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작가 정여울의 서재 - 알에서 깨어나는 공간

라라와복래 2015. 8. 1. 23:24

작가 정여울의 서재

알에서 깨어나는 공간

정여울

직업: 작가, 문학평론가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상: 제3회 전숙희 문학상

경력: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 2015년 여성가족부 선정 '청년여성 멘토링 위원'

저서: <헤세로 가는 길>,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등 다수

책과 나의 이야기

서재는 알에서 깨어나는 공간

저에게 서재는 알에서 깨어나는 공간인 것 같아요. '알'이라는 것이 새로 탄생하기 위해 벗어나야 할 한계이기도 하지만 사실 참 따뜻하고 편안하거든요. 저는 사실 제가 만든 달콤한 편견의 알껍질 속에서 계속 잠들어 있고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알껍질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만, 편견과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난 이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또는 '난 참 괜찮은 사람인데' 하는 판단 자체도 아주 견고한 알껍질 같아서, 그 자화자찬의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항상 이성의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겠지요. 책이 없었다면 저는 제가 만든 알껍질 속에서 계속 잠들어 있었을 거예요. '여기가 가장 따뜻한데, 바깥으로 나가서 뭘 하나' 하면서요. 그런 면에서 저에게 서재는 이토록 편안한 알껍질에서 깨어나도록 만드는, 아주 아픈 채찍질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서재는 결국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행복한 자극이기도 합니다.

책과 친밀해지는 과정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책들의 특징은 책이 엄청 더러워져 있다는 거예요(웃음). 책에 포스트잇도 많이 붙이고 낙서도 많이 하고. 계속 가지고 다니다 보니까 책이 너덜너덜해지거든요. 어떤 분들은 책을 엄청나게 신성시하시는데, 저도 책을 마음속으로는 신성하게 여기지만, 저한테는 좀 만만한 친구 같은 느낌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책을 좋아하는 방식은 이 친구를 계속 데리고 다니는 거죠. 계속 끌고 다니면서 읽었던 데를 또 읽고 거기에 제 생각을 기입해 놓고 그러면서 책과 친밀해지는 그 과정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독자들이 책을 너무 부담스러운 존재로 생각하지 마시고 좀 더 편안하고 만만하게 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인문학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거나, 또 고전문학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셔서 읽어보지도 않고 겁을 내시는 분들이 많지요.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면 바로 덮어버리잖아요. 그 안에 정말 좋은 내용들이 있는데 또 읽다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내용들도 많은데, 이것 때문에 거기까지 가보기도 전에 많이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차라리 이해 안 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건너뛰시고요. 그러다가 1년 정도 지나서 그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환하게 다시 보여요. 1년이 지나서 읽어보면 예전보다 훨씬 이해가 더 잘 되고 또다시 1년이 지난 후에 읽어보면 또 더 깊은 관점에서 나만의 해석을 창조할 수가 있거든요.

고전 읽기를 통해 찾은 내 안의 멘토

고전이 정말로 저에게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학창 시절이 끝나고 나서였습니다. 저는 대학원도 남들보다 오래 다녔으니까 학창 시절이 참으로 길었는데도, 그 시간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엄청난 공황 상태에 빠졌어요. 아무도 나에게 숙제를 내주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제재를 해주지 않으니까, 정말 공허하고 외로워지더군요. 너무 오랫동안 학생으로 살다보니까, 학생이 아닌 저 자신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끈 떨어진 연'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때 고전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고마운 동아줄 같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학생이 아닌데 누가 나를 이끌어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제가 좋아했던 고전을 다시 찾아 읽게 되고. '그때는 이해가 잘 안 됐었는데 지금은 나에게 그게 필요할 것 같아'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 고전 작품들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더라고요.

그중에서도 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신화에 대한 책들이었어요. 신화나 종교학에 대한 책들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아, 이제 아무도 나를 이끌어주지 않으니까 내가 나의 멘토가 되어야겠구나. 내가 나 자신을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그러니까 내 내면의 현자를 내가 찾아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비로소 고전이 저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굉장히 외로울 때, 정말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 같을 때, 고전을 읽어보세요. 고전은 위대한 고인과의 대화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멘토를 찾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고전은 사실 나이가 들수록 좋아지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뭔가 어렵고 무겁고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가 점점 더 나이가 들수록 우리 안에서 수다스러워지는 것이 고전의 힘인 것 같아요.

헤세로 가는 길

처음에는 정말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엄청난 실수들을 많이 하면서 유럽 여행을 다녔어요. 그런데 10여 년 동안 매년 열심히 마치 직업이라도 되는 듯이 여행을 다니다보니까, '남들에게 좋은 여행이 꼭 나에게도 좋은 여행이 아니구나, 나에게 맞는 여행은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점 더 제 마음에 맞는 여행의 콘셉트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지요. 그러면서 나에게 맞는 여행은 작가가 태어난 곳, 또는 작가가 작품을 쓴 곳이라든지, 작품의 배경 장소가 되는 곳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헤세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괴테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버지니아 울프의 글쓰기에 영감을 준 장소 등등. 이런 식으로 뭔가 테마가 있는 여행을 꿈꾸게 된 것이지요. 창조적인 사람들의 발자취를,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그런 여행이 저에게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빈에 가면 프로이트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거든요. 여행 책자에 나오는 정보를 게임 미션을 클리어하듯이 하나하나 깨뜨리는 모범적인 여행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삶의 발자취를 그저 조용히 따라갈 수 있는 그런 여행이 저에게 맞는 여행이었어요. 그중에서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장 열심히 찾아다녔던 '작가의 장소'가 바로 헤르만 헤세가 살았던 곳들이었어요. 헤세는 대도시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방문하려면 교통도 불편하고 묵을 곳도 마땅치 않아 여행 자체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하지만 여행을 다녀와서는 정말 마음속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행'이 되어 수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었지요.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을 내고 나서는 많은 분들이 저를 '여행 작가'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여행 책을 냈다고 해서 곧바로 여행 작가가 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저에게는 여행도 문학의 일부였어요. 제 관심은 항상 문학이었고, 문학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은 아직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여행 책까지도 언젠가는 저만의 문학 작품이 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어요. 저에게는 문학과 여행이 결국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지요. 타인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 저에게는 여행이자 문학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헤세로 가는 길>은 문학에 대한 열망과 여행에 대한 열망이 합쳐진 행복한 결과물이었던 것 같아요. <수레바퀴 아래서>라든지 <데미안>이라든지 하는 작품들은 제가 정말 힘들었을 때 절실하게 무언가를 찾아 헤매며 읽었던 책들이에요. 그 책들을 완전히 집중해서 읽는 그 몇 시간이 어떤 값비싼 해외여행보다 훨씬 좋을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헤세로 가는 길>은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여행을 떠나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래서 책을 읽는 것 자체로 앉아서도 멀리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책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버리고, 다듬고, 고치고, 또 버리며 좋아지는 글쓰기

지금은 우리 독자들도 글을 잘 쓰는 방법들을 정말 많이 알고 계시는데, 사실 이제는 '무엇을 쓰지 말아야 될지'를 생각해야 될 때인 것 같아요. 엄청난 달변보다는 무거운 침묵이 때로 더 큰 힘을 발휘하듯이, 글쓰기도 내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그 수많은 말들 중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 '없애는 것이 더 나은 말들'을 버리는 과정이에요. 말은 어떤 경우에 '잘 하는 것'보다도 '잘 들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때가 많아요. 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임기응변과 감언이설을 섞어서 말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잘 들어주는 것이 그 사람과 더 좋은 관계를 맺는 길일 때가 있듯이. 글쓰기도 마찬가지예요. 자기를 빛내기 위해 자꾸만 더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과한 액세서리처럼 주렁주렁 넝쿨져서 아주 보기 싫은 글쓰기가 되어버리고 말지요.

글쓰기는 표현의 기술이기도 하지만 절제의 기술이기도 해요. 내가 무엇을 쓰지 말아야 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글쓰기의 윤리를 고민하는 게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덕목 같아요. 절제를 통해서 저는 좋은 표현을 더 많이 얻게 됐거든요. 예를 들어 신문 글쓰기 같은 경우는 원고 분량이 8매, 6매 정도일 때가 많아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본격적으로 쓰려고 하면, 원고 매수가 거의 끝나 있는 거지요. 그래서 '아, 이거 어떻게 할까' 하다가 3배 정도 글을 써 놓고 그 초고를 3분의 1로 줄이는 거예요. 그러면 글이 훨씬 좋아지더라고요. 원래 제가 쓰려고 청탁받은 게 10매라면 한 30매쯤 써 놓는 거죠. 그리고 그 초고를 3분의 1로 줄이면 글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글은 고치면서 좋아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막 일필휘지로 한 번에 쫙 잘 쓰려고 하기 때문에 글쓰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계속 고치면서 겸손하게 버리면서 겸허하게 침묵하면서 좋아지는 것이 글쓰기라는 걸 잊지 않는다면 훨씬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자는 나의 최고의 스승이자 친구

독자들은 저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죠. 독자들이 없다면 제 글쓰기는 얼마나 외로운 투쟁이었을까요. 늘 독자들을 생각하면서 글을 써요. 때로는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나의 독자들에게 표현하는 감사의 마음일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 감사의 마음에 짓눌려서는 안 돼요. 그러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지요. 때로는 독자를 아랑곳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해요. 지금도 책을 쓸 때마다 엄청나게 두려운데 그 두려움은 '사람들이 내 책을 얼마만큼 좋아해줄까, 이해해줄까, 공감해줄까' 이런 질문을 너무 많이 하면서 글을 쓸 때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그 시선의 강박 때문에 제 얘기를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예술가가 되려면>이라는 책을 되게 좋아하는데요, 원래 뛰어난 심리학자였던 저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화가가 되는 과정을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어요.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누구나 자신의 숨은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우리는 남이 보지 않아도 항상 남이 보는 것처럼, 우리가 상상하면서 사는 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이 이미 내 안에 꿈틀대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 누가 악성 댓글을 달면 어떡하지?', '누가 내 글을 어렵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시선이 항상 내면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 시선과 싸우면서 글을 쓰거든요. 그래서 어떤 독자 분들이 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감동해주시면 정말 좋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글을 써요. 그런데 그것이 저를 막 괴롭히고 힘들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긴장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창조적으로 좀 더 잘해야지. 뭔가 더 재미있는 얘기를 해야지.' 그리고 '재미는 없더라도 정말 필요한 이야기를 해야지.' 이런 식으로 저 자신을 계속 다잡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그래서 독자는 저에게 최고의 스승이고, 또 제가 두려워하는 사람이기도 하면서, 친밀하게 말을 걸고 싶은 친구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작가 정여울의 꿈

제가 강연을 하면서 많이 느끼는 것인데요. 강연을 보통 짧으면 1~2회, 길면 7~8회 정도 할 때, 그것들이 항상 독자와의 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저 혼자 막 열변을 토하거나 그냥 의례적인 만남에서 그칠 때가 많아요. 그런데 그런 독자와의 만남을 좀 더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겠어요. 뭐, 숲 속의 도서관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작은 북카페일 수도 있고. 그래서 제가 계속 꿈을 위한 저축을 하고 있거든요(웃음). 그런 작은 소통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독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독자들과 문학과 인생에 대한 저마다의 꿈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작가로서 단순히 사람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책을 통해서 배운 깨달음으로 내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직접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교감의 장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혼자 골방에 갇혀 책을 쓰고, 그 책을 제가 모르는 공간에서 누군가 혼자 읽는 외로운 독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변화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또 다음 책은 어떻게 썼으면 좋겠는지를 독자들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정말로 수평적 연대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게 저의 꿈이에요.

(지식인의 서재 '정여울 편'은 정여울 님의 개인 서재에서 촬영했습니다.)

내 인생의 책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저

양희영 역

지식의풍경

2000.03.04.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책은 제가 대학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요.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해준 책인 것 같아요. '어,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 하는 열망의 불꽃을 피워 올리게 한 책인데, 이 책을 쓰신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역사학자예요. 이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어느 사기꾼의 얘기거든요. 사기꾼이 어떤 사람의 신분을 훔쳐서 그 사람의 부인까지 속인 다음 계속 같이 살면서 온 마을 사람들을 다 속이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 사기꾼이 정말 나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사기꾼 때문에 불행하던 한 여자가 진심으로 행복해졌는데. 그 사람이 돌아왔을 때 아내는 정말로 그 사람인 줄 알았고 딸도 낳아요. 자기 남편인 줄 알고.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런 가정을 하는 거예요. 조금 모습이 바뀌었다고 해도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에는 부인이 알았을 거라는.

그런데 사기꾼 남편이 예전의 남편보다 훨씬 더 좋았다는 거죠. 정말 차갑고 이기적이고 못된 남편이었는데, 훨씬 더 사랑스럽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돌변해버린 거예요. 오히려 원본보다 복제품이 더 나은 경우, 그러니까 본인보다 사기꾼이 훨씬 매력적인 인간이 되어버리는 역설을 보여주는 책이지요.

이 책을 읽으면서 '아, 나도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역사도 있고 문학도 있고 추리도 있는 하이브리드적인 책을 쓰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멋진 책이지요. 이 책 자체는 역사책이지만, 제가 이 책에서 보았던 것은 어떤 문학적 갈망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건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거든요. 그러니까 역사책이나 어떤 재판 기록이나 공식적인 문서에는 남아 있지 않은 두 사람의 이야기, 그걸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책의 범주는 역사이지만, 이 책을 추동하는 힘은 문학적인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더 역동적으로 생각하게 만든 책인 것 같아요.

마음사전

김소연 저

마음산책

2008.01.20

김소연 시인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에요. 말씀도 정말 재미있게 잘하시고, 시는 더욱 아름답지요. <마음사전>은 김소연 시인의 산문인데, 차례를 보면 우리가 다 아는 단어들이에요. 그런데 그 다 아는 단어를, 예를 들면 '중요하다 vs 소중하다'라고 써 놓고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의 차이', '행복 vs 기쁨'이라 해 놓고 '행복과 기쁨의 차이' 하는 식으로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탐구하는 책이거든요. 말 그대로 우리 마음이 느끼는 그 모든 감정에 대한 사전인 거지요.

그런데 그 사전이 재미없는 논리적 정의를 내리는 사전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더 환하게 비춰주는, 현미경처럼 미세하게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 책이라서, 이 책을 읽으면 우리말을 더 사랑하게 되고, 또 우리의 감정이 얼마나 무디고 부정확한 언어들로 표현되는지를 알 수 있어요.

감정을 이렇게 아름답고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는데 우리는 왜 그동안 '안습' 같은 생략적인 단어만 써서 언어를 더 단순화시켜 왔나 하는 거지요. 이모티콘이나 약어가 순간순간 기발하기는 하지만 우리말이 지닌 아름다운 가능성을 심하게 축소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말을 더 제대로, 더 정확히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내 감정을 더욱 찬란한 무지개 빛깔로 표현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 무척 감동적인 책입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맥스웰 쿠체 저

왕은철 역

들녘

2003.09.04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책은 아주 흥미로운 소설인데요. 일단 이 책은 번역이 정말 좋아요. 번역이 워낙 좋아서 '존 쿳시'라는 저자의 이름을 지우고 읽는다면 우리나라 사람이 쓴 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려한 단어 선택이 압권입니다. 외국 문학 작품에서는 번역이 제2의 창조라는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지요. 일단 번역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 책의 주제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것이거든요. 사랑에 빠진 여자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온 이방인인 거예요. 또 그 여자는 끝까지 자기의 본심을, 정체를 밝히지 않아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도 없고. 그런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전혀 이해할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어요.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 비극적인 통찰, 이런 것들이 영롱하게 담겨 있는 책이었어요.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아리스토파네스 저

천병희 역

단국대학교출판부

2000.08.01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저에게 기념비적인 작품이에요. 사실 저는 희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유머를 좋아하지 않아요. 책은 심각하고 진지한 작품이 더 좋은 것 같아요. 텔레비전을 볼 때는, '개그콘서트'도 보고 유머러스한 작품을 일부러 찾아보기도 하는데, 책을 볼 때는 너무 웃긴 건 저도 모르게 거부를 하게 되었거든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글쓰기란 자고로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을 보면서 '아, 웃긴 책도, 웃긴 이야기도 이렇게 감동적일 수 있구나' 하는 걸 처음 느낀 것 같아요. 특히 여기서 <뤼시스트라테>라는 희극이 있는데, 남성들이 맨날 전쟁만 하고 전쟁터에 나가서 남편이 돌아오질 않으니까 여성들이 파업을 결의한 거예요. 그게 무슨 파업이냐면 성관계 파업이에요. '당신들이 계속 그렇게 전쟁광으로 산다면, 우리들은 모두 일제히 남편과 절대로 자지 않겠다.' 이렇게 결심을 한 거예요.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파업 이후에 일어나는 이야기가 정말 배꼽을 잡을 정도로 웃기면서도 굉장히 슬프거든요. 희비가 교차하는 것이지요. 전쟁 때문에 사회가 점점 피폐해지고 황폐해지는 비극적인 상황을 굉장히 희극적으로 잘 녹여낸 작품이에요. 그러면서도 거기에 사랑과 우정과 정치 같은 다양한 테마들이 다 담겨 있는 굉장히 감동적인 작품이지요.

기억 서사

오카 마리 저

김병구 역

소명(박성모)

2004.12.30

<기억 서사>라는 책은 사실 쉬운 책은 아니에요. 쉬운 책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에요. 제가 가진 이 책을 보면 엄청 지저분해요(웃음). 이 책을 정말 사랑했다는 뜻이지요. '아, 이야기를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책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굉장히 고민하면서 읽었던 책이에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아무리 깊이 사귀어도, 어떤 사람과 아주 오랫동안 연애를 한다고 해도, 헤어지고 나서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두 사람의 입장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똑같은 일을 다르게 설명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서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누구의 기억인지 누구의 어떤 욕망에 따라서 쓴 이야기인지에 따라, 역사가 승리자들의 기록인 것처럼 소설이나 신문 기사나 책도 다 그렇거든요.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어떤 관점의 기록이거든요.

그런데 그 관점은 숨겨지고 결국에는 스토리텔링만 남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작가의 숨은 관점을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 작가적 관점을 제대로 읽어내야 서사도 비로소 이해가 되는 거거든요.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시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철학적인 책이에요. 이 책을 다섯 번은 읽은 것 같아요. 정말 좋아서요(웃음).

추천 책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인물과 역사>지식인의 서재 2 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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