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

라라와복래 2011. 8. 8. 08:54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8년 8월호 기사의 일부입니다.]


 

페르세폴리스 변방에서 진상품을 올리려고 찾아온 외국의 고관대작들은

다리우스 대왕(BC 522~486년)이 세운 초강대국 페르세폴리스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페르시아 제국 유적지 이란 전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고대 페르시아 유적지는 수천 년에 걸친 세력 다툼과 창조적 문화의 산물이다. 이란 태생 고고학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늘면서 점차 많은 유적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좀 더 고화질의 지도를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www.nationalgeographic.co.kr/feature/map.asp?seq=52&artno=156  


이란 남부 페르세폴리스 유적,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점령하면서 불태워버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를 살펴보면 놀라운 점이 발견된다. 남아 있는 석벽에 폭력적인 장면을 묘사한 부조가 없다는 것이다.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만 싸우고 있는 광경은 아니다. 무기도 등장하지만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장면은 없다. 부조에 새긴 형상에선 자애로운 분위기가 넘쳐흐른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평화롭게 모여 선물을 들고 있거나 서로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고 있다. 야만이 판치던 시대에 페르세폴리스는 사해동포주의가 배어 있는 ‘글로벌’ 도시였던 것 같다. 오늘날 이란 사람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누구였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 환기시켜주는 감동적인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2500년의 역사를 지닌 이란은 1979년 보수적인 성직자들이 서방의 지원을 받는 국왕을 몰아낸 혁명을 계기로 오늘날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이는 현대사에서 제정일치 국가를 수립한 세계 최초의 사례로, 야심찬 실험이었다. 과연 이처럼 풍성한 역사를 간직한 민족을 극단적인 회교 율법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효율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할까?


페르시아는 대제국을 건설한 정복 국가였지만 고대 역사에선 드물게 영화롭고 어진 문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오늘날 이란인들이 석벽 조각에 담긴 역사를 그들의 정체성과 얼마나 결부시키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란인에게 ‘페르시아’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두 차례 이란을 방문했던 지난해만 해도 이란은 국제사회가 기피하는 나라였다. 서방세계는 이란을 악마로 묘사하는 영화들을 찍어냈고, 이란 지도자들을 핵무기를 만들어 세계를 위협하려는 테러분자로 간주했다.


이란인이 누구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어찌 보면 얼마간 페르시아인이고, 또 어찌 보면 무슬림이며, 얼마간은 서구인이다. 페르시아인의 정체성은 어떤 면에선 이슬람과 전혀 관계가 없지만 이슬람 문화가 섞여 있기도 하다. 페르세폴리스에 가면 곳곳에 설치된 확성기가 기도 시간을 알리는데, 이럴 때면 관광객들은 페르시아 왕국의 땅인 동시에 이슬람 공화국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기사는 일부나마 페르시아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는 이란인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금욕과 기도, 그리고 때로는 숙명론을 요구하는 이슬람 문화 뒤에 포도주와 사랑, 시, 노래로 삶을 즐겼던 페르시아인의 기질이 지금도 남아 있을까?


 

 

페르세폴리스의 영화 촬영지에서 차도르를 입은 여배우가 페르시아 국왕이 위엄을 나타내는 2500년 전의 조각 앞을 지나고 있다.

 

 

아침 해가 이란의 고도 페르세폴리스 성벽에 관광객들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란의 일부 강경파 이슬람 성직자들은 이 고대 페르시아 유적지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란인들이 페르시아의 고대사와 유산에 심취해 있다.

 

 

변방에서 진상품을 올리려고 찾아온 고관대작들은 다리우스 대왕(BC 522-486)이 세운 초강대국 페르세폴리스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머리는 사람이고 날개가 달린 황소 라마수(반인반수)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거대한 라마수가 페르세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인 ‘만국의 문’을 지키고 있다.

 

 

100개의 기둥이 받쳐주었을 만큼 어마어마했을 그 옛날 페르세폴리스의 전당이 이제는 커다란 문들에 둘러싸인 채 돌 그루터기들만 남아 있다.

 

 

페르세폴리스에는 그리핀 같은 위압적인 형상들이 가득해 폐허가 된 지금도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핀: 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뒷다리와 몸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 고대 동방 여러 나라와 그리스의 장식미술에서 즐겨 다루었다. 신전이나 분묘의 장식 무늬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신성한 괴수임에는 틀림없으나 거기에 담긴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페르세폴리스의 예술은 훌륭한 정치적 선전물이었죠.” 고고학자 킴 코델라는 설명한다. 예술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귀족들이 손에 손을 잡고 트리필론 전당을 향해 계단을 오르고 있는 부조는 상류층의 돈독한 우의를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페르세폴리스의 웅장한 계단 위에 사자가 황소를 물어 쓰러뜨리는 벽화가 조각되어 있다. 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이런 형상은 여러 고대 문화권에 걸쳐 나타난다. 인더스 강에서 지중해까지 수많은 왕국을 지배했던 아케메네스 왕조 때 페르시아는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되었다.

 

 

다리우스 왕궁 ‘타차라’는 출입구만이 남아 있다. 건축 양식은 이집트의 코니스 양식과 함께 아케메네스 왕조의 세련된 취향을 보여주고 있다.

 

 

궁중관리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금으로 된 지팡이 장식 같은 예술적 모티프는 페르시아 제국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로프트 부근 코나르산달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5000년 전 융성했던 문명을 보여준다. 이곳을 지은 이들에 대해선 밝혀진 게 거의 없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과 동시대인이었다.

 

 

BC 500년에도 페르시아인들은 먼 과거에서 보편적인 형상을 찾았다. 지로프트 인근에서 발굴된 황소 형상을 새긴 녹니석 꽃병은 당시보다 2000년 전에 제작된 공예품과 유사하다.

 

 

초가잔빌 페르시아인들이 들어오기 오래전부터 엘람족(BC 2400~539년경)은 이란 남서부에 문명을 구축했다. 엘람족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BC 13세기에는 지구라트(피라미드형 사원)가 두르운타시(초가잔빌의 옛 이름)에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일부가 복구된 이 사원은 세계 최대의 지구라트 중 하나다. 페르시아에 정복된 후에도 엘람족 문화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르리크의 장인들은 BC 1200~900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발가락 6개의 이 멋진 여인상을 포함해 정교한 도자기 공예품들을 창조해 냈다. 이 공예품들은 현재 테헤란에 있는 이란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란 고고학자들은 1990년대에 발굴 작업을 통해 엘부르즈 산 계곡에서 마르리크 문명의 유적을 찾아냈다.

 

 

파사르가다에 고대 페르시아 제국 초대 국왕 키루스 대왕(기원전 559-529)의 묘 지붕을 복원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이 비계를 세워 놓았다. 세계 최초의 인권옹호자로 추앙받는 키루스 대왕은 피정복민의 종교를 인정하고 풍속을 존중했다. *키루스 대왕: 구약성경 에즈라기 1:1~4에 키루스 대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빌론 유수로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구약성경 <다니엘서>의 다니엘이 그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나크시에 로스탐(열왕의 묘) 페르세폴리스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열왕(列王)의 무덤은 암벽을 십자가 모양으로 파서 만들었다. 이곳에는 다리우스 대왕과 후대 국왕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 무덤 앞에 놓인 정육면체 구조물의 정체는 아직 수수께끼지만 아케메네스 왕조의 대관식 때 쓰인 걸로 추정된다.

 

 

뜨거운 여름 날 데즈풀 시 여학생들이 데즈 강물에 발을 식히고 있다. AD 3세기에 축조된 다리가 멀리 보인다. 이란에는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유물들이 도처에 있다.

 

 

피루자바드 AD 224년 이후 건립되어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렸지만 아르다시르 1세 왕궁의 돔형 내실로 들어가는 아치형 현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나중에 이슬람의 대표적 건축물에도 나타난다.

 

 

페르시아 문명에서 예술의 황금기였던 사산 왕조 말기 장인들은 AD 6-7세기경 놀라우리만큼 실물과 닮은 말 머리 모양의 이 도기를 빚어냈다.

 

 

아르다시르 1세(재위 226~241)의 군청색 안료를 입힌 반신상. 아랍에게 정복되기 전 마지막 페르시아 왕조인 사산 왕조를 세웠다.

 

 

키슈 섬에 있는 호사스러운 다리우스 그랜드 호텔에서 손님들이 커다란 장식품이 걸린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 그리핀과 날개 달린 여신의 모습이 담긴 이 장식품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력이 널리 뻗어나가던 시절처럼 페르시아와 그리스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조로아스터 교도인 한 소년이 초대 페르시아 제국 시절부터 열리던 가을 축제인 메흐레간을 맞아 촛불을 밝히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1400년 전 아랍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해 지금도 이란에는 3만 명 가까운 신도들이 있다.

 

 

15살의 쌍둥이 자매 네우샤(왼쪽)와 니마가 테헤란의 조로아스터교 클럽에서 성인식을 받고 있다. 지금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란인이 극소수지만 고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때는 국교가 되기도 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마르브 다슈트에서 눈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에 있는 교각 받침대는 페르시아 제국 군대의 막강함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유적

이란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중요한 유적지들이 수없이 많다. 침략과 권력 암투로 뒤엉킨 이 나라의 복잡한 역사를 밝혀줄 고고학적 보물들이다. 50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이란은 BC 6000년 자그로스 계곡에 도착한 최초의 정착민에서 AD 7세기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아랍족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교와 통치자들을 받아들였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 엘람제국, 아카메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대왕,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아랍 민족이 남긴 유산들이 서로 뒤엉켜 오늘날의 이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유적 중 몇몇을 여기 소개한다.


자그로스 계곡

지금은 이라크의 일부가 된 자그로스 계곡은 지중해와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 가까이에 있는 고원 지역으로 그 옛날에는 중요한 목초지였다. 약 8000년 전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가축들을 광활한 지역으로 이동시키다 보니 유목민이 되었다. 이것이 이동목축의 시초가 되었다. 최근의 발굴 작업을 통해 중요한 석제 유물들이 나왔다.


코나르산달

농업의 발달은 결국 청동기 시대의 도시문명으로 이어졌다. 이란의 지로프트 시 근처에서 2000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을 통해 청동기 시대에 꽃핀 것으로 추정되는 코나르산달 문명(BC 3000년경)에 관한 새롭고 놀라운 단서들이 드러나고 있다. 흙벽돌로 쌓은 계단식 대지와 성채 언덕이 발굴되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중 청동기 시대에 축조된 것들이다. 

 

수사

수지아나 평원에 위치한 수사는 청동기 시대 주요 도시였다. 한때 엘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수사는 4000년 전에 축조되었고 BC 640년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국왕의 정복으로 파괴되었으나 1세기 후 재건되어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자주 머물렀다. BC 4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가 무너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잠시 지배한 뒤부터 AD 13세기에 몰락할 때까지 줄곧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사에 있는 다리우스 대왕 궁의 날개 달린 스핑크스


두르운타시

BC 2400-539년 사이에 이란 서남부에 살았던 엘람족은 구 엘람족, 중간 엘람족, 신 엘람족으로 나뉜다. 세계 최초 문명 중 하나를 이룩했던 엘람족은 두르운타시에 놀라운 피라미드형 사원인 지구라트를 세웠다.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 지구라트는 지금 일부 복원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바구니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이를 초가잔빌(바구니 언덕)이라고 부른다.


키루스 원통

키루스 대왕이 통치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BC 530-330년)을 세웠다. 페르시아 제국 통치자들은 200년 동안 동쪽의 인더스 강에서 서쪽의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정복해 세계에서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 대제국은 정복한 여러 부족들의 전통적 생활습관을 대부분 용인했다. ‘4세계의 국왕’이라고 부르는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인권의 수호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다른 정복자들과 달리 피정복민의 관습을 인정하고 피를 흘리지 않고 많은 이민족을 속국으로 흡수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쐐기 모양의 키루스 원통은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 정복 후 이 민족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기록한 것으로 세계 최초의 인권헌장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원본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유엔 본부에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 최초의 인권헌장이 새겨져 있는 키루스 원통


파사르가다에

고대도시 페르세폴리스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파사르가다에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의 지붕을 복원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인근 공장들에서 나오는 산업 폐기물로 묘석들이 부식되고 있다.


에스파한(이스파한)

비단, 면직물, 도자기, 금속공예 등으로 유명한 도시 에스파한은 아케메네스 왕조 때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AD 3세기 아르타바누스 5세 때는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군대가 있는 곳’이라는 뜻인 에스파한은 한때 병영 도시였으며 모병지로 이용되었다. AD 640년경 아랍인들이 이 도시를 점령했고 그 후 AD 931년까지 우마야드 왕조와 아바시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에스파한은 1397년 몽골족에게 점령당한다. 그 후 사파비 왕조의 아바스 1세는 1598년 이 도시를 재건하고 큰 사원들을 세우면서 에스파한은 왕국의 수도로서 황금기를 맞는다. 오늘날 이 도시에는 중요한 이슬람 유적지인 마스지드에자미(에스파한 대사원)가 남아 있다.

 

 에스파한 대사원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