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관차의 거대함과 그 신통한 재주가 좋아! 다양한 부품이 수많은 부분을 구성하는데 그 모두가 제각기 중요하잖아.”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 1841-1904)가 말했다. 프라하 교외 비소카에 있는 그의 자택으로 찾아온 제자 요제프 미흘과 함께 집 근처를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한 얘기였다.
“기관차는 부품들 모두가 각기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가장 작은 나사 하나도 있어야 할 곳에 있어서 다른 뭔가를 꼭 붙들고 있어. 모든 부품에 목적과 역할이 있고 그래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지. 이런 기관차를 궤도에 올려 물과 석탄을 공급하고, 한 사람이 작은 레버를 움직이면 큰 지렛대가 움직이기 시작해. 저렇게 크고 육중한데도 토끼처럼 재빠르게 움직이잖아.” 대작곡가는 반쯤 농담 섞인 말투로 말을 맺었다. “기관차를 내가 발명할 수 있었다면, 내가 쓴 교향곡 전부를 포기해도 좋을 텐데.”
아홉 살 때 매혹된 기차에 평생의 사랑
1850년, 프라하 교외에 있는 블타바 강가의 한촌 넬라호제베스에서는 인부들이 당시로서는 낯선 공사에 열심이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 보는 ‘철도’를 놓는 일이었다. 인부 중에는 남쪽 멀리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도 많았다. 알프스에서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놓아본 경험이 있어 기술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공구를 정리한 뒤면 이들은 마을 푸줏간 겸 선술집에 모여 소리 높이 이탈리아 민요를 합창했다. 푸줏간 주인 드보르자크 부부의 맏아들인 안토닌의 머리에 가장 처음 강렬하게 각인된 음악적 경험의 하나였다.
아홉 살이었던 안토닌은 철도가 완공되고 나서 곧 군인들을 가득 실은 열차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프라하와 독일 드레스덴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의 지선이었다. 매일같이 지나가는 기차는 드보르자크 유년의 원초적 체험을 이뤘다. 기차는 그에게 있어서 정밀함과 동시에 ‘넓은 세계’의 상징이었다.
증기기관차는 1814년 영국의 스티븐슨이 발명했다. 16년 뒤인 1830년 최초의 지역 간 여객철도가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에서 개통됐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각각 1835년, 1842년 첫 철도 노선이 탄생했다. 1860년대에 이르러서는 러시아에서 서유럽까지 기차를 갈아타며 여행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후 알게 될 일이었지만, 드보르자크는 기차와 증기선의 등장에 따른 운송 혁명의 혜택을 받아 전 세계를 손쉽게 주유할 수 있었던 예술가들의 첫 세대였다.
16세 때 그는 불과 25km 떨어진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거의 평생을 계속할 프라하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 그와 기차의 사랑엔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매일 아침 시내 비노흐라디 구역에 있는 터널 위로 올라가 중앙역으로 드나드는 열차의 번호와 생김새 등 자잘한 사항들을 기록했다. 프라하 역에서는 기관사들이나 열차 점검원들과 친구가 되었다. 호기심을 갖고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는 작은 체구의 음악가에게 기관사와 기술자들은 기관차들의 특징, 최신 기술과 발전 경향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이후 드보르자크는 34세 때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금을 받는 작곡 심사에서 브람스와 한슬리크의 인정을 받아 합격하면서 전 유럽으로 활동의 폭을 넓혔다. 43세 때부터는 영국에서도 인기를 얻어 종종 연주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이어 49세 때 프라하 음악원 교수로 취임한 뒤에도 그의 사랑은 ‘음악’ 못지않게 ‘기차’에도 늘 향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기차역에 들러 시간표를 베끼고 기차 번호와 특징을 기록하며 기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을 하기 전엔 미리 기차 시간표를 입수해서 목적지까지 왕복하는 효과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데 즐거움을 느꼈다.
특히 프라하와 빈을 왕복하는 특급열차는 그의 기차 사랑에 있어서 으뜸을 차지했다. 이 노선에 대해서는 시간표와 기관차의 소소한 세부까지 꿰고 있었으며 철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보다도 그 사소한 사항의 변동을 빨리 파악했다. 하루는 드보르자크가 이른 아침 일정 때문에 ‘기차 관찰 산책’을 나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프라하 음악원 수제자인 요제프 수크에게 “나 대신 터널 위로 올라가서 터널을 빠져나오는 빈 행 특급열차의 기관차 번호를 적어주게”라고 당부했다. 수크는 알람을 맞춘 뒤 일찍 일어나 오페라글라스까지 들고 터널로 나갔지만 그가 적어 온 것은 기관차에 적힌 번호가 아니라 열차 후미 탄수차(炭水車, tender)의 번호였다. 드보르자크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중대 실수’를 범했지만 수크는 이후 드보르자크의 사위가 되었다.
신세계에서 길을 잃다
1892년, 스메타나의 뒤를 이어 체코 국민음악의 상징으로 군림하고 있던 드보르자크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미국 뉴욕 내셔널 음악원의 창립자인 재닛 서버 여사의 초청으로 이 음악원 원장직을 맡아 미국에 건너가게 된 것이다. 유럽인으로서 미국 ‘내셔널 음악’의 정립에 기여한다는 큰 책임 외에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이 있었다. ‘프라하의 기차’들과 이별해야 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침울했던 드보르자크는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역에 나가본 뒤 입이 벌어졌다. 광활한 미대륙의 서쪽 멀리 와 남북을 연결하는 수많은 기차편이 프라하를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라하와 달리 뉴욕에서는 승차권을 소지해야만 플랫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역도 그의 거처에서 멀었다. 내셔널 음악원 학생들을 시켜 이것저것 적어오도록 했으나 역시 신통치 않았다. 결국 ‘신대륙 기차’는 그의 마음에서 차츰 멀어졌다.
그의 허전함을 달래준 것은 ‘대륙 간 여객선’이었다. 뉴욕 항구에서는 수많은 여객선이 유럽 주요 항구들을 연결했다. 기차와 여객선은 ‘신기술과 시간표’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매일 아침 배달되는 뉴욕 포스트지에 상세한 시간표가 나와 있었다. 지도를 구해 이 시간표와 매일 대조해보고 백지에 당일의 항해 일정을 그렸다. 기차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항구에 나가서는 선장들 및 운항기술자들과 친구가 되었다. 고국에 보내는 편지에는 “이 편지는 아마도 ○○항구에 닿는 ○○국적의 여객선에 실려 ○○일쯤 도착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넣어 지인들을 감탄하게 했다. ◀드보르자크와 그의 가족과 친구. 1893년 뉴욕.
기차를 통해선 드보르자크를 기쁘게 하지 못한 미국이지만 뜻하지 않게 드보르자크에 대한 ‘기차 오마주’를 남기기는 했다. 그의 <유머레스크> 전 8곡 중에 가장 사랑받으며 ‘드보르자크의 유머레스크’라는 대명사로 통하는 <유머레스크> 7번에 미국인들이 우스운 가사를 붙여 널리 퍼뜨린 것이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기차가 역에 정차한 동안 화장실에서 물 내리기를 삼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유머레스크 7번의 선율에 맞춰 부르면 꼭 들어맞았다. 1930년대에 기차를 타는 모든 어린이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고 사람들은 회상했다.
미국 대법원 사상 최장기(1939-1975) 대법관을 지낸 윌리엄 더글러스는 자신과 예일대 법대 교수였던 서먼 아놀드가 <유머레스크> 7번에 이 가사를 붙였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이 ‘법관의 양심’과 정확한 기억 모두를 담아낸 증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교향곡 9번, ‘조스가 아니라 기차’?
이렇게 기차를 사랑한 작곡가였다면, 작품 속에도 틀림없이 기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드보르자크의 작품 중에 ‘기차’, ‘기관차’, ‘철도’ 등과 관련된 표제를 가진 작품은 없다. 그러나 그의 활동기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음악 평자들이 그의 작품 속에 깃든 ‘기차’의 흔적에 대해 언급해 왔다.
이와 관련해 가장 자주 언급되거나 그 사례로 해석되는 작품은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카’와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이다. ‘아메리카’의 경우 마지막 4악장의 빠르고 흥겨운 첫 주제부터 기차여행의 흥겨움을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신세계로부터’는 4악장 개시 부분이 기차의 출발을 묘사한 것으로 분석된다. 강렬한 포르테의 첫 음부터 현의 주도로 가속이 붙으면서 그 정점에서 트럼펫이 인상적인 제1주제를 터뜨린다. 흔히 영화 <조스(Jaws)>의 식인상어 출현 테마와 비교되고는 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의 육중함과 기계적인 느낌, 점차 에너지를 쌓아 나가는 가속력이 기차 출발을 연상시킨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생전 이 두 작품에 대해 ‘기차’와 관련된 해석이나 발언을 내놓은 일이 없다. 그런 만큼 이 두 작품에 기차의 느낌이 들어 있는지는 듣는 사람 각자의 해석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작곡가 자신이 기차와의 연관성을 밝힌 유일한 작품은 44세 때인 1885년 쓴 그의 교향곡 7번이다.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장엄한 알레그로)에 대해 작곡자는 “나는 페스트(오늘날의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체코인들을 싣고 국경절 축제에 오는 기차가 기차역에 닿는 순간 이 주제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원시의 다이내믹, 모더니즘을 예견하다
비록 작곡가 자신이 기차를 연상하며 작곡했다고 밝힌 작품은 단 하나이지만, 이 19세기 말의 오스트리아령 체코 작곡가가 기차에 매료된 점과 그의 작품들이 ‘기차의 다이내믹’을 담고 있다고 해석되는 사실은 드보르자크의 예술세계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빛을 던진다. 기차가 상징하는 단순한 힘과 현대성은 이후 20세기에 불어 닥치게 될 모더니즘의 가치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3년 5월,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초연은 이후 과장되게 회상되어 온 것처럼 쇼킹한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결국 전 유럽 음악계와 예술계에 육중한 충격음을 던져 놓았다. 이 사건은 돌출적으로 발생한 ‘문화 테러’가 아니었다. 1905년 파리의 진보적 미술가들이 주최한 독립전 ‘살롱 도톤(가을 살롱)’에는 앙리 마티스를 비롯한 일군의 미술가들이 얼핏 조야해 보이는, 강렬한, 또는 다듬지 않은 듯한 거친 작품들을 선보였다. 평자들은 여기에 ‘야수주의(Fauvisme)’ 또는 ‘야수파’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마티스의 대표작인 <춤>(1910)은 3년 뒤 출현할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에 바로 상응하는 힘과 원시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1909년에는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가 프랑스 신문인 르 피가로에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에서 그는 유럽 예술계를 지배하는 보수주의와 아카데미즘을 비판하며 ‘속도를 표현하고, 다이내믹한 힘이 용솟음치는 기계문명의 감각을 강력히 표현할 것’을 주문했다. 타국의 신문에 입장을 표명한 데서 보이듯, 국경을 넘어서는 전체 유럽 예술계에 던진 도발이었다.
이처럼 1차 세계대전 전야에는 유럽 각국 예술계의 신진 그룹들이 저마다 기존의 공고하고 형식화된 시민계급 예술에 균열을 내기 위해 약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세부 내용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들이 부수고자 노리는 표적은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예술’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힘, 다이내믹, 시민문화의 공고화된 세련성에 반하는 거칠음’이었다.
앙리 마티스, <춤>, 캔버스에 유채, 260x391cm, 1910년, 예르미타시 미술관
원시와 현대성이 손을 잡은 시대
새로운 20세기의 기술문명을 예찬하는 미래파와, 문명 이전의 원시성을 예찬하는 야수파 및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어떻게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문명 이전’과 ‘기계문명’의 예찬자 양쪽 모두가 ‘형식에 사로잡힌 세련된 시민사회의 문화’를 타파하고 힘과 다이내미즘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고 주문하는 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반에 ‘원시’와 ‘미래’는 손을 잡았다. 제물을 놓고 춤을 추는 원시인들의 불끈거리는 근육과, 힘차게 증기를 뿜는 기관차의 크랭크는 그렇게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는 기호가 되었다.
드보르자크는 이들보다 한 세대 앞서 기관차의 힘과 속도에 매료된 ‘미래적 안목’의 예술가였다. 물론 그가 활동한 시대는 미래파도, 야수파도 출현하지 않았던 후기 낭만주의의 전성기였으며 드보르자크는 빈 고전파가 확립한 교향곡과 현악 4중주의 엄격한 형식 원리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전개했다. 그러나 반드시 기차와 연계시키지 않더라도,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신세계로부터’에서 나타나는 여러 특징, 즉 1악장 종결부의 독특한 현악기 사용과 당김음이 두드러지는 리듬, 3악장에서 달려 나가는 듯한 원시적인 느낌의 메인 주제, 4악장 서두에서 힘이 축적되는 듯한 가속의 다이내미즘은 이미 한 세대 뒤 신진 예술가들이 열광했던 방향을 앞장서서 가리키고 있다.
‘기관차의 힘과 육중함, 재주, 각 부품들의 유기적인 협력’에 매료되었던 드보르자크가 만약 한 세대 뒤 활동했다면? 어쩌면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변방 체코의 천재’가 아니라 전 유럽의 예술가들을 이끄는 선도적인 존재로 존재감을 과시했을지 모른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드보르자크가 세상을 떠난 것은 야수파와 미래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기 직전인 1904년 4월이었다. 옆구리에 통증이 있는데다 마지막 오페라 <아르미다>의 공연 준비로 바쁜 가운데서도 62세의 그는 매일같이 프라하 기차역에 나갔다. 아직 찬 4월 아침의 바람을 맞은 그는 독감에 걸렸고 급격히 체력이 떨어졌다. 5월 첫날, 그는 눈을 감았다. 평생의 사랑이었던 기차가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체코 프라하에 있는 드보르자크 동상
기차를 다룬 다른 음악 작품들
드보르자크는 ‘교향시 기차’나 ‘기차 서곡’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후 작곡가들은 종종 기차가 가진 힘과 다이내미즘을 표현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1923년 프랑스 작곡가 아르튀르 오네거(Arthur Honegger)가 작곡한 <퍼시픽 231>이다. 드보르자크와 마찬가지로 기차 마니아였던 오네거는 ‘나는 여성과 말(馬)보다도 기차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제목의 ‘퍼시픽 231’은 기차 노선이 아니라 기관차의 모델명을 뜻한다. 기차가 천천히 기동을 시작해 속력을 내기까지의 모습을 정밀화를 그리듯 세밀하게 재현했다.
영국의 미니멀리즘(극소주의) 작곡가인 마이클 니만(Michael Nyman)은 1993년 기차를 형상화한 관현악곡 <MGV>를 발표했다. 제목은 프랑스의 고속열차(TGV․: train à grande vitesse)에서 딴 ‘고속음악(MGV: musique à grande vitesse)라는 뜻으로, TGV 파리-릴 라인의 개통을 기념해 선보였다. 미니멀리즘의 특징인 단순음형의 반복을 살려 기차의 경쾌하면서도 건조한 운동을 표현했다. 이 곡은 이해 9월 장클로드 카사드쉬가 지휘하는 릴 국립오케스트라와 마이클 니만 밴드가 초연했다.
글 유윤종 (음악 칼럼니스트) 연세대 독어독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동아일보 음악 전문기자와 독일 특파원, 문화부장을 역임했으며 서울국제음악콩쿠르 사무국장 및 서울시향 월간 SPO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고 동아일보에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 칼럼을 연재중이다. 신사동 음악공간 ‘무지크바움’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