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고대 트라키아의 황금유물

라라와복래 2010. 8. 10. 00:05
 

 

 

고대 트라키아의 황금유물

 

아래의 지도와 글과 사진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6년 12월호 특집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불가리아는 북쪽은 루마니아, 서쪽은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공화국, 남쪽은 그리스와 터키, 동쪽은 흑해에 접해 있습니다. 이 지역은 고대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에는 트라키아라 불렸는데, 트라키아 하면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영화가 유명하고, 또 최근 케이블 TV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모았던 ‘미드’ 스파르타쿠스로도 유명하죠.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부터 71년까지 2년 동안 노예들을 이끌고 로마 공화정에 맞서다 끝내는 6,000여 명의 동료 노예들과 함께 책형(磔刑)에 처해지고 마는 비극적인 인물이죠. 당시 포로들은 노예반란을 진압한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가 누냐"고 묻자, 서로 자기가 스파르타쿠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억압받는 계층의 영웅이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영화 스파르타쿠스를 보고 책형이 예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 로마 시대의 대표적 형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피아 가도를 따라 6,000여 명의 노예들이 줄 지어 책형을 받는 장면이 예수의 십자가 책형 장면과 겹쳐 떠오릅니다... 아이구, 객설이 길어졌네요... 참, 원글의 제목은 '불가리아 황금열풍에 휩싸이다'인데 라라와복래가 '고대 트라키아의 황금유물'로 바꾸었습니다.^^

 

현재 불가리아에서는 고대 트라키아의 황금유물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유물이 도굴되거나 유적지가 개발되기 전에 서둘러 발굴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글=A. R. 윌리엄스, 사진=케네스 개릿)

 

 

고고학자 게오르기 끼토프는 일을 빨리 한다. 굴착기와 불도저를 이용해 고대 트라키아 통치자의 돌무덤을 발굴하기 때문에 수작업으로 조심스레 파헤치는 기존 방식으로는 수개월이 걸리는 일을 일주일 만에 해치워 버린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해명한다. 도굴꾼이 도처에서 호시탐탐 유적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작자들은 나보다 돈도 많고 장비도 좋습니다.” 끼토프는 말한다. “난 그들이 훼손하려는 유물을 구하려고 애쓰고 있답니다. 지금까진 아주 성공적이에요. 수많은 도굴을 막았으니까요.”

 

그러나 끼토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영웅으로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악당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올해 63세인 그는 고고학계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시절 일찌감치 기계 장비를 사용한 발굴작업을 익혔다. 소련 동료들의 방법을 배워 재빨리 ‘개종’을 한 것이다. “손으로만 작업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서두르고 꼼꼼하지 않아 여러 동료 학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일부에선 그를 보물 사냥꾼이라고 대놓고 비난한다. 연예인 고고학자라고 부르는 동료도 있다. 쇼맨십을 부리면서 오로지 흥미 위주의 기삿거리만 언론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불가리아 대형 박물관에 소장된 금은 세공 출토품 중 거의 절반을 끼토프가 발굴했다고 강조한다. 끼토프가 아니었다면 유물은 고스란히 도굴꾼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것이다.

 

도굴꾼들에게 불가리아는 엘도라도나 마찬가지다. 귀중한 보물이 엄청나게 묻혀 있으며 황금이 들어 있는 무덤 중엔 그 연대가 BC 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 불가리아는 아시아와 서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오랜 세월 침략자와 정복자, 군인, 여행자, 상인, 정착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트라키아인과 마케도니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페르시아인, 슬라브인, 불가리아인, 비잔틴인, 터키인 모두 이곳에 자신들의 족적을 남겨 놓았다. 누구든지 파내기만 하면 돈벌이가 되는 유물도 포함해서.

 

BC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조성된 트라키아 왕릉을 도굴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잡초가 무성한 벌집 모양의 커다란 무덤 둔덕이 길가와 논밭에 서너 층 높이로 솟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 끼토프가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는 곳은 94km 길이로 뻗어 있는 카잔륵 계곡. 이곳에도 약 1000기의 무덤이 스레드나 산맥과 발칸 산맥의 봉우리 아래에 펼쳐진 장미 농원에 자리잡고 있다. 이 밖에도 약 2만 5000기에 달하는 무덤이 불가리아 도처에 흩어져 있다. 많은 무덤에 최근에 도굴한 흔적이 남아 있다. 풀과 덤불로 뒤얽힌 둔덕 표면이 들쭉날쭉 패어 적갈색 흙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도굴꾼은 옛날에 이미 털린 적이 있는 무덤을 파헤치기도 한다. 이럴 때는 금이나 은 대신 채색 항아리나 청동 조각상, 벽화를 훔치기도 하는데 이런 유물 역시 골동품 시장에서 높은 값을 받는다.

 

불가리아에서 고대 보물은 국유 재산이며 과거에는 이런 규정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1949년 파나규리쉬테 근처에서 타일용 진흙을 파던 세 형제가 2000여 년 된 화려한 순금 그릇 9개를 발견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소련에 종속된 지 몇 년밖에 안 된 터라 새로 들어선 전체주의 정권은 법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래서 형제들은 발견한 물건을 순순히 관계 당국에 넘겼다. 그 무렵에는 뜻밖의 횡재를 팔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과일 통조림부터 칼라슈니코프 소총까지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공장들은 완전 고용을 보장했고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관리했다. 발견된 보물은 모두 안전한 박물관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림없는 소리다. 1989년 소련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불가리아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강제로 문을 닫은 공장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돼 있다. 실업자는 여전히 수십만 명에 이르며 직장이 있어도 한 달 평균 임금은 200달러밖에 안 된다. 중산층이 무일푼으로 전락하자 많은 사람이 도굴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사람들은 이를 지하 고고학이라고 부른다. “유물 거래가 마약 밀매보다 훨씬 더 짭짤합니다.” 불가리아의 인디아나 존스라고 불리는 고고학자 니콜라이 오브차로프는 말한다. 과장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으며 관계 당국까지 도굴에 손을 대고 있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시장이란 사람이 친구나 가족과 함께 시골로 소풍을 나와 괜찮은 유물이 있는지 땅바닥을 파헤쳐 본다. 땅을 파다 현장에서 체포된 도굴꾼 중에는 순찰차를 구덩이 바로 옆에 세워 놓은 경찰관도 있다. 수백만 달러나 나가는 고대 동전과 보석이 박물관에서 사라진 적도 있다. 이는 분명 내부인의 소행이다.

 

소피아 시내에 있는 노점에는 비교적 작은 유물이 진열되기도 한다. “의회에서 50m밖에 안 떨어진 곳이었죠.” 오브차로프가 화를 내며 말한다. “트라키아 마차에서 떨어져 나온 유물과 동전, 걸쇠 같은 걸 내다 팔더라고요. 모조품이 아니라 전부 진품이었어요.”

 

예술품 수준의 귀금속과 석조품, 아름다운 도자기 등 고가품은 일부 돈 많은 불가리아 수집가에게 은밀히 흘러 들어가기도 한다. 부자들은 대금을 현금으로 지불하며 출처는 불문에 부친다. 수집가가 도굴꾼을 고용해 유물을 찾거나 도굴꾼이 범죄 조직과 연계돼 있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하지만 이런 불법 거래에는 무기를 소지한 범죄 조직이 연루돼 있어 내막을 아는 사람도 없고 정보를 캐내기도 힘들다.

 

트라키아 영토(오른쪽 지도)에 있는 많은 유적이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빛나는 황금  BC 5세기 트라키아 왕의 순금 마스크. 이처럼 훌륭한 유물의 유혹에 흠뻑 빠진 불가리아에서는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한편 불법적인 도굴도 성행하고 있다.

   

엘도라도에서 일하는 고고학자  트라키아 왕인 세프트 3세의 BC 3세기 무덤은 고고학자 게오르기 끼토프가 카잔륵 계곡에서 발굴한 많은 유적 가운데 하나다.

 

 

 

땅속의 보물  실물 크기의 청동상에서 절단된 것으로 보이는 이 멋진 두상은 BC 4세기 후반 트라키아 돌무덤의 입구 앞에서 발견되었다. 고고학자 게오르기 끼토프는 2004년 카잔륵 부근의 돌무덤에서 발견한 이 정교한 청동상을 보고 무덤의 주인공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덤 안에는 진귀한 왕실 공예품이 놓여 있었으며 참나무 이파리와 도토리 모양으로 정교하게 장식한 왕관과 술잔, 금실로 만든 카펫 등 유물 대부분은 금제품이었다. 유물에 새겨져 있는 문자를 보고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트라키아 왕인 세프트 3세였다.

 

 

 

전쟁이 남긴 문화  트라키아 여신 형상으로 장식한 청동 정강이 보호대. 이 유물은 청동 투구, 가죽 가슴받이, 칼과 함께 세프트 3세의 무덤에 묻혀 있었다. 트라키아인은 금속 세공 기술이 뛰어나 금과 은으로 정강이 보호대를 꾸미기도 했다. 그리스의 위대한 작가 호메로스는 트라키아의 훌륭한 군사장비에 대해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아름다운 보호대  즐라티니차 근처의 왕릉에서는 여신 형상의 정강이 보호대가 출토되었다.

 

 

둔덕 발굴작업  끼토프의 발굴팀은 카잔륵 부근에 있는 제단 둔덕의 흙을 며칠 동안 파내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트라키아 영토에 있는 많은 유적이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트라키아의 발자취를 찾아서  발굴팀원이 금속탐지기로 유물을 찾는 동안 끼토프는 불도저로 둔덕을 파내 만든 통로를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발굴팀은 둔덕이 제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트라키아인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용감한 전사이자 노련한 기병이었던 트라키아인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여 그리스와 맞서 싸웠다. 몇 세기 후 찾아온 전성기에는 돌로 만든 거대한 돔형 무덤에 왕을 매장했다. 최근에 알렉산드로보에서 발굴된 왕릉도 그중 하나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트라키아를 정복한 후 트라키아 궁수와 기병은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로 편입되었다. BC 73년 어느 트라키아인이 로마에 대항해 노예 반란을 일으켜 역사에 길이 남기도 했다. 그는 바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다.

 

 

용감한 전사  금과 은으로 만든 마구 장식에 트라키아 기병의 모습이 담겨 있다. 트라키아의 전형적인 무기인 창과 활로 무장한 전사가 힘차게 말을 몰고 있다.

 

 

그림이 담긴 주전자  바닷가 공동묘지 발굴 현장에서는 트라키아 전사를 그린 그리스식 주전자가 출토됐다.

 

 

귀중한 보물  손잡이를 켄타우로스 형상으로 꾸미고 표면에는 서사시의 장면을 묘사한 이 술잔은 BC 300년경에 만들어졌다. 이런 유물을 보면 트라키아인이 상당한 부와 아름다운 예술을 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술잔은 1949년에 우연히 발굴됐다. 파나규리쉬테 근처에서 타일용 진흙을 파던 세 형제가 화려한 순금 그릇 8개와 함께 이 술잔을 발견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들 금제 유물에서 트라키아와 그리스, 페르시아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유물은 종교적인 의식에 사용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누가 유물을 만들었으며 유물의 주인은 누구인지, 그리고 유물이 왜 땅속에 묻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왕의 보물  신화의 등장인물로 장식한 수사슴 머리 모양의 잔은 파나규리쉬테 근처에서 출토된 왕의 보물 가운데 하나다.

 

 

무덤 속의 여인들  생명의 쇠락과 재생을 상징하는 늙은 여인상과 젊은 여인상이 스베쉬타리에서 발견된 트라키아 왕릉의 내벽을 장식하고 있다.

 

 

불가리아의 인디아나 존스  불가리아 남부 로도피 산맥에서 고고학자 니콜라이 오브차로프가 선사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종교 중심지였던 펠페리콘을 살펴보고 있다.

 

 

신성한 땅  미쉬코바니바 지역에 있는 고대 성지. 불가리아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채석한 흰 대리석이 BC 2-3세기의 트라키아 무덤 유적을 에워싸고 있다. 트라키아인은 BC 2000-1000년경 이곳에 성소를 마련해 훌륭한 왕을 숭배했을 것이다. 미쉬코바니바는 이후 수세기 동안 성소로 사용됐다. 하지만 슬라브족의 침략으로 트라키아 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한 AD 6세기부터 이 지역에서는 종교적 제의가 열리지 않았다.

 

 

통과의례  흑해 연안 발칸 산맥의 동쪽 기슭. 수난주일 전날에 전통의상을 입은 청소년들이 풍요를 기원하는 전통의식을 벌이고 있다. 혼기가 찬 소녀들은 이날 이웃집으로 찾아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행운과 건강, 풍년을 기원한다. 소녀들이 마을을 다 돌고 강가까지 오면 소년들은 소녀들을 끌고 마을로 돌아와 의식을 끝낸다. 오늘날 이 축제는 예수가 되살린 라자로와 연관돼 있지만 그 뿌리는 트라키아의 이교적 전통이다.

 

 

바닷가 유적  오늘날 소조폴 항구에 해당하는 흑해 연안에서 고대 문화가 어우러졌던 적이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휴양지 개발업자가 들어오기 전에 역사적인 유물을 구하기 위해 발굴을 서두르고 있다.

 

 

알고 계셨나요?

불가리아는 고고학의 보고다. 그래서 수천 년 전부터 여러 문명이 남긴 유물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유적은 지난 8월 흑해 부근의 시네모레츠에서 발굴된 무덤이다. 트라키아 여사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에서 금은 세공품 160여 점이 도자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그중에는 전차 모양의 귀걸이 한 쌍과 금 목걸이, 머리 장식, 대지의 여신이 묘사된 진흙 타일 등도 있다. 유물의 제작 연대는 BC 3세기로 판명되었다. 유물은 발굴되자마자 불가리아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됐고 수천 명이 귀중한 보물을 구경했다. - 마리사 라슨

 

관련 사이트

 <아테나 리뷰>에 실린 에브게니 파우노프의 '고대 트라키아 무덤 유물'

http://www.athenapub.com/thrace1.htm 

트라키아 역사와 불가리아의 트라키아 유물 발굴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펠페리콘

http://www.perperikon.bg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비옥하고 안전한 지역에 정착해 살았다. 펠페리콘 주변에 몰려 있는 많은 유적에서는 고고학적 유물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이트에 접속하면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 트라키아인, 그리고 트라키아인이 남긴 보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