하지 말게. 나도 사진가거든….”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유명하죠.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Goebbels, 1933

1933년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한 히틀러의 최측근 선전장관 괴벨스를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가를 곧 팰 듯이 쳐다보는 눈빛을 아이젠슈테트는 장기인 스냅숏으로 잡아냈습니다. 괴벨스의 눈빛을 흔히 ‘악마의 눈빛’이라고 하더군요. 대중선동의 천재 괴벨스는 이미지를 각색하고 조작한 뒤 이를 언론과 방송 장악을 통해 배포하고 확산시킴으로써 나치즘을 신화화한 장본인입니다. 1945년 5월 1일, 나치의 무대감독으로서 악마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괴벨스는 아내와 6명 아이들과 함께 동반 자살함으로써 그가 연출한 역사의 잔혹극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Children follow the Drum major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1950

취주악대장을 흉내 내며 뒤를 졸졸 따라가는 아이들 각자의 절묘한 모습이 배꼽을 잡게 합니다. “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싶은 사진 중 하나가 바로 이 미시간 대학 취주악대장이 연습하는 모습이라네. 이른 아침이었는데, 웬 꼬마가 취주악대장 꽁무니를 따라가며 흉내를 내고, 이어 운동장에서 뛰놀던 아이들 무리가 그 꼬마 뒤를 따라가며 흉내 내고, 그래서 나도 그들 뒤를 따라가다 찍은 사진이야. 이거 완전 즉흥 사진이야. 절대 각색한 게 아냐.” 아이젠슈타트의 회고담입니다.

Marilyn Monroe, 1953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를 촬영할 무렵의 모습. “마릴린 먼로를 찍을 때 나는 카메라 한 대에는 흑백필름을, 다른 한 대에는 컬러필름을 준비했지.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컬러 사진은 단 두 장만 제대로 나왔어. 내가 좋아하는 이 사진을 내 사무실 벽에 늘 걸어놓고 보는데, 할리우드에 있는 그녀 집의 작은 테라스에서 찍은 거라네.” 아이지는 정치인ㆍ작가ㆍ배우 등 유명 인사들을 많이 찍었는데, 여배우로는 마리네 디트리히, 베티 데이비스, 캐서린 헵번, 소피아 로렌 등을 좋아했습니다.

마거릿 버크화이트 Margaret Bourke-White 1906-1971

“나의 삶과 경력은 우연이 아니었다.”(My life and career was not an accident.) 1938년 <라이프> 창간호는 표지에 웅장한 포트 펙 댐 사진을 싣고 초판 38만 부의 대박을 터뜨립니다. 마거릿 버크화이트가 그 사진의 작가입니다. 서방 기자로서는 최초로 죽음의 유태인 수용소의 참상을 전달한 기자이자, 애써 얼굴을 감추던 스탈린을 찍어 특종을 터뜨린 그녀는 사진을 단순한 현장 전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계의 여론과 정치의 향방을 결정짓도록 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게 합니다.

헬리콥터나 마천루에서의 아슬아슬한 고공 촬영, 한편으로는 인간의 일상 모습에 정신세계까지 불어넣는 작품들은 ‘포토저널리즘의 퍼스트레이디’라는 버크화이트에 바친 찬사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어 6ㆍ25전쟁 동안 많은 사진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때 걸린 뇌염이 원인이 되어(본인은 그렇게 믿었다지만 이에 대한 의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파킨슨병으로 사망합니다.

Gandhi at Spinning Wheel, 1946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유명한 사진이죠. 간디의 역사의식과 사상에 깊이 감명을 받은 버크화이트는 그를 제대로 취재하기 위해 물레질까지 배웁니다. “물레를 잣는 사람을 찍고 싶으면 그가 왜 물레를 잣는지 생각해보라. 이해한다는 것은 찍는 일만큼 중요하다.” 그 결과 버크화이트는 자신의 사진을 통해 간디의 정신세계를 완벽히 표현해냈습니다. “인도인들에게 물레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었다. 간디는 물레가 발휘할 경제적이고 영적인 힘을 빈틈없이 계산하고 있었다. (…) 비폭력이 간디의 좌우명이라면, 물레는 그의 가장 막강한 무기였다."

Fort Peck Dam, First Cover of Life Magazine, 1936

버크화이트의 빛나는 순간은 1936년 시사지 <라이프>의 창간과 함께 합니다. 사진 위주의 시사저널 붐이 일어나던 그때 <라이프>는 대공황과 뉴딜 정책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하여 포트 펙 댐을 창간호 표지로 결정하고, 일찍이 건축 사진과 산업 사진에 일가견이 있던 버크화이트를 그 적임자로 선정합니다. 버크화이트가 주도하여 산업과 인간의 조화를 엮은 이 포토스토리는 포토저널리즘의 범위를 확장시킨 계기로 평가받았습니다. 사진이 현장 기록을 넘어 기사의 관점을 보여줄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죠.

Margaret Bourke-White, Self-Portrait, 1943

마거릿 버크화이트에게는 ‘세계 최초’, ‘여성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습니다. 버크화이트는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격동의 현장에서 역사를 찍고 세상을 담았습니다. 당시 사진가들은 거의 남성이었습니다. 카메라도 무거웠고 움직임이 많다보니 여성에게는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성들이 바지 입기를 꺼릴 때 그녀는 바지를 입고 현장을 누볐습니다. 그녀는 외국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소련 산업 단지를 촬영했고, 미 공군 최초의 종군 사진기자로 유일하게 독일의 모스크바 공습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위 사진은 1943년 그녀 스스로 촬영한 셀프-포트레이트입니다. 자신만만한 표정이 돋보입니다.

Buchenwald, 1945

독일 바이마르 근교에 있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는 1945년 4월 11일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대가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는 살아남은 유태인 수용자 대부분이 나치에게 끌려가 ‘죽음의 행진’을 한 뒤였고, 남은 수용자들은 너무 쇠약하거나 병들어서 걸을 수 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버크화이트의 부헨발트 사진은 나치의 잔학 행위를 믿지 못하던 세계인들에게 최초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비좁게 들어찬 침상에서 느껴지는 공포, 의심에 가득찬 시선 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사진은 ‘해방’의 고전적 이미지가 되었습니다(이보다 더 끔찍한 사진도 많습니다). 유명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본회퍼도 해방 한 달 전 이곳에서 처형당했습니다.

A DC-4 flying over New York City, 1939

이 사진은 달리 설명할 게 없는데, DC-4 여객기가 뉴욕시 맨해튼 상공을 나는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여장부, 여걸다운 버크화이트의 기개가 느껴지지 않나요.

Margaret Bourke-White working atop the Chrystler Building, NY, 1934

사진을 보니 어떠세요? 아찔하죠. 버크화이트가 1934년 뉴욕시 크라이슬러 빌딩 꼭대기에서 촬영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로프 같은 생명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입니다. 이 사진은 그녀의 조수 그라우브너가 찍은 것입니다.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1913-1954

카파는 사진기자라는 직업을 말의 참된 의미에서 매력적으로 만든 최초의 인물이고, 오늘날까지 모든 사진기자들에게 전쟁사진의 전설로 살아 있습니다. 자기희생과 위험을 무릅쓴 취재정신을 일컫는 ‘카파이즘’도 전쟁터에서 태어났습니다. 카메라 하나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담아내며 짧지만 더할 나위 없이 드라마틱했던 삶을 산 카파는 그의 사진들을 통해 ‘포토저널리즘의 새 역사를 썼다’는 평가와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라고 말했던 불세출의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한 시대의 결정적인 순간을 붙잡기 위해 숱한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고 끝내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나는 사진가가 아니다. 저널리스트다”라는 말처럼 카파는 미학자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사진가’로서 여기지 않았고 현실을 증언하는 ‘저널리스트’로서 처신했습니다.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1936

프랑코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내란을 일으키고 인민전선파가 이에 대항하여 싸우던 상황에서 1936년 9월 5일, 스페인 코르도바 근처 전선에서 한 병사가 참호에서 뛰쳐나오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잡은 일명 ‘병사의 죽음’이라는 이 사진은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20세기 사진 중 하나입니다.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에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라이프>에 게재되면서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집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떠올리게 한다는 ‘순교의 이미지’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사실 이 사진에는 전쟁에 대한 관념도 이념도, 인간에 대한 연민도 분노도 없습니다. 이 사진에는 총에 맞은 병사의 죽음이라는 사실만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이 사진이 주는 이미지의 울림은 더욱 큰 것이 아닐까 합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전쟁에 관한 ‘기술(記述)의 영도(零度)’입니다.

American Troops Landing on D-Day, Omaha Beach, Normandy Coast, 1944

2차 세계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 1944년 6월 6일 감행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제1파 상륙정 부대원들. 상륙작전이 시작되었고 해안까지 거리는 100미터. 제1파 상륙정에 승선했던 군인들은 해변의 모래밭에 닿기도 전에 거의 대부분 죽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초반 전투 장면은 바로 카파가 찍은 이 사진들을 원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카파의 손은 흔들리고 있었다’라는 설명이 붙은 이 사진은 초점이 맞지 않고 심하게 흔들렸지만 오히려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해줍니다. 카파는 총탄과 포탄 소나기 속에서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와 셔터를 누르는 손이 마구 떨렸고 그 떨림은 도저히 멈추지 않았습니다. 카파는 죽음의 탄환이 쏟아지는 노르망디 해안을 직접 누비며 셔터를 누른 유일한 사진가였습니다.

War and Woman, Collaborationist is Scorned, Chartres, France, 1944

1944년 8월 18일. 카파는 막 해방이 된 샤르트르 시에서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프랑스 여인이 삭발을 당한 채 군중에게 조리질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사진으로 담습니다. 구경거리라도 난 듯 남녀노소 군중의 비웃는 시선은 중앙에 아기를 안고 걷고 있는 삭발당한 여인에게로 쏠려 있습니다. 그녀 바로 옆에 있는 제복을 입은 사내는 추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윽박지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사진 속 풍경은 분명 퍼포먼스가 아니지만 민족적 단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그 처벌의식은 인간 비극의 퍼포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Pablo Picasso and Françoise Gilot in France, 1948

카파는 종전 후 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습니다. 카파는 다시는 전쟁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마티스, 피카소,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험프리 보가트, 게리 쿠퍼와 친밀히 지내며 할리우드의 화려한 연회에서나 파리의 최하급 술집에서나 주위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선사하며 보헤미안 생활을 합니다. 특히 당대 은막의 여왕 잉그리드 버그만의 청혼을 받습니다. 1951년에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침 시모어 등과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을 설립하여 잠시 경영을 맡기도 합니다. 사진 속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의 여러 여인들 중 한 명으로 <피카소와의 삶>이란 자서전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Nam Dinh, South of Hanoi, Vietnam, 1954.5.25

1954년 4월 말 <라이프>는 일본에 있던 카파에게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를 요청했고 카파는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으로 떠났습니다. 5월 25일 아침, 남딘 교외에서 배로 강을 건너기 위해서 기다리는 동안에 카파는 그의 동료들에게 그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8시 40분, 포격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카파는 높이 자란 풀을 헤치고 전진하는 프랑스 소대의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찍은 위의 마지막 사진이 됩니다. 그는 다른 각도에서 군인들을 찍으려고 도랑의 경사를 오르다가 대인지뢰를 밟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카파는 왼쪽 다리가 잘려나가고 흉부가 파열된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카메라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입술을 달싹였으나 소리는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 41세, 다섯 번째 전쟁터였습니다. 이 사진은 카파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 Cartier-Bresson 1908-2004

‘세기의 눈’, ‘현대 영상사진의 아버지’, ‘사진미학의 교과서’, ‘사진계의 톨스토이’, ‘사진의 선승(禪僧)’ ― 이 모든 수식어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붙여진 것입니다. 브레송은 곰브리치의 명저 <서양미술사>에 유일하게 소개된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진은 보는 것이다.”, “카메라는 눈의 연장이다.”,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위해서이다.”, “사진은 저널이며 일기이며 삶의 메모이다.”라는 숱한 명언들을 쏟아냈습니다.

평생 소형 라이카 카메라만 사용한 브레송의 신화는 자연의 빛 아래서 육안에만 의존하고, 네거티브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트리밍을 일절 거부한 그의 사진철학에서 탄생했습니다. 브레송의 사진세계는 한 마디로 ‘결정적 순간’으로 압축됩니다. 즉, 그는 무엇보다도 눈앞에서 저절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 모두를 단 한 장의 사진의 테두리 속에 잡아둘 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진을 마치 불교의 선승이 도(道)에 이르는 과정과 흡사한 것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선승이 순간의 직관으로 도에 이르는 것처럼 그의 카메라 역시 순간으로 승부를 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직관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거기에서 본질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Behind the Gare Saint-Lazare, Paris, 1932

사진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다 안다는 ‘생 라자르 역 뒤에서’라는 사진입니다. 비가 온 뒤 물이 고인 철도역 뒤 물탕을 행인이 뛰어넘는 걸 찍은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행인 왼쪽 뒤 울타리에 비슷한 포즈로 도약하는 무희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는 것이죠. 이 찰나적이고 우연적인 작품은 브레송이 사진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찍은 명작입니다.

브레송은 말합니다. “현장범을 체포하는 것처럼 길에서 생생한 사진들을 찍기 위해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곤 했다. 무엇보다도 돌발하는 장면의 정수를 단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의 움직임 속에는 그 동작의 과정에서 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 순간이 있다. 사진은 바로 이 평형의 순간을 포착해 고정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고유의 사진철학을 그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불렀습니다.

Athène, Grèce, 1953

회칠이 벗겨지고 코니스가 깨진 건물과 두 여인 조상은 노쇠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문명을 표상합니다. 이렇게 회복할 수 없는 노쇠의 징후를 활력을 잃은 걸음걸이와 상복처럼 어두운 복장으로 그곳을 지나는 두 여인이 반복하는 듯합니다. 영원불변의 젊음을 간직한 여인 조상도 시간과 더불어 퇴색하여 마치 늙은 여인들로 변모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대칭 구조의 거리 풍경을 결정적 순간에 포착한 이 사진은 ‘네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한 변형으로 이해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Marilyn Monroe, 1960

관능적인 모습은 간 데 없고 정말 단아하고 청순한 마릴린 먼로의 모습입니다. 영화 세트장에서 찍은 이 사진은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상하로 양분된 구도로 위쪽의 사람들과 마릴린 먼로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뒤편에는 마릴린 먼로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배치하고, 화면의 절반 아래쪽에는 어느 쪽도 바라보지 않는 듯한 신비로운 시선을 던지는 중심인물을 담았습니다. 이 사진을 마릴린 먼로의 사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진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관능미, 백치미는 모두 상업의 세계가 만들어난 허상일 뿐이었던 것일까요…. 브레송은 유명인물 초상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내면의 침묵>(열화당)이라는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Srinagar, Kashmir, India, 1948

인도 카시미르 지방 스리나가르의 하리 파르발이라는 언덕에서 무슬림 여인들이 히말라야 산맥 뒤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한 폭의 종교화를 연상케 하는 이 사진은 무척 감명적이라 제가 특히 좋아하는 브레송의 작품입니다.

“영원을 순간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이 사진이라는 사실을 벼락처럼 깨닫게 되었다.”, “카메라는 나에게 스케치북이며 영감과 즉흥성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이고 사진 촬영은 사물과 자기 자신에 대한 상당한 존경심을 필요로 한다.”

Aguila, Abruzzi, Italy, 1951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사진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브레송의 이 사진을 소개했습니다. 브레송의 작품의 특색은 어떠한 극적인 경우에도 서민의 일상생활을 조심스럽게 취재하여 역사의 저변에 주목하게 한 점과 정확한 공간 처리로 뒷받침된 순간 묘사의 절묘함에 있습니다.

Manhattan Downtown, New York City, 1947

브레송의 일명 ‘도시의 음지’만큼 도시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이 어디 또 있을까. 빌딩의 완강하고 날카로운 직선과 맥고모자를 쓴 남자가 무릎을 말고 앉아 있는 모습의 대비는 드라마틱하고 의미심장합니다. 거대한 빌딩은 맥고모자를 한없이 소외시킵니다. 소외된 인간이 느끼는 고독은 시멘트나 콘크리트 벽처럼 차갑습니다.

그러나 이 사진을 ‘결정적 순간’으로 포착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맥고모자와 이야기라도 나눌 듯이 다가앉아 있는 한 마리의 길고양이입니다. 거대한 도시 속의 이 소외와 고독을 일시에 희석시키는 고양이 한 마리. 그로 인해서 사진은 딱딱하고 삭막한 도시의 음지를 마치 전원 풍경처럼 아름답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이 한순간의 집중되는 찰나에 숨을 죽이고 브레송은 말합니다.

“나는 거기에 있었고, 또 그 순간에 삶이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방법이 있었다.”

글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