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자화상 - 서정주

라라와복래 2015. 7. 23. 22:17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숯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빛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출전 : <미당 시전집>(민음사)

시를 배달하며

천부의 시인, 서정주가 스물세 살 중추에 쓴 자화상이다.

병든 수캐로서의 피와 본능과 운명을 격렬한 호흡으로 노래한 이 시는 언제 읽어도 목이 얼얼해지곤 한다.

“애비는 종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등 잘 알려진 시구 속에서 사금처럼 반짝이는 그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2000년 12월 눈 많이 내리는 날, 그가 86세로 타계했을 때 이 시 ‘자화상’ 속에서 그의 처절한 유언을 발견한 한 평론가의 시선은 참 탁월하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올해 그의 탄신 100주년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거쳐 온 시인의 상처와 죄와 비극적인 운명으로서의 ‘자화상’을 본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서정주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시집 <화사집>, <신라초>, <동천>, <『국화 옆에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등, 산문집 <한국의 현대시>, <시문학 원론> 등이 있음. 2000년 작고.

낭송 강왕수 배우. 연극 <아부의 왕>,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등에 출연.

음악 자닌토 / 애니메이션 박지영 / 프로듀서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