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이반 크람스코이 - 깊은 영혼까지 초상화에 담아내다

라라와복래 2016. 3. 24. 11:42

이반 크람스코이

깊은 영혼까지 초상화에 담아내다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220562744015    2015.12.08

네이버 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 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처음 만나는 그림>(아트북스, 2009)과 <아트 북스,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 <그림 속 소녀의 웃음이 내 마음에>(을유문화사, 2017)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전업 미술가가 아니면서도 ‘그림을 읽어주는 남자’ 선동기 님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자신만의 상상을 더하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다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초상화에 대한 설명은 늘 어렵습니다. 특정인의 얼굴을 담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작품에 사용된 기법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나면 그다지 할 말이 없는 까닭이지요. 그래서 그동안 의도적으로 초상화가 주된 분야였던 화가들은 건너뛰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러시아의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y, 1837-1887)는 도저히 건너뛸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산을 쓴 여인 A Woman Under a Parasol, oil on canvas, 1883

야생화가 피어 있는 언덕에 몸을 기대고 있는 여인의 눈빛이 아련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여인이라는 표현보다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아가씨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얼굴입니다.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산책길이 조금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숨을 고르는 여인들 주변으로 가을 햇살이 환하게 내려앉았습니다. ​저렇게 풀섶에 몸을 기대고 있으면 풀이, 꽃이 여물어 가는 향기를 느낄 수 있었지요. ​시간은 아주 느릿느릿 흘러갈 것이라고, 이 시간은 아주 오래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참 잠깐이더군요.

크람스크이는 러시아 남서부 보로네시의 오스트로고즈스크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지방의 관리였다고는 하지만 가난한 소시민 가정이었습니다. 지역학교에서 기본교육을 받은 크람스코이는 어린 시절 그림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신 스스로 드로잉을 공부했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이콘을 그리는 화가의 견습생이 되는데, 다음해, 그는 사진사 밑으로 자리를 옮겨 사진을 교정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목발을 든 노인 Old Man with a Crutch, 76.5x57.5cm, oil on canvas, 1872

헝클어진 머리,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남루한 옷을 걸친 노인이 힘겹게 목발을 짚고 일어서려 하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목발을 쥔 손에는 손등에 힘줄이 일어설 만큼 힘이 들어갔습니다. 몸 전체도 긴장을 한 듯 표정도 살짝 일그러졌습니다. 간단치 않은 인생의 끝부분, 그러나 노인의 눈빛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몸이 힘든 것이지 정신이 불안한 것은 아니라는 듯 니다. 어쩌면 세월도 이 노인 앞에서는 잠시 예를 갖출 것 같습니다

열아홉이 된 크람스코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도 사진 교정을 하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입학하자마자 아카데미에서 크람스코이는 드로잉과 회화에서 타고난 재주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재학 중 그는 학생들의 인기 있는 리더가 되었고 주변에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리더는 돈이 많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는 남이 따르고자 하는 정신의 소유자였던 모양입니다.

광야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Wilderness, 180x210cm, oil on canvas, 1872

다시 아침이 밝기 시작했습니다. 황무지와 바위투성이인 광야에서 기도를 시작한 지 꽤 오랜 날들이 지났습니다. ​맨발의 그리스도는 밤새 올린 기도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 두 손을 풀지 않고 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밤의 찬 기운을 피할 곳도 없는 생활은 얼굴을 핼쑥하게 만들었지만 눈빛은 점점 깊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과 다가올 세상에 대해 새로운 약속을 준비해야 하는 길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 작품은 크람스코이의 기념비적인 작품인데, 작품을 통해서 그는 사회에 대한 도덕성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성은 그가 평생 가지고 갔던 기준이기도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두고 ‘내가 본 그리스도 중 최고’라고 말했다지요.

아카데미를 졸업할 무렵 크람스코이에게 중대한 일이 일어납니다. 학교에서는 졸업 작품으로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할 것을 지시했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친구들이 학교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었지요. 자유로운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결국 크람스코이를 포함, 총 14명은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합니다.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해 가는 길이 평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독서 중인 소피아 크람스카야 Sophia Kramskaya Reading / oil on canvas / 1863

그림의 제목을 보면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은 크람스코이의 아내 소피아인 것 같습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타고 넘은 다음 그녀가 읽고 있는 책에 내려앉았습니다. ​독서 중인 그녀의 얼굴이 책에서 반사된 빛으로 환합니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독서삼매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더욱 고혹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은 언제 봐도 좋습니다. ​용감한 14 명의 ‘안주인’다운 모습입니다.

아카데미를 나온 14명의 용감한 젊은 화가들은 집과 화실을 나누어 쓰는 모임을 만들게 됩니다. ​이들의 뒷바라지는 크람스코이의 아내인 소피아의 몫이었습니다. ‘새우잠을 자도 함께라면 행복한 것’이 신념입니다. ​크람스코이는 젊은 화가들을 위한 드로잉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재능 많은 선생님이었던 그에게서 배운 학생 중에는 일리야 레핀과 야로센코도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초상화 Portrait of Leo Tolstoy, 98x79.5cm, oil on canvas, 1873

톨스토이는 여러 장의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트레차코프는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가지고 싶었지만 톨스토이가 여러 번 거부하는 바람에 전전긍긍하다가 크람스코이에게 부탁을 합니다. 크람스코이를 만난 톨스토이는 기꺼이 그를 위해 모델이 되어줍니다. ​서로의 인간성에 반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톨스토이 초상화 중 최고의 작품이 탄생했고 <안네 카레니나>를 집필 중이었던 톨스토이는 크람스코이의 성격을 소설 속 조연 중 한 명인 미술가 미하일로프에 반영합니다. ​멋진 화가와 작가였습니다.

크람스코이는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남긴 60여 점의 초상화는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사진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구도는 간단했지만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초상화 주인공의 깊은 내면까지 정확하게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그런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미술계의 후원자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트레챠코프였습니다.

말괄량이 소녀 A Girl with an Unruly Disposition, oil on canvas, 1873

무엇인가 잔뜩 토라진 모습입니다. 오뚝하게 솟은 코를 보니 고집도 있어 보입니다. ​입을 꼭 다물고 한 곳을 쳐다보는 시선에는 한참 동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짜증도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입니다. ​속상한 일이 있었군요!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세상에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이렇게 토라지는 순간들도 점점 줄어들겠지요. 지금은 스스로 풀릴 때까지 그냥 있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트레챠코프는 크람스코이에게 주기적으로 당시 러시아의 유명한 예술가와 과학자들의 초상화 제작을 의뢰합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것은 러시아 예술의 고유한 특성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근대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길게, 그리고 넓게 바라보는 안목이 후세에 얼마나 많은 유산을 남겨줄 수 있는지 트레챠코프에게서 배웁니다.

여인의 초상화 Portrait of a Woman, 1881

두 손으로 책을 들고 독서 중인 여인의 눈이 커졌습니다. 심각한 대목인 모양입니다. ​책에 집중한 여인의 모습에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잠시 멈춘 듯합니다. ​여인의 가느다란 숨소리만 들리는데 어깨를 두른 숄이 내려간 것도 모르게 만든 책의 내용이 궁금합니다. ​예전에는 공공장소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던 책 읽는 모습을 요즘은 그림 속에서 만나곤 합니다. ​그 근사했던 풍경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서른두 살이 되던 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는 크람스코이를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합니다. 학교를 떠난 지 6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처음으로 크람스코이는 외국 여행길에 오릅니다. 베를린과 뮌헨 등 독일의 주요 도시를 거쳐 안트베르펜(안트워프)와 파리, 빈에 이르는 여정이었습니다. 귀국 후 연대감이 떨어진 14명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팀 모임을 그만두고 그는 러시아 미술의 분수령이 되는 ‘이동파’를 조직합니다.

미지의 여인의 초상화 Portrait of an Unknown Woman, 75.5x99cm, 1883

마차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인의 모습에는 확실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 당당함이 어려 있습니다. ​그런데 도도해 보이는 차가운 표정 안에는 꼭 누르고 있는 뜨거운 열정도 함께 느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러시아 여인의 외모입니다. 이 작품 속 여인은 크람스코이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주인공 안나를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신의 생을 마감했던 소설 속 그녀의 모든 것을 상상으로 모두 담아낸 화가의 표현에 그저 감탄을 할 뿐입니다

크람스코이가 주동이 된 이동파는 화가와 대중, 그리고 사회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대중들에게는 당대 러시아 미술 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러시아 사회에 대해서는 미술에 대한 관심을 끌어 올려 화가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 보다 쉽게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동파가 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에 미친 영향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굴레를 들고 있는 농부 Peasant Holding a Bridle, oil on canvas, 1883

이런 노인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세월을 뚫고, 때로는 세월과 나란히 걸어온 흔적을 얼굴과 몸에 가득 담고 건강하게 웃는 모습은 늘 저에게 경외감과 부러움을 주곤 합니다. 여전히 현역인 듯 굴레를 한쪽 팔뚝에 잔뜩 걸고 있는 모습에서 앞으로 노인에게 다가올 세월도 별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에, 삶에 지칠 때마다 이 그림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삶은 악착같이 버티는 자의 것이니까요.

크람스코이는, 화가는 사회에 대해 도덕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대의 사회적인 이상과 높은 도덕을 추구했고 예술의 진실과 아름다움, 도덕, 미적 가치는 상호불가분의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그의 생각을 처음에는 소수의 인원들이 동조했지만 나중에는 많은 후배 화가들이 따르게 됩니다. ​그를 뛰어난 미학 이론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깊은 슬픔 Inconsolable Grief, 22.8x14.1cm, oil on canvas, 1884

제목이 아니어도 그림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지가 무겁습니다. ​검은 옷을 입을 여인은 수건으로 입을 가렸지만 흐느낌마저 막을 수는 없습니다. 흐트러진 앞머리 밑, 여인의 눈은 슬픔을 넘어 절망에 빠진 모습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절망에서 나오는 법을 알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말을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슬픔은 슬픔이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의지였습니다. ​여인에게 슬픔이 세상 끝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크람스코이는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관객들이 보기에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는 자신의 기법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흔들리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쉰 살이던 해 크람스코이는 의사 라우흐푸스의 초상을 그리다가 손에 붓을 든 채로 이젤 앞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크람스코이다운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라우후푸스의 초상화는 미완성인 채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