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바닥이 빛나는 것들을 업고 - 인디언 수니

라라와복래 2015. 9. 11. 08:55

바닥이 빛나는 것들을 업고

시 임의진

곡ㆍ노래 인디언 수니

자작나무 숲으로 업히러 간다

나이테는 나이테를

가지는 가지를 업고

마디 굵은 솔가지는

부엉이를 업고

곤충마저 휘어져라 업고 있다

그렇게 서로의 이름표를

업어주지 않았다면

서로의 체온과 슬픔을

업어주지 않는다면

바닥이 빛나는 것들을

업어주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어부바 우리를

업어주지 않았다면

지금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으리

따뜻한 등을 껴안지도 못하였으리

나 몸무게를 줄이고 숲으로 들어간다

내 아이를 업고 잠재우는 여자에게로

여자가 업은 세월이

아이 하나뿐이랴

바람 한 점뿐이랴

‘인디언 수니’가 누구?

인디언 수니는 국악, 서양음악, 인디언 민속음악, 북아메리카 포크 등 다양한 음악을 공부하였다. 2006년 1집 <내 가슴에 달이 있다>로 데뷔, 2008년 2집 <비오는 날 해바라기>를 냈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메시지가 깊이 표현되고 있는 인디언 수니의 노래는 에코 페미니즘을 내세우는 음악 기조와 연관이 있다. '생태여성론'이라 불리는 '에코 페미니즘'은 환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만남으로 여성의 억압과 자연의 위기는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기조를 바탕으로 한 생명과 평화의 메시지를 노래하는 가수이기에 인디언 수니는 생명의 고귀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면 무대의 모양새를 따지지 않고 찾아가 노래를 부른다.

언뜻 민중가요를 부르는 민중가수들과 비슷하지만 그것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것은 빛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친 투쟁성이나 사실성이 아닌 은유적인 표현으로 자연과 생명을 노래하는 것이 인디언 수니의 음악이다. “목포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어요. 자연스레 5·18을 알게 됐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인식을 갖게 된 것이지요. 사회운동에 동조하는 마음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과격하게 이뤄지는 투쟁을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민중가요도 처음에는 좋아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 아쉬웠지요. 하지만 일반적인 사랑노래도 식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중립적인 모양새였다고나 할까? 그런 과정 속에서 생태 환경 문제를 접하며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지요.”

*‘바닥이 빛나는 것들을 업고’ 위 가사는 곡에 맞춰 변용한 것이며 임의진 시인의 원시를 소개합니다.

자작나무 숲으로 업히러 간다

나이테는 나이테를

가지는 가지를 업고

마디가 굵은 생솔가지는 부엉이를 업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곤충들까지 휘어져라 업고 있다

싸락눈이 내리면 외진 길섶부터 차곡차곡 업고

언덕만큼 쌓이자 옹달샘과 골짝물이 이젠 내 차례야

이리 업혀 줘, 다투어 등을 내밀었다. 그렇게

서로의 이름표를 업어주지 않았다면

서로의 아픔을 업어주지 않았다면

서로의 체온과 서로의 슬픔을 업어주지 않는다면

바닥이 빛나는 것들을 업어주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어부바 우리를 업어주지 않았다면

지금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으리

따뜻한 등을 껴안지도 못하였으리

나 몸무게를 줄이고 자작나무숲으로 들어간다

별밤을 업고 있는 통나무집에

내 아이를 업고 잠을 재우는

여자에게로 간다 여자가 업고 있는 세월이

어디 아이 하나뿐이랴

어디 바람 한 점뿐이랴

 

‘임의진’이 누구?

아호는 어깨춤, 떠돌이별. 사는 집은 회선재(回仙齋), 글 쓰는 방은 선무당(仙舞堂), 이른바 신선이 춤추는 집. <마중물>의 시인, <참꽃 피는 마을>, <마음의 풍경>의 수필가, 동화작가, 서양화가, 아방가르드 포크 가수, 음반 평론가, <여행자의 노래>를 비롯한 월드뮤직 음반 기획자, 지구별 오지 여행가, 한 뙈기 논밭을 일구는 농부, 그리고 진보 성향의 개신교 목사이기도 하다. 다채로운 예술 작업을 시도하고 있기에 '다종 예술 탐험가', '토털 아티스트'로 불리고 있다. 별자리는 염소자리.

추운 겨울 남쪽 바닷가에서 태어나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해남, 광주 등지를 떠돌면서 자랐다. 청년 시절엔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크고 작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울에서 여러 신학교를 기웃거리다가, 1995년 봄날, 햇살 눈부신 남쪽 고향으로 귀농하여 강진 ‘남녘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농촌목회 시작. 이후 작고 따뜻한 교회 공동체를 일구며 마을 주민들과 하나가 되어 살았고, 텃밭에 농사도 지으면서 자연 생태계에 귀의한 삶을 자족하였다.

1997년 독자들에 의해 광주에도 교회가 세워졌는데, 지금은 ‘미래에서 온 교회’로 발돋움. 2004년 겨울, 10년 동안의 담임 목회 생활을 정리하고, 생면부지인 담양 병풍산 골짝에다 황토 한옥 회선재를 지었다. 이후부터는 전업 작가로 글, 그림, 음반 등 예술 작품 활동에 전심전력을 쏟고 있다.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틈틈이 유화를 그려 국내외 개인전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노래 공연도 여러 차례 가졌다.

정리 : 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