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adimir Horowitz - Mendelssohn, Variations sérieuses, Op.54
주제와 17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 Op.54는 1841년 6월 4일에 작곡이 끝나 1842년 1월 런던에서 출판된 피아노곡으로, 작곡가의 창작열이 가장 높던 시기에 작곡된 작품이다. 출판 당시 출판업자인 피에트로 메체티는 ‘베토벤 앨범’이라는 헌정 악보집을 기획했고, 리스트와 쇼팽, 모셀레스의 작품들과 더불어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을 포함시켰다.
베토벤의 <32개의 변주곡 C단조> WoO80을 모델로 한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은 제목이 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작곡가 자신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D단조, 그리고 언짢은 듯”이라고 이 곡을 간략하게 설명한 적이 있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본다면, 작곡가는 아마도 변주곡의 견고한 형식과 아이러니한 내용을 대비시키고자 일부러 ‘엄격’이라는 단어를 해학적으로 사용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사적으로 이해하자면 가볍고 기교적인 피아노 작품들이 난무하던 당대 음악계에 베토벤이 보여주었던 위대한 변주곡의 이상을 ‘엄격’하게 계승하고자 했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가능할 듯하다.
베토벤의 이상을 재현한 낭만파의 명 변주곡
이 작품은 피아니스틱한 효과와 치밀하면서도 매끄러운 변주의 전개, 전체 흐름에서 기인하는 드라마틱한 효과, 폭발적이면서도 사색적인 코다로 인해 피아노 연주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동안 사랑받고 있는 명곡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멘델스존의 동료였던 이그나츠 모셀레스는 “이 엄격 변주곡을 연주하고 또 연주했지만, 매번 그 아름다움에 빠지곤 했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을 정도로 당대부터 인정받았던 이 변주곡은, 이후 페루치오 부조니가 대단히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호로비츠, 리흐테르, 제르킨, 아라우, 볼레, 소프로니츠키, 페를레무터, 브렌델 등과 같은 시대의 명 피아니스트들 또한 모두 이 작품을 연주, 녹음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멘델스존의 피아노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탁월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낭만주의 시대의 변주곡 스타일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곡이다. ▶고향 본에 있는 베토벤 기념상.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은 이 입상을 세우기 위한 캠페인을 돕기 위해 작곡되었다. 멘델스존은 베토벤의 이상을 이어받아 엄격하면서도 자유분방한 감수성의 피아노 변주곡을 창작했다.
보통 멘델스존의 피아노곡은 소품의 범위 내에서 평가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의 대표적인 피아노 작품인 <무언가집>을 보자면 시의 영역에 도달한 음악의 위대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걸작이지만, 형식적인 면에서 고도의 기교를 자랑한다거나 복잡한 음악 형식의 융화 같은 원대한 이상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단 한 곡의 피아노 소나타만을 남겼을 정도로, 길거나 커다란 형식의 작품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하다. 이렇게 그는 대부분 짧고 압축된 형식의 피아노 작품을 작곡한 미니어처 양식의 선구자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멘델스존이 피아노 음악에 얼마나 정통했고 그 양과 질 모두 방대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18년 10월 28일 9살의 나이로 처음으로 공개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을 정도로 멘델스존은 피아노의 명수로 그의 재능 가운데 가장 먼저 각광을 받았고, 그의 누이인 파니와 함께 피아노 듀오도 오랜 동안 연주하며 평생토록 피아노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전형적인 피아노 비르투오소였다. 작곡에서도 그는 많은 피아노 작품을 남겼다. 그가 젊었을 때 즉흥연주 혹은 습작으로 작곡한 피아노 작품(현재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다)들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그의 피아노 솔로 작품은 CD 8장 분량이 될 정도이고 피아노 협주곡과 피아노를 수반하는 실내악 작품들까지 고려한다면 그 양은 훨씬 많아진다.
멘델스존의 피아노 음악은 그 내용과 형식이 다양하기 그지없다. 장중하고도 엄격한 대위법 형식의 바흐 스타일이 새로운 형태로 재조립된 <프렐류드와 푸가> Op.35, 슈만을 예견하는 듯한 동화적인 상상력과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6개의 어린이를 위한 소곡> Op.72, 쇼팽의 작품에 버금가는 테크닉과 드라마틱한 전개를 요구하는 <세 개의 연습곡> Op.104, 고전주의적인 화려함과 리스트적인 기교의 절묘한 결합을 선보인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Op.14 등, 그는 피아노의 세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19세기를 특징지을 수 있는 발전된 형식과 풍부한 내용을 이미 예견했던 것이다.
현란한 기교와 내면의 심상을 용해시킨 탁월한 솜씨
멘델스존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화려한 변주곡 양식(Variations brillantes)이 무대를 사로잡고 있었는데, 이 <엄격 변주곡>은 이러한 작품들이 추구했던 피아니스틱한 효과를 간과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외향적인 기교와 한 개인의 내면의 심상을 용해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반음계적인 주제와 형식은 엄격한 고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역설적으로 이를 교란시키는 변주들과 그 뜨거운 열정은 가히 폭발적이다. 가히 파우스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작품의 마지막 피날레는 “마녀들의 축제”(알프레드 코르토)라고 묘사될 정도로 악마적이며, 이러한 소란스러움은 절망적인 고요함에 묻혀 서둘러 종결된다.
주제 못갖춘마디로 이루어진 16마디의 두도막 형식으로, 조성이 부분적으로 흐려지며 낭만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1변주 16분음표의 장식음들이 푸가처럼 움직이며 종적인 진행을 고취시킨다.
2변주 변형된 주제가 상성부에서 흘러나오며 한층 변화된 변주가 진행된다.
3변주 2변주와 연결되어 가벼운 스타카토로 연주되며 한층 활기찬 모습으로 발전된다.
4변주 스타카토의 양손 음형은 동일하지만 진행은 상반되어 불길함을 예시한다.
5변주 수직적인 싱커페이션 리듬을 연속으로 사용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6변주 옥타브 코드의 도약이 특징적이며 무궁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7변주 코드와 아르페지오의 엄격한 음형이 대조를 이루며 화려함을 더한다.
8변주 스포르찬도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대목으로서 섬세한 음향의 대비가 중요하다.
9변주 양손의 셋잇단음표가 매끄러움을 더한다.
10변주 이 변주곡 가운데 유일한 푸가 형식.
11변주 화음에 페달이 가세하며 낭만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12변주 빠르고 강력한 변주로서 왼손과 오른손의 32분음표가 대화하는 듯 연결된다.
13변주 32분음표의 오른손이 빠르게 진행하며 왼손의 주제를 진행한다.
14변주 아다지오로 4성의 폴리포니 형식이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5변주 몹시 빠른 변주로 왼손과 오른손이 대칭적인 싱커페이션 효과를 준다.
16변주 셋잇단음표로 양손이 묶여져 진행하는 일종의 카덴차적인 성격의 변주.
17변주 16변주의 연장으로 가장 긴 변주다. 마지막 프레스토 피날레는 화성이 복잡하고 색채적으로도 화려하며, 그 음악 효과는 지극히 낭만적이다. 낭만주의의 감수성과 고전주의의 형식미를 융합하고자 변주곡 양식을 발전시킨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직감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1.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1946년 녹음(RCA)은 작품의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한 연주로 숨 막힐 듯 빠른 템포와 연주자의 초절기교가 현란하게 쏟아지는 희대의 명연으로 손꼽을 수 있는 연주이다.
2. 블라도 페를레무터의 1986년 녹음(Nimbus)은 이 작품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음향을 뽑아낸 신비로운 연주로 기억된다.
3. 알프레드 브렌델의 엄격하면서도 구조적인 연주(Philips)도 이 작품에 대한 가장 안정적이고 훌륭한 해석으로 선뜻 추천할 만하다.
4. 머레이 페라이어의 연주(SONY) 또한 브렌델과는 다른 방향에서 변주의 아름다움을 조명한 명연으로 그 명성이 높다.
글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왔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