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풍경의 비극’ ―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작품

라라와복래 2009. 6. 6. 01:58
 

 

풍경의 비극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German Romantic Painter, 1774-1840

 

 자화상 1800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풍의 선구자인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광활하고 신비한 느낌의 풍경화와 계절을 바탕으로 한 풍경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종교화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일출이나 일몰을 배경으로 한 풍경과 고딕 전통으로 귀환하였습니다. 해가 갈수록 그의 풍경화에는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점차 풍부해집니다. 그의 풍경화는 마치 어느 비극 무대의 장면처럼 모든 암울함과 음산함을 다 모아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시 한 평자는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일러 '풍경의 비극'이라고 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관통하는 커다란 지류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그의 작품에는 낭만주의 사조를 관류하는 숭고미가 나타납니다. 자연에 대한 숭배와 신에 대한 경외가 결합된 그의 그림은 신비하고 엄숙하며 종교적입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맡기고, 구름과 바위와 합일되어야 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공기와 물, 바위, 나무 등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은 나의 목표가 아니다. 그런 대상들 속에 있는 영혼과 감정을 재현해내는 것이 나의 목표다."


프리드리히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주의적인 인상이 아니라 정신 안에서 공명하는 공간의 분위기였으며, 그는 그림이 진정한 예술 작품이 되려면 ‘정신적으로 충만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를 ‘심상 풍경’이라 합니다.

 

바닷가의 달맞이 Moonrise by the Sea 1822

 

프리드리히의 그림에는 유난히 포물선 구도가 많이 쓰입니다. <바닷가의 달맞이>는 떠오르는 달이 만드는 하늘 풍광이 포물선을 그리고 있으며, 프리드리히 그림의 초월적 분위기가 가장 고조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달빛 어린 바다 풍경 Seascape by Moonlight 1830-35


유일한 수직선인 배의 돛대가 구성의 한가운데 위치하면서 바다와 하늘, 그리고 물 위의 긴 빛띠가 만들어내는 수평선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구름들과 대각선으로 병치됩니다. 이러한 기하학적 구성상의 균형은 후일 20세기 초 구성주의 추상화들에서 재현됩니다.

 

 달을 쳐다보는 남녀 Man and Woman Contemplating the Moon 1824


프리드리히가 아내 카롤리네 봄머와 함께 달을 응시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그림에 대한 평입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 길게 이어진 구릉을 보라.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는가? 당신은 고요한 신앙심으로 가득 찬 가없는 공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평온한 가운데 당신의 전 존재가 깨끗해지고 정화되며 당신의 자아 자체가 사라진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신이 전부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The Wanderer above the Sea of Mist 1818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는 프리드리히의 풍경화 중에서 가장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자 대표적 브랜드입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늘 그렇듯 정중앙에 위치시킨 인물은 오로지 뒷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그가 이 풍광과 마주하여 경탄을 하는지 두려움을 느끼는지, 우리는 그의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경을 지배하고 있는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무언지 모를 모호함이 극적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를 두고 미술 평론가들은 ‘장엄미’라고 평합니다.

 

 바닷가의 수도사 Monk by the Sea 1809


이 그림은 언뜻 요즘 많이 보는 일러스트 같습니다. 형태와 색채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이기도 합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을 것입니다.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이 그림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문광훈 고려대 교수(독문학)가 이 그림에 대해 감상한 글이 있어 추려서 옮깁니다.


(……) 그림 속 수도사는 땅의 끝에 서 있다. 이 모래언덕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대기와 땅과 바다뿐. 이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하나의 얼룩처럼 자리한다. 그래서 외롭다. 황량함과 고독은 자연의 전체 ― 우주 앞에 선 인간의 필연적 조건이다. 이것은 화면의 5분의 4를 채운 하늘에서 잘 암시된다. 물과 땅과 대기는 그가 오기 전처럼 그가 떠나간 후에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이다. (……)


대지의 선은 바다의 수평선처럼 양옆으로 뻗어간다. 그림 위의 모든 선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론가 흘러든다. 화면 위의 모습은 ‘드러난 공간’의 크기일 뿐. 안 드러난 것은 더 크고 그 한계는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 무한한 선들의 연속성 가운데 한 지점이다. 전통적 회화가 그렇듯이 깊이에 대한 묘사보다는 공간의 무한성 ― 가없는 바다와 대기의 우주적 넓이가 강조되어 나타난다. 바로 이 무제한성이 낭만적 표상의 지향점이다. 아마도 자연의 근본 요소를 이처럼 선명하면서도 밀도 있게, 생생하면서도 형이상학적으로 그린 그림은 드물 것이다. (……)


하늘은 경계를 모른 채 여기에 있으면서도 저기에 닿아 있다. 바다는 출렁거리며 그 너머로 흘러들고, 모래언덕도 저편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저 어두운 바다와 회색 구름의 층 너머 다른 세계는 있는가. 물과 하늘 너머, 땅과 역사와 세상살이의 저편에 좀더 정화된 세계가 있는 것인가? 세계의 지평은 무한의 지평이다. 이 지평에서 우리는 무한의 어떤 끝자락을 섬광처럼 떠올린다. 그 경험은 놀라움을 지나 전율에 가깝다. 그래서 신성하다. (……)

 

 뤼겐 섬의 백악 절벽 Chalk Cliffs on Rügen 1818


민음사에서 출판한 노발리스의 <푸른 꽃>의 표지화로 사용된 그림입니다. 프리드리히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이며, 1818년 여름 아내 봄머와 뤼겐 섬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그린 풍경화로 인생의 순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화면 왼쪽에 있는 여자가 신부고, 화면 오른쪽 모자를 쓰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프리드리히 자신입니다. 서양화가이자 시인인 박희숙의 감상 안내 글(부분)입니다.


(……) 화면 앞 풀이 무성하고 좁다랗고 긴 단단한 지면에 세 사람이 있다. 화가 옆에 서 있는 나무는 너무 울창하게 뻗어 있어 맑은 하늘을 가리고 있고 화면 아래쪽 심연에서 솟아오른 하얀 백악은 V 형태를 이루고 있다. 풀이 무성한 지면은 어두운 색으로 백악은 하얀색으로 표현해 화면에 깊이를 준다. 멀리 보이는 망망대해에 두 척의 범선이 떠 있다. 한 척은 절벽 쪽 가까이 한척은 수평선 가까이 있다. 배는 현재 좁고 익숙한 해변을 떠나 먼 곳으로 출범하고 있다. 그는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대비하며 비교함으로서 효과를 높였다. 이 작품에서 오랜 항해를 암시하는 배는 화가 자신과 아내의 인생을 상징하고 있다. 지금까지 익숙한 환경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미래를 함께 하는 영원한 약속인 결혼과 수평선을 향해 가는 배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암시한다. 풀이 무성한 땅과 양쪽에 서 있는 나무가 하트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프리드리히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 옛날 독일 의상을 입고 서 있는 인물은 이상화된 젊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두 사람 가운데 엎드려 있는 노인은 화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인물은 두려워하며 여인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확인하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결혼 생활의 두려움을 암시하고 있다.

  

 범선에서 on Board a Sailing Ship 1819


화가 자신과 화가의 이상형 모델이자 아내인 카롤리네 봄머로 추측되는 남녀가 손을 잡고 교회 첨탑과 건물들이 안개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전방의 도시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좁은 배 위에서의 감정적 밀착, 전방 목표를 향해 미끄러지듯 고요하게 나가는 범선, 쐐기 같은 배의 앞부분을 원근법으로 그린 대담한 구도 등에 대한 발상은 수십 년 뒤 인상주의 작품에서 만나게 됩니다.  

 

 

 떡갈나무 숲속의 수도원 Abbey in the Oakwood 1809-10


황혼 무렵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서 있는 숲속 수도원의 폐허에서 고요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끝나지 않는 겨울과 황폐와 절망을 읽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고비를 넘긴 겨울과 멀리 다가오고 있는 봄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 장례식은 재생과 부활의 순간이 올 때까지의 평안한 휴식에 드는 과정으로 생각됩니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눈 덮인 수도원 묘지 Cloister Cemetery in the Snow 1817-19


흑백영화의 한 컷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헐벗은 나무들과 기울어진 십자가, 수도사들의 행렬이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자아냅니다. 그러나 장례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향하는 수도사들의 행렬에서 생명의 새로운 순환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다음 그림 <엘데나 폐허>와는 대척점에 있는 그림이라 할 것입니다.

 

 엘데나 페허 Eldena Ruin 1825


프리드리히의 신비를 잘 드러내주는 그림입니다. 흔적만 남은 과거의 건물 유적이 인간사의 무상함을 나타낸다면, 푸르른 숲과 나무는 자연의 생명력을 나타냅니다. 과거의 유적과 거대한 자연에 파묻혀 사는 인간은 그림에 표현된 것 이상 작게 느껴지는데, 그 알 수 없는 미지의 깊이에 저절로 경외감이 듭니다.

 

 눈 아래 묘지 Graveyard under Snow 1826


좀 떨어진 곳에서 무덤을 바라보는 다른 그림들과 달리, 이 그림은 바로 발밑에 새로 들어올 관을 위해 파헤쳐진 무덤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과의 단절감과 고독감이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그림, 하지만 어떤 홀가분함과 죽음의 서글픈 아늑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그림입니다.

 

 눈 속의 고인돌 Dolmen in the Snow 1807


프리드리히의 겨울 풍경에는 고즈넉한 무덤이(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교회 묘지까지)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그림들을 볼 때면, 활기차지만 번잡하고 속된 인간 세상과의 단절감이, 그런 단절이 주는 슬픈 안정감이, 그리고 인간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어떤 근원적인 고독감이 느껴집니다.

 

 겨울 풍경 Winter Landscape 1811


이 그림에는 묘지가 나오지 않는데도 프리드리히의 겨울 풍경 중에서 가장 암담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는 그림입니다. 앙상한 가지의 고목들, 그나마 대부분은 잘라져 밑동만 남은 나무들 사이에 서 있는 방랑자에게는 무덤이라는 최소한의 안식처도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이 주는 차가운 편안함도 그에게는 사치일까요? 그는 절망으로 가득 찬 컴컴한 하늘 아래에서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끝없는 방랑을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와 참으로 어울리는 그림입니다.

 

 교회가 있는 겨울 풍경 Winter Landscape with Church 1811


앞 그림과 이 그림은 같은 해에 비슷한 크기로, 즉 한 쌍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적막감이 감돌며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전경에 하얀 눈이 쌓여 있고, 중경에 커다란 전나무가 서 있으며, 원경에 아스라이 고딕풍의 교회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나무와 그 앞 바위 사이에 사람 모습이 보입니다. 가슴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 앞에는 예수가 못 박혀 매달려 있는 고동색 십자가가 있고 전경 눈밭에는 목발이 따로따로 흩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눈밭 속에서도 푸르른 전나무는 변함없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저 멀리 있는 교회는 언제나 그와 함께 존재하며 이 잔혹하고 불분명한 현실 세계에서 그를 구원해 주는 신을 표상합니다. 

 

 까마귀들의 나무 The Tree of Crows 1822


강한 색채 대비에 기초를 한 이 그림의 전체 분위기는 황량함 그 자체입니다. 왼쪽 원경에는 섬의 절벽과 멀리 바다로 내달리는 좁은 암초가 보입니다. 기괴하게 가지가 비틀리고 잎이 다 떨어진 떡갈나무는 주변 나무들과는 달리 온갖 풍상에도 끈질기게 버텨 서 있습니다. 까마귀와 함께 재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붉은 그루터기와 나무 파편들이 이 그림의 음산함을 인상적으로 전합니다.

 

 빙해 The Sea of Ice 1824


이 그림은 오늘날 화가의 주요 걸작 중 앞머리에 꼽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구도와 주제의 급진성으로 호응을 얻지 못한 채 1840년 화가의 임종 시까지 팔리지 않았었습니다. 인적이 끊긴 황량한 극지에서 무리를 이룬 얼음들에 의해 서서히 부서지고 있는 범선은 당시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치하에서 독일의 민족정신을 옥죄는 정치적 겨울에 대항하는 화가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얼음같이 차가운 색채가 북극의 배경과 어울리는 이 매혹적인 작품은 한편으로 어린 시절 화가 자신의 실수로 동생을 빙판에 익사하게 한 비극적 사건을 부분적 모티브로 삼았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삐쭉삐쭉 쪼개진 피라미드 형태로 솟아오른 앞쪽의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을 중량감 없어 보이는 투명한 뒤쪽 원경이 엄숙한 고요함으로 포용하며 새로운 순환이 임박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산중의 십자가 Cross in the Mountains 1812


프리드리히의 원숙미를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전통적인 종교화에서 과감하게 탈피한 이 작품은 풍경화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림 구성의 모든 요소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프리드리히 자신이 기록했는데, 바위산은 ‘신심’을, 석양의 태양 광선은 ‘그리스도 이전 세계의 종말’을, 전나무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한국어판

노르베르트 볼프 저 / 이영주 역

마로니에북스(베이식아트시리즈) 

 

 

 



 

 

 

 

  

 

 

슈베르트의 음반 재킷을 명화로 구성한 경우 오른쪽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CD음반 재킷처럼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사용한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유독 프리드리히의 그림이 애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프리드리히가 슈베르트와 같은 시대, 같은 사조, 가까운 공간에 살았던 게르만 낭만주의 예술가라서 그런 것일까요? 또는 프리드리히가 겨울 풍경을, 황량하고도 신비로운 겨울 풍경을 많이 그렸기 때문에? 아니면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고독한 방랑자가 자주 등장해서? 아마 이런 이유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깡마른 겨울 나무와 스산한 겨울 풍경을 즐겨 다루며 ‘상실의 계절’ 겨울에 집착하면서도 디테일은 다릅니다. 아버지에게 내침을 당해 줄곧 친구 집을 전전하며 실제 방랑자의 삶을 살았던 슈베르트의 음악에서는 현실을 탄식하고 체념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반면,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는 오히려 고독을 넘어선 구도자적 염원이 읽혀집니다. 어쨌든 ‘영원한 겨울나그네’ 프리드리히의 그림과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아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